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 리스트’ 의혹에 연루된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지난달 29일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고성준 인턴기자
검찰과 이 전 총리 측은 공판 과정에서 제출된 자료들의 증거능력을 놓고 치열하게 다퉜지만, 1심 재판부는 “각종 진술과 증거 등을 종합할 때 피고인이 돈을 전달 받았다고 보는 것이 경험칙과 상식에 부합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법원 내에선 “상당히 합리성에 근거한 판단으로 보이는 데다, 돈을 줬다는 큰 줄기가 맞다면 비타500에 넣어서 줬는지, 쇼핑백에 넣어서 줬는지 등 부수적인 사실관계에 다소 논란이 있다 하더라도 항소심에서 뒤집어질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당장 같은 혐의로 기소된 홍준표 경남도지사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특히 홍 지사의 경우 금품 전달자까지 있어 무죄 입증이 한층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홍 지사 못지않게 떨어야 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올랐지만 기소되지 않은 친박 핵심 6인이다. 1심 판결은 검찰 수사가 부실했거나 수사팀의 능력이 모자랐거나, 수사 의지가 없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만큼 이들에 대한 재수사 요구는 앞으로 더욱 강해질 전망이다.
# 더민주, 친박 핵심 6인 고발
더불어민주당 소속 법률가 7명은 성완종 리스트에는 이름이 있었지만, 무혐의 내지 공소권 없음 처분을 받은 친박 핵심 인사 6인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성완종 전 회장이 자살 당시 입고 있었던 상의 안주머니에서 나온 게 지난해 세상을 뒤흔든 ‘성완종 리스트’다. 이 리스트에는 김기춘·허태열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 유정복 인천시장,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 홍준표 경남도지사, 부산시장(서병수 시장으로 추정), 이완구 국무총리 등 8명의 이름이 적시돼 있었다.
금액도 허태열 7억, 홍문종 2억, 유정복 3억, 부산시장 2억, 김기춘 10만불 2006. 9.26 독일 벨기에라고 적혀 있었고, 이 전 총리와 이병기 실장은 이름만 있을 뿐 금액은 없었다. 인터뷰 내용과 리스트가 일치하는 이는 김기춘·허태열 전 실장과 홍 지사, 홍문종 의원 등이었다. 리스트에선 금액이 없었던 이 전 총리는 성 전 회장이 인터뷰를 통해 3000만 원을 전달했다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사건 초기에는 김기춘·허태열 전 실장에게 수사의 초점이 맞춰지는 듯했다. 하지만 실제 수사는 이 전 총리와 홍 지사에 집중됐는데, 이를 두고 박근혜 정부가 원했을 수도 있고 상황론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선 이 전 총리의 경우 계속된 거짓말로 스스로 낙마하자 청와대와 여권 내에선 그에 대해 ‘버린 카드’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특히 이 전 총리가 국회에서 “성 전 회장과 일면식도 없다”고 했다가 자신의 출판기념회에 성 전 회장이 찾아간 사진까지 언론에 보도된 후 청와대와 여권에선 감당하기 어려운 정치적 부담을 떠안았다는 하소연이 흘러나왔다. 반면 친이계였던 홍 지사는 이미 당내 권력투쟁에서 친박계에 밀린 상태였던 만큼 당의 지원을 기대하기란 더욱 쉽지 않았다.
그 결과 두 사람은 기소되고, 김 전 실장 등 친박 핵심 인사 6인은 서면조사만 받았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평가다. 심지어 김 전 실장의 경우 검찰 수사 기간에 부인과 함께 일본에 다녀와 주요 사건 관계인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조차 하지 않았다는 비난이 검찰에 쏟아졌다. 서면조사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것을 의식한 검찰이 대선자금 의혹이 불거진 홍문종 의원을 피고발인 신분으로 불렀지만 기소하지는 않았다. 형식적인 소환조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검찰 간부 출신 한 인사는 “당시 홍문종 의원의 경우 8억 원의 재산이 갑자기 늘어나는 등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발견됐지만 검찰은 계좌추적을 한다든지 회계장부를 다시 본다든지 해서 재산 증식 과정 등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다”며 “그런 측면에서는 재수사 촉구가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 ‘금고지기’ 어떤 역할했나
그렇다면 친박 핵심 인사 6인에 대해 재수사한다면 과연 성과는 있을까.
이 대목에서 핵심은 성완종 전 회장의 금고지기였던 한 아무개 전 부사장과 재무담당자들이다. 이들이 입을 열 경우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한 전 부사장의 경우 회사자금 횡령 책임 문제를 놓고 성 전 회장과 갈등 관계가 형성되면서 경남기업에 대한 검찰 수사 초기 분식회계 자료 등을 통째로 검찰에 넘긴 것으로 전해진다.
또 성 전 회장이 어떻게 비자금을 조성해서 정치권 등에 뇌물을 전달했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당사자란 얘기도 있다. 이런 사정은 이완구 전 총리에 대한 1심 판결문에서도 자세히 언급돼 있다.
1심은 “한 전 부사장은 경남기업 재무담당 이사로 평소 성완종의 지시를 받아 비자금을 조성해 성완종에게 직접 전달해왔다”며 “구체적으로는 계열사의 자금팀 김 아무개 차장에게 지시하여 현장전도금을 지출하는 것처럼 허위전표를 작성해 회사 계좌에서 비자금 계좌로 필요한 자금을 송금하고 현금으로 인출하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특히 “한 전 부사장은 김 차장으로 하여금 비자금을 포장해 오도록 지시하는데, 포장방법은 일차적으로 성완종의 지시에 따르지만, 통상 3000만 원 이하의 금액은 편지봉투나 대봉투에, 3000만 원 이상의 금액은 대봉투나 종이박스에 담는다고 진술한다”며 “김 차장도 선물로 보이도록 항상 포장을 한다면서 포장방법에 대해 같은 취지로 진술한다”고 되어 있다.
비자금 조성과 성 전 회장에게 그 비자금을 넘기는 방식, 그리고 빈 곳간을 다시 채워넣는 것까지 모든 과정에 한 전 부사장이 개입했던 것이다. 검찰 간부 출신 다른 인사는 “성완종 리스트 수사 당시 검찰이 한 전 부사장 자택에 대해선 압수수색을 하지 않는 등 철저하게 관리하면서 뭔가 주고받고 있다는 얘기가 있었다”며 “오랜 세월 동안 성 전 회장 옆에서 회사자금을 관리했던 사람인 만큼 조성된 비자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도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한 전 부사장 등의 입을 열게 하는 게 재수사 성공의 최대 관건이란 얘기다. 하지만 그가 양심선언을 하지 않는 이상 수사는 다시 쳇바퀴를 돌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재경지역에 근무하는 한 판사는 “이번 판결로 성 전 회장이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8인에게 돈을 줬을 것이라는 항간의 얘기가 사실로 확인된 측면이 있다”며 “하지만 그 사실이 법정에서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신빙성 있는 진술 등 뒷받침해주는 연결고리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