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안 된 협상은 심각한 후과를 낳는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노 대통령과 김 의장의 인식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두 사람은 이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부터 생각이 달랐다. 노 대통령이 ‘개방론’으로 강한 의지를 불태운 반면 김 의장은 ‘신중론’으로 수차례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그동안 직접 격돌은 피해왔다. 김 의장의 생각은 열린우리당의 공식 입장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의견으로 치부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김 의장이 열린우리당을 대표하는 간판이 된 것이다. 특히 FTA 체결은 국회의 비준 동의가 필요한 사항이어서 노 대통령도 김 의장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열린우리당도 내달 10일 서울에서 시작되는 2차 협상을 앞두고 본격적인 개입에 나설 태세다. 당 안팎에서는 김 의장이 노 대통령과 계급장 떼고 ‘맞장’을 뜰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한·미 FTA 체결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의지는 ‘쇄국 망국론’으로 요약된다. “개방하고 교류했던 나라 중에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지만 개방도 교류도 하지 않는 나라 중에는 흥한 나라가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FTA의 중요성을 말할 때 노 대통령이 곧잘 인용하는 사람이 흥선대원군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대원군의 쇄국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데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를 실제 잘 몰랐다. 과단성 있는 쇄신 정치가 통쾌하게만 보였지 그것이 우리를 망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 정치를 한참 할 때까지 판단이 잘 안 섰다.”
노 대통령은 ‘FTA반대=쇄국정책’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측근들이 우려를 표시했을 때도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보이며 단호히 물리쳤다고 한다. “한·미 FTA 체결은 남은 임기 동안 제일 큰 이슈”라고 말할 정도다.
노 대통령이 특히 관심을 갖는 분야는 서비스업이다. 일각에서는 서비스 시장을 열면 국내 업체들이 고사할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노 대통령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지금까지 대형할인점은 잘 버텨내서 한 단계 성장했고 보험시장을 개방할 때도 굉장히 걱정했지만 잘 버텨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정부는 노 대통령의 이러한 의지를 받들어 협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4~9일 미국 워싱턴에서 1차 협상을 진행했고 오는 7월 10~14일에는 서울에서 2차 협상을 개최한다. 정부가 들고 있는 시나리오 속에는 올 9, 10월과 내년 2월에 추가 협상을 개최해 협상을 마무리 짓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노 대통령이 본래 시나리오대로 일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김 의장은 지난 11일 당의장 취임 이후 한·미 FTA 문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부동산 정책 수정, 대연정 제안 사과 등 노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이 잇따르는 속에서도 한·미 FTA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나 김 의장의 침묵은 ‘용인’이라기보다는 ‘시간 재기’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김 의장은 지난 1월 당에 복귀한 이후 줄곧 FTA에 대한 ‘경고등’을 켜두고 있다. “준비 안 된 FTA는 우리 경제에 심각한 후과를 동반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소신이다. 지난 4일 대한상공회의소 초청 강연에서는 “참여정부가 ‘제2의 IMF’의 대리인이 됐다는 비판은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말까지 던졌다.
한·미 FTA 협상과 관련, 김 의장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미국이 정한 협상 시한에 끌려가기 △미국이 요청한 4대 부문(자동차·소고기·영화·의약품)은 협상도 하기 전에 개방 △협상의 구체적인 내용 비공개 △국회 등의 적절한 통제 장치의 부재 등으로 요약된다.
김 의장을 정점으로 하는 재야파 모임인 ‘민평련’은 지난 4월 ‘한·미 FTA 졸속 추진’을 신랄하게 비판한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을 불러 비공개 회동을 갖기도 했다. 민평련 소속 한 의원은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는 FTA 협상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곳은 국회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평련뿐만 아니라 열린우리당 의원 대부분이 현재 정부가 진행하는 협상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문화일보>가 최근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 75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한·미 FTA 추진과 관련해 ‘아직 준비가 충분하지 않은 만큼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응답이 72.0%에 달했다. 반면 ‘정부가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해 왔으므로 현재 일정대로 추진하면 된다’는 응답은 26.7%에 불과했다. 열린우리당을 대표하는 김 의장으로서는 이러한 당내 여론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다.
열린우리당은 조만간 당내에 구성된 한·미 FTA 특위를 보강하고 국회 차원의 특위 설치도 적극 추진할 방침이다. 특위를 통해 협상팀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를 행사하겠다는 의도다. 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송영길 의원은 “한·미 FTA에 관한 열린우리당의 입장은 졸속으로 추진할 것이 아니라 충분하게 논의해서 최대한의 성과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참여연대나 민변 등 시민사회단체와 학계의 대표적인 논객들을 초청해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정부 협상팀에 전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방선거 참패 이후 위기 수습을 책임진 김 의장으로서는 여론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특히 미국 워싱턴에서 조용히 ‘넘어간’ 반대 시위단이 서울에서 진행되는 2차 협상 때는 10만여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어 FTA 문제가 정국의 핵심 이슈로 부상할 가능성도 높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한·미 FTA에 대해서는 노 대통령과 김 의장의 입장이 너무나 분명해서 당·청 간 합의점 도출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현재로서는 마주보고 달리는 열차와 다름없다”고 말했다.
이정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