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피아 방지법’이 제정되며 주요 금융협회들의 수장 자리는 대부분 민간 출신 인사가 차지했지만 최근 전국은행연합회가 전무직에 김형돈 전 조세심판원장을 내정하며 다시 관피아 논란이 일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전국은행연합회는 시중은행 등이 회원사로 있는 국내 최대 금융협회다. 그만큼 은행연합회가 가진 대외적 위상도 상당하다. 때문에 은행연합회장은 금융당국 출신 인사가 가장 선망하는 자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난 2014년 12월 하영구 전 한국씨티금융지주 회장이 선출되면서 관피아 관행이 깨졌다. 은행연합회는 하 회장 취임 직후 부기관장인 부회장직이 폐지되고 대신 전무직이 신설됐다. 이는 다른 주요 금융협회들도 마찬가지다. 금융위원회에서 금융협회장 및 부회장직에 만연한 관피아 관행을 막고자 규정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은행연합회를 비롯한 생명보험협회, 손해보험협회, 금융투자협회, 여신금융협회, 저축은행중앙회, 6대 금융협회에 부회장직 폐지를 권고했다. 이들 부회장직은 그동안 주로 금융감독원 출신이 맡아 왔다. 부회장직을 대체하기 위해 전무직을 신설하고 협회 내부 인사를 선임할 것도 함께 권고했다. 금융위 권고에 따라 몇몇 금융협회들은 기존 부회장 임기가 끝나는 대로 부회장직을 폐지했다. 하지만 전무직 운용은 협회 내부사정에 따라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협회들 중 맏형격인 은행연합회가 전무직에 내부 승진이 아닌 또 다시 낙하산 인사를 받게 생긴 셈이다. 다른 협회들로서는 큰형님의 행보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금융권에는 이미 지난 19일 김형돈 전 조세심판원장의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취업심사 통과 소식이 들려왔다. 김 전 원장은 빠르면 2월 초 은행연합회 전무로 선출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지난 26일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김형돈 전 원장이 전무로 올지 안 올지는 모르는 일로 아직 내부적으로 결정된 것은 전혀 없다”고 선을 그으며 “임원 선출은 모든 회원사가 모인 총회에서 결정할 일이지, 외부의 압력을 받을 사안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손해보험협회 역시 지난해에 부회장직을 폐지했으나 아직 전무직을 신설하지는 않았다. 이번 은행연합회 전무 내정설로 인해 손보협회도 관피아 인사를 맞이할 전무 직제 도입을 추진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손보협회 관계자는 “전무 직제 도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지만 논의는 계속 하고 있다”고 여지를 남기며 “어느 기관이나 부기관장에 대한 필요성은 있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손보협회는 2014년 9월 LIG손해보험 고문 출신 장남식 회장이 취임해 협회를 이끌고 있다.
역시 전무 직제 도입설이 흘러나오는 생명보험협회는 2014년 12월 삼성생명 대표이사 출신 이수창 회장이 취임한 곳이다. 생보협회도 이 회장 취임 후 협회 정관 변경을 통해 부회장직을 폐지했다. 그런데 올 초 다시 정관을 변경한 것으로 드러났다. 생보협회 관계자는 “올 초에 정관 변경을 통해 ‘수석 본부장’ 직제를 신설했다. 수석 본부장이 사실상 부기관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며 “정관을 바꾼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전무직을 신설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생보협회 첫 수석 본부장은 내부 출신인 김기성 기획관리본부장이 맡고 있다. 명칭이 전무는 아니지만 금융위의 권고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옛 증권협회 등이 통합해 2009년 출범한 금융투자협회는 두 명의 전무를 두고 있다. 김철배 전무는 내부 인사다. 반면 한창수 전무는 청와대 선임행정관을 지낸 관료 출신이다. 금투협 관계자는 “(2009년 통합 출범 이후) 우리는 이제껏 관선 회장은 없었다”며 “한창수 전무는 대외서비스부문을 총괄하고 있다. 대관 업무 등에서 탁월한 역량을 갖추신 분이기에 영입한 것”이라고 관피아 논란을 차단했다.
지난해 2월 3일 예금보험공사에서 열린 ‘대한민국 금융의 길을 묻다’ 2015 범금융 대토론회에서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이 개회사를 하는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이기연 부회장의 임기는 내년 4월까지다. 임기 종료 전에 전무 직제 도입설이 나올 여지는 없는 셈이다. 앞서의 관계자는 “민간 출신 회장에 대해서 회원사들의 의견도 갈린다. 업계 출신 회장을 원하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며 “민선이든 관선이든 장단점이 있기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저축은행중앙회는 가장 최근 회장이 바뀌었다.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지낸 이순우 회장이 지난해 말부터 중앙회를 이끌고 있다. 금감원 실장 출신인 정이영 부회장의 임기는 2017년 4월까지로 여유가 있다. 당분간 전무 직제 도입 논란을 비켜갈 수 있는 상황이다. 또한 중앙회 부회장직은 실제로는 전무이사다. 대외적으로만 부회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다시 관심의 초점은 은행연합회에 쏠리고 있다. 김형돈 전 원장이 전무로 취임한다면 관피아 논란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게다가 당장 전무 자리가 비어있는 생보협회와 손보협회에서는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장기적으로는 저축은행중앙회 등 다른 금융협회 2인자 자리까지 관피아 러시의 신호탄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한 금융권 인사는 “금융은 단순히 이익만 추구할 수 없는 영역이다. 때문에 협회 역시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면서도 공적 기능 수행을 신경 써야하는 고충이 있다”며 “금융당국이 관리·감독에 관한 모든 일을 수행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협회에 관리·감독 권한을 상당부분 위임해 놨다. 그런 내부 사정도 금융협회에 금융당국 인사가 임원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라고 분석했다.
정재훈 기자 julia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