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28일 밤 이주은 글로비스 사장이 비자금조성 혐의로 구속수감됐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날 급히 연락받고 출근한 현대차 직원들은 밤 11시까지 진행된 검찰 수색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관련 직원들은 다음날 새벽 5시가 돼서야 ‘옷 갈아입으러’ 잠시 집에 다녀와 다시 업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현대차의 한 직원은 “자다가 당한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무방비 상태에서 당했다는 것이다.
이번 ‘김재록 게이트’ 파문은 어느덧 정몽구-정의선 총수 일가를 향하고 있다. 검찰의 주요 수색 대상이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최대주주인 계열사 글로비스이며 이 회사는 정몽구-정의선 부자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디딤돌로 여겨져 온 곳이다. 글로비스의 불법 비자금 조성 규모가 점점 드러날수록 정몽구-정의선 부자에 대한 소환 가능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현대차그룹이 공포의 도가니로 빠진 배경엔 과연 어떤 정황이 깔려있는 것일까.
현대차에 대한 검찰의 급습 사실이 알려지면서 재계와 정치권엔 ‘코드 수사’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현대차가 청와대로부터 ‘찍혔다’는 시각이다. 정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을 강조해왔지만 현대차가 하청업체에 납품가 인하를 무리하게 요구한 점, 미국 앨라배마 현지 공장 등 공격적인 해외 투자에 비해 국내 고용창출 노력이 약했던 점, 환율급락과 고유가 상황을 통해 위기의식을 조장한 점 등 때문에 ‘미운털’이 박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시각에 대한 언론의 집중 보도에 대해 청와대는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청와대도 당일에서야 검찰의 현대차 수색 보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지난 3월 30일 양정철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대통령과 검찰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인지 정면으로 묻고 싶다”면서 “대통령도 검찰도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부가 중소기업 활성화에 대해 골몰하고 경기회복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내놓는 상황에서 현대차가 보인 행보가 정부의 노여움을 샀을 가능성은 계속 거론돼 왔다. 글로비스가 삼성의 에버랜드와 마찬가지로 경영권 승계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의 입김이 이번 수사에 작용했을 것이란 관측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한편 이번 현대차 수사가 내부 제보에 의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현대차 내부의 인사가 정몽구-정의선 부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일각에선 지난해 10월 김종빈 전 검찰총장의 사퇴 무렵부터 김재록 게이트에 대한 수사 착수가 이뤄질 것으로 관측됐다. 그러나 정황근거 부족으로 시기를 조율하던 터에 현대차 관계자의 결정적 제보에 의해 이번 수사가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현대·기아자동차 본사(오른쪽)와 증축 중인 연구개발센터. | ||
그렇다면 제보자는 누구일까. 검찰 안팎과 재계에선 전직 임원 A 씨가 거론되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A 씨를 내보내려 할 때 A 씨와 친분이 두터운 여권 유력인사가 방패막이 노릇을 해줬다는 소문도 나돈 바 있다. 결국 ‘스타일을 구기며’ 현대차를 떠난 A 씨에 대해 다수 재계인사들이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현직 임원이 ‘제보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 업계 인사는 “검찰이 현대차 내부의 비밀금고 위치 등 수색 대상에 대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파악했을 정도로 현재 내부 상황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 배후에 있을 것”이란 가능성을 내놓는다. 이 인사는 “김재록 게이트 파문이 몇 달 전부터 예견돼 왔다. 김재록씨와 관련된 비자금 업무에 개입한 인사가 ‘보험용’으로 수사당국에 협조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현대차가 무방비 상태에서 검찰의 수색을 당한 것에 대해 현대차 법무실에 대한 책임론도 불거지고 있다. 현대차 법무실은 지난해 6월 영입된 검사장 출신의 김재기 총괄 상임 법률고문(사장급) 겸 법무실장이 이끌고 있다. 변호사 3명과 국제변호사 5명 그리고 지원인력을 포함해 30명이 소속돼 있는데 규모 면에서 삼성 법무실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법무실 고위 임원이 검찰의 양재동 사옥 수색 당일에도 다른 개인일정을 보다가 뒤늦게 연락을 받았을 만큼 이번 검찰수사에 대한 사전대비에 미흡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 법조계 인사는 “현대차 법무실이 김재록 게이트에 대해 지속적으로 안테나를 켜고 있었다면 검찰이 단시간에 이토록 효율적인 수색을 펼칠 수 있었을까”라며 현대의 방심에 대해 혀를 차기도 했다. 이는 대검 중수부를 둘러싸고 있던 묘한 기류를 두고 하는 말이다.
현 정권 출범 이후 검찰과 여권 사이 불협화음이 커졌고 한때 ‘대검 중수부 폐지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후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의 강경발언이 나오고 강금실 전 장관이 중수부 폐지론을 더 이상 거론치 않기로 하면서 일단락됐지만 이때부터 대검 중수부 안팎에 어느 정도 위기감이 감돌았다고 전해진다.
정치인 비리나 대규모 비자금 사건 등을 전담하는 대검 중수부는 이후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지난해말 현대차 비자금 관련 정황을 포착했지만 결정적 단서 부족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현대차측 제보자에 의해 이번 사건을 전격적으로 다루게 된 것으로 알려진다. 검찰은 수사초기 ‘김재록 게이트를 본류, 현대차 비자금 사건을 지류’로 표현했지만 지난해 말부터 현대차에 대한 내사가 이뤄진 점을 볼 때 ‘현대차 비자금 수사를 하다가 김재록 씨 사건을 발견했다’는 추정도 가능한 상황이다.
한 법조계 인사는 “대기업으로부터 거액 불법자금을 받은 정치인들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야말로 중수부의 존재감을 알리는 일”이라 밝힌다. 이번 김재록 게이트 수사과정에서 여권 핵심인사 등 여러 유력 정치인들이 거론되고 있다. 대검 중수부가 모처럼 ‘한건’하는데 현대차 수사가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주은 글로비스 사장의 구속영장에는 ‘2001년 12월부터 최근까지 397 차례에 걸쳐 총 7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나와 있다. 이 시기 중 2003~2004년은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이른바 ‘차떼기’ 수법 등을 밝혀내면서 국민적 지지 속에 진행된 대선자금 수사 기간 동안에도 불법 비자금이 조성됐다는 사실은 현대차에 대한 검찰의 ‘가중처벌’ 의지를 불태웠을 것이란 지적도 따른다.
검찰의 현대차 수사에 대해 “이제 나올 건 다 나왔다”며 조기 종결에 대한 관측이 나오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 장기화될 가능성도 있다. 타깃이 된 현대차 내부에선 “당분간 죽었다”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