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사실상 전략공천을 밀어붙이면서 총선에 뛰어든 많은 수의 진박이 살아남았다. 공천을 받은 ‘진박’ 후보들. 왼쪽부터 정종섭 전 행자부 장관, 권혁세 전 금감원장, 안대희 전 대법관. 일요신문DB
대다수 진박은 총선 직전 지역구에 투입돼 여론조사 지지율이 높지 않았다. 따라서 진박은 상향식 공천을 가장 두려워했다. 지지율로만 따지면 지는 경우가 속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상향식 공천은 이한구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이 등장으로 많은 부분 달라졌다. 이 위원장의 강력한 드라이브 아래 컷오프, 사실상의 전략공천의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역 여론조사 1등이 후보로 공천되지 않고, 2등이나 하위권에게 공천이 확정된 경우도 있었다. 이에 대해 지난 17일 김무성 대표도 “어떤 지역은 모든 여론조사에서 1등을 한 사람 대신 2등을 한 사람에게 단수 추천이 돌아갔는데, 이것도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이고, 또 어떤 지역은 그 지역에서 2등도 아닌 하위를 한 사람이 단수로 추천됐다”고 지적했다. 총선에 뛰어든 진박들 중 많은 수가 이 위원장의 드라이브 덕분에 살아난 것으로 알려졌다.
진박을 자처한 후보 중 누가 살아남았을까. ‘총선필승’이라는 건배사로 논란이 됐던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의 대구 동구갑 공천이 확정됐다. 청와대 참모 출신인 추경호 전 국무조정실장도 ‘대통령의 고향’ 대구 달성에 공천됐다. 이들은 총선 직전까지 행정부에 몸담아 TK(대구·경북) 내에서는 진박 중 진박을 일컫는 ‘진진박’으로 불리기도 했다.
TK 지역에 출마한 한 후보는 “진박이나 진진박이라는 말은 TK 지역 사람의 자존심을 깔아 뭉개는 단어다. 누가 더 친한지 대결해 더 친한 사람이 당선되는 게 아니라 준비된 정책, 능력의 후보가 당선되도록 제대로 맞붙었으면 좋겠다”고 비판했다.
수도권에서도 진박의 약진은 이어졌다. 친박 핵심인 최경환 의원이 후보 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하면 정치권에서는 ‘진박 인증’을 받았다고 평한다. 이 진박 인증을 받은 권혁세 전 금감원장도 분당갑에서 공천을 받았다. 현역인 이종훈 의원을 제치고 따낸 성과였다.
전하진 새누리당 의원. 사진제공=전하진 의원실
송파을에 단수 공천된 유영하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도 박 대통령 캠프에서 활동한 바 있다. 사실 유 전 위원의 공천은 여의도 주변에서 적잖은 화제를 모았다. 지난 3일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원 조사자료라며 SNS를 타고 급속히 퍼진 자료가 있었다. 이 자료 속에 유 전 위원도 등장하는데 특이한 점은 수많은 이름 중 유일하게 실명이 아닌 ‘A’라고 쓰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자료에 따르면 유 전 위원은 지역구 여론조사에서 김영순, 김종웅, 박상헌 예비후보에 밀려 4위를 기록했다고 알려졌다. 검찰 출신인 유 전 위원은 2004년 박근혜 한나라당 당대표 시절부터 박 대통령을 보좌해왔다고 한다.
새누리당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당시 여의도연구원 자료라며 유출된 자료에 대해 보안 유지 실패 등의 책임을 묻는 경우는 많았지만 지지율 자체가 이상하다고 한 후보는 거의 없었다. 당시 여론조사 결과를 정확하다고 봐야 하는 이유다”라며 “유 후보는 당시 자료에서 5% 지지율도 나오지 않았는데 공천을 받은 이유는 따로 있다는 이야기가 나돈다”고 귀띔했다.
송파을은 전통적인 새누리당 텃밭인 데다 현역인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불출마 선언을 해 주인조차 없었기 때문에 관심이 집중됐다. 유영하 후보는 경기도 군포에 지난 2004년부터 내리 세 번 출마했으나 낙선을 거듭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텃밭에 배치돼 불운을 끊을 수 있을 전망이다.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일조했던 안대희 전 대법관도 강승규 전 의원을 제치고 마포갑에 공천됐다.
진박 약진의 후폭풍도 만만치 않다. 진박이 공천확정된 지역에서 경선서 떨어진 후보들이 무소속 출마를 강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혁세 전 금감원장 지역에서는 현역인 이종훈 의원이 무소속 출마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하진 의원 지역구인 분당을에서는 이 지역에서 3선을 한 임태희 전 대통령 실장이 무소속 출마를 발표했다. 임 전 실장은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은 제대로 알고 말하라”고 이 위원장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 위원장이 분당을 지역 공천을 설명하면서 분당갑에 속하는 판교를 예로 들었기 때문이다.
마포갑에서는 강승규 전 의원이 무소속 출마를 발표했다. 지난 17일 강 전 의원은 YTN 라디오에 출연해 “지금 수차례 여론조사를 해서 공표를 했는데, 그 공표에서 한 번도 제가 진 적이 없고 이겼다. 그것도 많이 차이 날 때엔 10%포인트 이상 차이로 이겼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친박·진박 마케팅이 성공할 수 있는, 콘텐츠 있는 후보도 있었지만 함량미달인 후보도 너도나도 진박을 외치는 통에 하향평준화돼 진박이 오히려 감점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진박 후보들이 공천을 받은 곳 중에서 현역이나 당협위원장이 무소속 출마하는 경우에는 충분히 선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진박 후보들이 경선에선 이겨도 본선에선 지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으며 특히 컷오프(공천탈락)된 유승민계 현역의원들이 선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꼬집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