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 ||
정 전 비서관은 최근 언론매체를 통해 정부와 삼성 간 유착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386 참모진의 무능과 로비창구 의혹을 제기했다. 청와대 측은 “사견인 만큼 일일이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며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고 정 전 비서관에게 사과도 받았지만 내심 당혹스럽다는 분위기다.
특히 정 전 비서관이 노무현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부터 경제자문 역할을 했고 참여정부 출범 후에도 청와대 요직을 두루 거친 노 대통령의 측근이란 사실에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자칫 청와대 참모진 간의 권력 암투로 비춰질 소지가 다분하고 이는 궁극적으로 레임덕으로 비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참모진의 갈등 문제가 불거진 것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얘기는 아니다. 친노 직계 그룹은 시니어 그룹(이기명 염동연 이강철 정찬용 등), PK사단(문재인 이호철 정윤재 등), 386 참모그룹(이광재 안희정 서갑원 윤태영 등) 등으로 분류된다. 이들 세 그룹이 집권 초부터 권력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물밑에서 파워게임 양상을 보여 왔다는 게 정가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2003년 10월 여권의 청와대 인적쇄신 압박에 밀려 386 그룹의 리더 격인 이광재 의원이 국정상황실장에서 물러났고 PK사단을 대표하는 문재인 민정수석도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출마 압력에 시달리다 2월 전격 사퇴했다. 또 시니어 그룹이자 호남인맥을 대변했던 정찬용 전 인사수석도 지난해 5월 행담도 사건으로 퇴진했다.
이후 이광재 의원은 17대 총선에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고 문 수석은 3개월 정도 휴식기간을 가진 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 복귀해 현재는 다시 민정수석을 맡고 있다. 시니어 그룹이 상대적으로 입지가 약화된 반면 PK사단과 386그룹은 여전히 막강 파워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시니어그룹의 일원이었던 정 전 비서관이 최근 언론을 통해 정부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동시에 386 그룹의 무능을 질타한 배경에는 다른 친노 직계 그룹에 대한 앙금도 어느 정도 내포돼 있을 것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행담도 사건이 터지면서 시니어그룹을 대표했던 정찬용 전 인사수석과 정태인 전 비서관이 낙마했고 문정인 동북아시대위원장도 구설수에 올랐다. 당시 야권은 행담도 사건을 대형 권력형 비리로 몰고 가며 청와대와 여권을 압박했다. 정 전 수석과 정 비서관은 결백을 주장했지만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PK사단과 386 그룹은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부담을 우려해 두 사람의 경질을 대통령에게 건의했고 여론과 이들 참모진의 압박에 못이겨 두 사람은 결국 사퇴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내 시니어그룹으로서는 억울한 입장을 대변해 주지는 못할망정 은근히 등을 떠민 두 세력이 얄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검찰도 청와대 외압 의혹은 없었던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정 전 비서관과 문 위원장은 각각 직권남용, 허위공문서 작성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지만 지난 2월 1심 법원은 이 두 사람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정 전 수석은 검찰 수사 결과 무혐의로 결론났다.
검찰 수사가 행담도 사건과 관련한 각종 의혹을 완전히 해소해 주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시니어 그룹만 희생양이 된 꼴이 됐다. 일각에서는 정 전 비서관이 386 그룹의 무능을 지적하며 강도 높게 비판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내재된 앙금이 폭발한 게 아니냐는 시각을 내비치고 있다.
정 전 비서관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청와대 386 인사들은 열의와 순수성은 있지만 업무 능력 면에서 전문성이 떨어지고 국회 아니면 갈 데 없는 친구들”이라며 “386 세대들이 운동을 했고 정의감은 있지만 아는 것은 많지 않고 전문성도 없다”고 독설을 날렸다.
그는 또 “삼성과 재경부의 로비 압력은 대부분 386들을 통해 올라온다”며 “이 친구들은 자기 논리가 없기 때문에 쉽게 재경부나 삼성의 논리에 설득된다”고 비판했다.
정 전 비서관은 나아가 “한미 FTA 협상 추진은 임기 내에 뭔가 업적을 남겨보려는 노무현 대통령의 조급증 때문에 시작된 전형적인 한건주의”라며 노 대통령과 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직격탄을 날렸다.
대통령의 측근인 그가 ‘고언’의 수준을 넘어서는 혹독한 비판을 퍼부은 배경을 놓고도 여권 내부에선 뒷말이 적지 않다. 이 발언을 “아는 것이 많지 않고 전문성이 없는 386”이라는 정 전 비서관의 언급과 연결시켜 보면 결국 전문가들인 시니어그룹 대신 386그룹을 가까이한 노 대통령의 ‘잘못된 선택’을 탓하는 얘기가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정 전 비서관은 자신의 독설 파문이 확산될 조짐이 일자 최근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며 대통령에게 사과를 했다.
그는 7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내 발언이 잘못 전달된 부문이 많다”며 “앞으로 일체의 언론 인터뷰를 사양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행담도 사건에 대한 불만이 내재된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도 “확대 해석하지 말라”며 전화를 끊었다.
정 전 비서관의 사과와 “더 이상 비판하지 않겠다”는 입장 표명으로 이 문제가 확전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하지만 친노세력이자 현 정부 비서관 출신이 쏟아낸 독설과 비판이라는 점에서 정부와 청와대는 이미 적잖은 도덕적 상처를 입었고 집권 후반기 주도권을 쥐기 위한 청와대 내부의 갈등도 더욱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이번 독설 파문은 대통령 측근 간에 내부적으로 잠재된 앙금이 처음 수면위로 부상했다는 점에서 5·31 지방선거 결과와 맞물려 레임덕을 앞당기는 또 하나의 기폭제가 되지는 않을지 주목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