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용노선이 예상됐던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개혁적인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정동영 전 의장에 대한 견제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종현 기자 ish@ilyo.co.kr | ||
GT가 당 의장에 취임한 이후 열린우리당은 ‘실용’ 방향으로 노선을 크게 선회하는 듯이 보였다. 당내에서 대표적 실용파로 꼽히는 이계안 의원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했고 “밥이 하늘”이라며 경제성장에 방점을 찍었다. 기존 정책을 재점검하고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실용주의 정책이 대거 채택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책 결정 과정에서 드러난 GT의 시선은 여전히 개혁 쪽을 향하고 있다. 우선 부동산 정책의 경우 지방선거 참패 이후 전면 재검토에 착수했지만 결론은 ‘현상 유지’에 가깝다. 1가구1주택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 경감 등 ‘보유세 완화론’이 제기되자 GT는 “보유세 완화는 정책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며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부동산 정책에 관한 한 오히려 개혁을 강화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GT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5.7평 이하 국민주택에 대해서는 분양원가 공개를 고려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 안팎에서는 후분양제와 분양가 상한제 등도 다시 거론되고 있다.
GT의 한 측근은 “분양원가 공개는 대통령과 날을 세우면서도 GT가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사안”이라며 “향후 토론을 통한 의견 수렴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실제로 추진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말했다. 최재천 의원도 당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참여정부의 부동산제도 개혁은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가 좌절되면서 좌초됐다”며 “후분양제 논의까지 공론화하자”고 주장했다.
GT와 가까운 의원들도 향후 열린우리당의 노선에 대해 실용주의 정책을 보완하기보다는 개혁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한다. 민평련 소속의 한 초선 의원은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이탈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지개 정당’이 되면서 정체성이 애매모호해졌기 때문”이라며 “개혁 정체성을 강화하면 일부 보수 세력이 이탈할 수도 있지만 결국 전통 지지층을 결집시킬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점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협상에 대한 GT의 태도는 눈여겨볼 만하다. GT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신속협상 권한을 고려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에 매여서 협상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농업과 금융, 서비스 부문에서 부담을 져야 하는 영역과 계층의 반발은 정치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시한을 정해놓고 무모하게 추진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가급적 조속히 협상을 추진하려는 청와대·정부 쪽 방침에 정면으로 반하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FTA가 체결될 경우 수혜는 대기업에 돌아가고 피해는 서민들이 안게 될 것이란 인식이 팽배해 있다”며 “FTA 논란에 대한 GT의 분명한 입장이 열린우리당이 명실공히 서민정당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GT가 열린우리당의 ‘체질 개선’을 시도하는 배경에는 정동영 전 의장(DY)과의 권력 투쟁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열린우리당이 개혁 정체성을 확립할 경우 당내에서 상대적으로 실용파에 가까운 DY가 복귀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경우 DY의 복귀 계획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정가에서는 DY가 향후 복귀를 염두에 두고 GT에게 당을 맡겼다는 분석도 없지 않았다. 실제 선거 당일 DY가 사퇴 결심을 굳힌 뒤 GT가 의장직을 승계할 수 있도록 당 중진들을 설득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원심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상황에서 두 사람이 모두 물러날 경우 당의 존립을 장담할 수 없고 복귀할 명분도 사라진다는 점에서 이 같은 분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열린우리당 내에는 지금도 DY의 복귀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시각이 상당하다. 비록 모든 당직에서 물러났지만 창당 주역이자 주요 ‘주주’로서 지금도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범DY계’로 분류되는 한 초선의원은 “DY의 당내 기반은 견고하지는 않지만 쉽게 허물어지지도 않을 것”이라며 “지금 당장 전당대회를 열어도 DY는 당 의장에 다시 당선될 수 있는 저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GT 측의 DY에 대한 사전 견제는 향후 전개될 정계개편에서의 주도권 경쟁과도 맞물려 있다. GT의 임기는 잠재적으로 내년 2월 전당대회까지로 예정돼 있다.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8개월가량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동안 정치권이 정계개편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GT도 “올 연말까지 정계개편 논의를 중단하자”고 제안했지만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따라서 GT가 열린우리당 위기를 성공적으로 수습한다고 해도 이후 당의장으로서 임무는 전당대회 준비보다는 정계개편 주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대항할 범여권을 통합하는 일이다.
GT는 이와 관련해 줄곧 ‘범양심세력 대연합론’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자신의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조건도 포함돼 있다. GT가 범여권의 ‘대표선수’로 선발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통합 과정에서 GT가 중요한 주체로 참여할 것이란 전망에도 이견이 거의 없다.
정치권의 한 분석통은 “반 한나라당 연합전선은 기본적으로 개혁세력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며 “정계개편 이전에 GT가 개혁세력의 대표로서 위상을 공고히 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향후 정계개편에서 중요한 지분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정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