지난해 1월 23일 김성근 감독이 일본 고치 스프링캠프에서 3루수 김회성과 펑고 훈련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작은 사진은 1월 23일 넥센이 미국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 박병호와 함께 훈련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프로 초창기 스프링캠프의 특징은?
해외 스프링캠프는 프로야구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2년 6개 구단 체제로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다음 시즌인 1983년부터 해외로 전지훈련을 떠나기 시작했다. 4계절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한국에선 추운 겨울에 프로 선수들이 체계적으로 몸을 만들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구단들은 따뜻한 나라에서 훈련 효과를 높이는 한편 선수들이 팀워크를 다지고 사기를 끌어올리기를 원했다. 또 미국과 일본 같은 해외 선진 구단과 교류해 더 높은 차원의 야구 기술을 익히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초창기 선수들의 전지훈련은 요즘과 같은 효과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에는 12월과 1월이 비 활동 기간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몸 관리의 중요성을 몰랐던 선수들이 두 달 동안 정말 ‘휴식’만을 취하다 캠프에 왔기 때문이다. 2월 1일에 훈련이 시작되어도 훈련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려면 며칠이 그냥 흘러갔다. 특히 투수들은 전력으로 공을 던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요즘 투수들이 캠프를 떠나자마자 불펜 피칭을 시작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야수들 역시 술과 과식으로 불어난 체중을 캠프에 와서야 빼기 시작했다. 선수단 전체가 훈련다운 훈련을 하려면 2월 하순은 돼야 했다는 게 야구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 때문에 한국 선수들은 일본 스프링캠프에서 망신도 많이 당했다. 일본 1군도 아닌 1.5군 선수들과의 연습경기에서 힘도 못 써보고 압도당하는 일이 잦았다. 일본 선수들은 당시에 이미 요즘의 한국 선수들처럼 완벽하게 준비된 몸으로 캠프를 시작하곤 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실력 차도 원인이었지만, 이제 갓 프로로 걸음마를 뗀 한국 선수들의 몸 상태와 더딘 훈련 페이스도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 해외 스프링캠프의 풍경
1983년에 가장 먼저 해외 스프링캠프를 떠난 팀은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팀인 OB였다. 당시 새로 개장했던 이천구장 실내훈련장과 그라운드에서 기초 체력훈련을 하다 그해 1월 30일에 대만의 가오슝으로 떠났다. 또 2월 24일부터 3월 4일까지는 일본 후쿠오카와 미야자키에서 2차 캠프를 진행했다. 소프트뱅크의 전신인 난카이 호크스와 연습경기를 치르면서 처음으로 일본 프로 선수들과의 맞대결을 경험하기도 했다.
해태는 1983년 김응용 감독을 맞아들이면서 2월 4일부터 26일까지 3주가량 일본 오사카와 고치 전지훈련을 진행했다. 오릭스의 전신인 한큐 브레이브스와 친선경기도 치렀다. 삼성은 2월 10일부터 3월 14일까지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 달 넘게 스프링캠프에 임했다. 롯데는 기간이 짧은 대신 내실을 다진 케이스다. 2월 14일부터 2주 동안 일본 가고시마에서 자매구단인 롯데 오리온스와 합동 훈련을 진행했다. 일본 선수들의 훈련을 직접 옆에서 지켜본 게 큰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프로야구 원년 6개 구단 가운데 해외로 전지훈련을 가지 못한 두 팀은 삼미와 MBC다. 삼미는 당초 해외 스프링캠프 계획을 세웠다가 나중에 취소하고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선수들의 훈련 장소를 만드는 고육지책을 썼다. 이유가 있다. 돈이 부족했다. 프로 첫 해 꼴찌에 머문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천 야구의 대부인 김진영 감독을 맞아 들였다. 또 재일교포 선수인 장명부를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몸값이었던 연봉 1억 원에 영입했다. 국가대표 출신 투수 임호균, 포수 김진우, 내야수 이선웅까지 선수 13명도 새로 받아 들였다. 스카우트 비용에 돈을 너무 많이 쓰면서 예산이 부족해졌다. MBC는 아예 처음부터 해외 전지훈련을 엄두도 내지 않았다. 한국에서 그나마 따뜻한 경남 진해로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다면 첫 해외 스프링캠프에 지출해야 했던 돈은 얼마였을까. 구단별로 6000만 원에서 1억 2000만 원까지 들었다고 한다. 수십억 원을 쓰고 오는 요즘과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구단 운영비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꽤 큰 액수였다. 그나마 전지훈련 기간도 지금보다 훨씬 짧고 참가 인원도 적었기에 이 정도 비용으로 충당이 가능했다.
이듬해인 1984년에는 일본과 대만 위주였던 훈련 장소에 변화가 생겼다. 롯데가 처음으로 괌의 초청을 받아 현지에 스프링캠프를 차리면서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특히 롯데는 이때 괌에서 일본 최고의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와 함께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꼭 요미우리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롯데는 그해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해 스프링캠프에 대한 투자금을 제대로 회수했다.
삼성 라이온즈의 미국 괌 스프링캠프.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사실 한국 프로야구는 맨 처음 일본 프로야구를 교본으로 삼았다. 실업야구에서 막 벗어나 처음으로 갓 ‘프로’라는 이름표를 단 한국 야구가 하루아침에 그럴 듯한 프로리그로 자리매김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쉬운 일이 아니다. 선수들의 기량과 훈련 방식은 아직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구단 운영도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프로야구 초창기의 해외 전지훈련은 선수들과 구단 프런트들 모두가 선진 야구를 직접 보고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일단 무엇보다 스프링캠프에서 직접 지켜본 일본 프로 선수들의 훈련 방식이 그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잠시도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지옥훈련과 체계적인 훈련 스케줄, 완벽하게 준비된 선수들의 몸 상태는 물론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완벽하게 갖춰진 훈련 시설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또 연습경기에서 지켜본 일본 투수들의 정교한 제구와 타자들의 정확한 타격, 야수들의 완벽한 수비 능력 등이 국내 선수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이 때문에 한국 야구는 일본의 야구 용어뿐만 아니라 훈련법도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일본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좋은 부분을 흡수하려 애썼다.
#1985년 삼성이 미국서 느낀 문화적 충격
한국 프로야구 스프링캠프 역사에 새 지평이 열린 것은 1985년이었다. 삼성이 처음으로 야구의 본고장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삼성은 당시 이건희 구단주가 엄청난 투자와 애정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1982년과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패하면서 분루를 삼킨 뒤였다. 급기야 구단주의 지시 아래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 LA 다저스가 스프링캠프를 치르는 미국 플로리다 베로비치로 날아갔다. 이건희 구단주가 1982년 10월 다저스의 피터 오말리 구단주와 직접 만난 자리에서 약속을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처음에는 고생스러웠다. 직항으로 비행기를 타도 날아가도 먼 거리인데, 심지어 세 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고 나서야 겨우 베로비치에 도착했다. 선수들은 생소한 장거리 비행이 끝나자 녹초가 돼 곯아 떨어졌다. 한국과 정반대로 바뀐 시차 적응도 난제였다. 그러나 일단 훈련이 시작되자 모든 게 달라졌다. 일본 구단들의 캠프를 보고도 놀랐던 한국 선수들에게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는 더 큰 문화적 충격을 안겼다. 넓디넓은 잔디 위에 큼직한 야구장 4면이 펼쳐져 있는 것부터 여덟 개의 배팅훈련장과 최첨단 시설의 웨이트트레이닝장이 갖춰져 있는 것까지, 단지 선수들의 캠프만을 위해 만들어진 훈련 전용 시설들이 감탄을 자아냈다.
훈련방식도 달랐다. 이전까지 한국 지도자들과 선수들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본식으로 지옥훈련을 하는 게 진정한 프로 정신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메이저리거들은 오전에 모든 훈련 스케줄을 끝내고 오후에는 자율적으로 시간을 보냈다. 다저스 코치들의 지도 아래 훈련을 받았던 삼성 선수들이 오히려 “훈련이 성에 차지 않는다”며 당황해할 정도였다. 다저스 캠프로 간다는 사실에 흥분했던 당시 김영덕 삼성 감독도 “이 정도 훈련으로 선수들이 제대로 기량을 끌어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걱정했다는 후문이다. 결국 당시 다저스 토미 라소다 감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야간에 조명을 켜놓고 추가 훈련을 진행하다 플로리다의 모기떼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다.
지도방식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삼성 선수들에게 다가온 다저스 코치들은 맹훈련을 주문하고 고급 기술을 전수하는 대신, 기본적인 자세만 알려준 뒤 쉴 새 없이 선수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삼성 입장에서는 다저스 캠프에서 보내는 귀한 2주의 1분 1초가 아까운데, 코치들은 선수들에게 ‘왜’를 가르치고 토론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많은 야구관계자들은 “당시 다저타운에서 보낸 스프링캠프가 이후 삼성이 명문구단으로 자리 잡는 초석이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삼성의 지도자들과 선수들이 직접 체험하고 지켜본 다저스의 훈련 방식과 전술, 전략이 현재 삼성 야구의 근간을 이루고 있어서다. 투구, 타격, 수비, 베이스러닝 등 야구 전반에 걸쳐 영향을 받았지만, 특히 수비에서 특화된 삼성만의 번트시프트, 커트플레이, 런다운 플레이, 픽오프플레이 등과 수비 포메이션은 대부분 그때의 캠프에서 틀을 잡아 진화하고 발전한 기술이다.
메이저리그 캠프를 체험하고 돌아온 삼성은 그해 전기리그와 후기리그에서 모두 우승해 한국시리즈 없이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이후 많은 구단은 점차 일본을 넘어 미국으로 스프링캠프 원정을 떠나기 시작했다.
배영은 스포츠 자유기고가
애리조나 캠프 ‘오타니 열풍’ ‘괴물’이 뜨니 스카우터 분주 오타니 쇼헤이 사진출처= 니혼햄 파이터스 이유가 있다. 오타니의 소속팀 니혼햄은 올해 1987년 이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애리조나주 피오리아로 해외 스프링캠프를 떠났다. 메이저리그팀 샌디에이고가 시애틀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피오리아 스포츠 콤플렉스를 무료로 빌려주기로 했다. 애리조나는 많은 한국 구단들도 전지훈련지로 애용하는 곳이다. 1월 15일에 캠프를 떠나 2월 중순 메이저리그 각 구단들이 입성하기 전까지 약 20만 달러 정도의 사용료를 내고 1차 캠프를 치른다. 반면 니혼햄은 2월 1일(이하 한국시간)부터 15일까지 돈을 안 내고 메이저리그의 훈련 시설을 사용할 수 있다. 다 오타니 덕분이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은 니혼햄이 출국하기 전부터 이미 구단에 애리조나 연습경기 일정을 문의하면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들이 궁금해 하는 메인 타깃은 무조건 오타니다. 피츠버그 강정호와 미네소타 박병호가 한국에서 뛰면서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리던 시절, 전 소속팀 넥센의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자주 모습을 나타낸 것과 비슷한 이유다. 스프링캠프에서는 훈련 태도나 동료들과의 관계를 비롯해 선수에 대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관찰할 수 있다. 니혼햄이 애리조나에 나타나면서 인근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레이더가 오타니에게 쏠린 것은 당연한 이치다. 게다가 오타니는 이미 전 세계 야구계에서 유명한 존재다. 193cm의 큰 키로 시속 160km를 넘는 광속구를 내리 꽂는 ‘괴물’ 투수다. 투수와 야수를 겸업하면서도 지난해 22경기에 등판해 15승 5패, 방어율 2.24를 기록했다. 애초에 고교 졸업 직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려 했지만, 니혼햄 구단이 열과 성을 다해 오타니를 설득해 가까스로 일본에 잡아뒀을 정도다. 이제 오타니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시간문제로 여겨진다. 일본 프로야구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아홉 시즌을 뛰어야 FA 자격을 얻을 수 있지만, 포스팅 시스템을 통한 메이저리그 진출에는 한국(7년)과 달리 기간 제한이 없다. 당장 내년에라도 오타니와 니혼햄이 마음만 먹으면 메이저리그에 갈 수 있다는 얘기다. 벌써부터 메이저리그가 오타니를 데려오기 위해 포스팅 입찰액 상한선(2000만 달러)을 없앨 것이라는 얘기까지 들린다. 일본에서는 “이번 니혼햄 캠프에는 스카우트들뿐만 아니라 구단 고위 관계자들도 오타니를 보러 올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보고 있다. 정규시즌 때는 물론 국제대회와 스프링캠프에서도 연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오타니. 애리조나에서는 또 어떤 화제를 몰고 올까. 니혼햄은 한국 구단인 NC와도 애리조나에서 한 차례 연습경기가 예정돼 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