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일 광주를 방문한 정동영 의장이 광주시민들과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열린 우리당은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뒤처진 정당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연합뉴스 | ||
‘호남’이라는 주력군이 빠져나간 열린우리당은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무기력한 모습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과의 정당 지지도 격차는 15~20%포인트에서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또 전북과 대전을 제외하면 수도권을 비롯한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절대적 열세에 몰려 있다.
지방선거 참패의 위기에서 열린우리당이 빼든 카드는 결국 ‘집토끼 사수작전’으로 불리는 호남표 재결집.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지난 1월 3일 신년 인사차 자택을 찾은 김근태 의원에게 “열린우리당은 앞으로 ‘잃어버린 식구’를 찾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며 던진 충고를 이제야 행동으로 옮기는 셈이다.
선거일을 보름여 앞두고 열린우리당이 호남에 보이는 애정 표시는 거의 노골적이다. 정동영 의장은 지난 9일 강원도 방문 계획을 취소하고 광주로 발길을 돌려 1박2일 동안 머물며 각계의 지역 유지들을 잇따라 만났다. 정 의장은 여기서 “광주에서의 승리는 5·31 지방선거의 승리이고 광주를 놓치는 것은 5·31의 패배를 의미한다”며 호남의 지지를 호소했다.
열린우리당이 18일 공식적인 선거운동을 광주 망월동 참배에서 시작하는 것도 호남 민심을 잡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란 해석이다. 열린우리당은 이날 소속 국회의원 및 단체장을 전원 광주에 집결시켜 5·18 민주화 항쟁을 추념하며 지방선거 필승 의지를 다진다. 광주에서 민주당을 제압하고 기세를 몰아 수도권으로 바람을 확산시킨다는 것이 열린우리당의 전략이다.
한 정치 분석가는 “광주 유권자들이 ‘전략적 선택’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이런 조짐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막판에 호남 민심을 크게 흔들 수 있는 사건이 터질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지난 대선과 총선을 놓고 보면 호남지역은 열린우리당의 ‘텃밭’이나 다름없었다. 2002년 대선 때 광주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 지지율은 94.7%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3.6%)와의 비교를 불허했다. 2004년 총선에서도 광주는 탄핵에 동참한 민주당(36.4%)을 버리고 전략적으로 열린우리당(54.0%)을 선택했다.
그러나 2년여가 흐른 지금 사정은 달라졌다. <중앙일보>가 지난 11일 발표한 광주 지역 정당 지지도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각각 27%로 같았다. 지난 2일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민주당(30.8%)과 열린우리당(30.6%)은 거의 비슷했다. 특히 광주시장 선거 가상대결에서 민주당 박광태 후보는 열린우리당 후보를 20%포인트 차이로 압도하고 있다.
▲ <자료=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 단위=%>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수도권에 사는 호남 출신 유권자의 지역감정도 사실상 ‘무장 해제’된 상태다.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서울과 경기에서 호남 원적자들의 열린우리당 후보 지지율은 33~34% 수준이고 한나라당 후보 지지율은 서울 39%, 경기 26% 정도였다. 출생지역의 지역감정이 거의 희석됐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열린우리당의 지지 세력 이탈이 그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고 호남이라는 지역기반의 붕괴는 지난해 4월 이후에 진행된 것으로 추정한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김헌태 소장의 분석은 이렇다.
“열린우리당 지지층의 이탈은 사실 2004년 총선 중에 시작됐다. 20·30대 중심의 개혁지향층이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지지로 돌아섰다. 또 총선 직후에는 ‘안정 속의 개혁’을 주장하던 중도개혁층도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된다. 양 끝단의 붕괴로 요약되는 ‘1차 이탈’을 통해 열린우리당 지지도는 30%를 밑도는 수준으로 하락했다. ‘2차 이탈’은 2005년 4·30 재·보선 패배와 함께 시작돼 7월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의와 안기부 도청 수사를 거치면서 진행됐다. 특히 ‘국민의 정부’ 시절의 도청에 대한 수사는 호남 기반이 붕괴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정가에서는 도청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이 지난 4월 중순 보석으로 석방된 점, 정부가 DJ의 방북을 적극 지원하고 나선 점, 여권 인사들의 ‘동교동’ 노크가 잦아진 것 등을 여권의 ‘호남 민심 회복책’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집토끼 사수’를 위해 이처럼 호남표 결집에 나섰지만 효과는 여전히 미지수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지난 11일 발표한 정기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나라당(35.4%)과 열린우리당(20.6%)의 지지도 격차는 여전히 14.8%포인트에 이른다. 선거일은 점점 다가오지만 지지도 격차는 보름 전과 비교해서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정치컨설팅 ‘민기획’의 박성민 대표는 “지방선거는 기본적으로 현 정부에 대한 평가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지지율을 갑자기 끌어올리는 데 한계가 있다”며 “대선과는 달리 지방선거에서는 후보 지지율이 정당 지지율에 종속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호남 표심이 흩어진다면 내년 대선에서는 다시 뭉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이 질문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김헌태 소장은 “현재의 열린우리당 이탈층은 대부분 유동성이 높은 부동층의 특성을 보인다”며 “대선을 앞두고 이들 이탈층이 본격적으로 결집하거나 재편성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전망했다. 박성민 대표 또한 “호남 표심은 과거에도 지방선거에서 흩어졌다가 대선에서는 강한 응집력을 보인 바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오늘 지방선거의 패배가 내일 열린우리당에게 ‘약’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정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