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오 의원은 ‘개혁-수구보수’ 구도를 원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명박 전 시장. | ||
그렇다면 이번 전대에서 누가 당권을 움켜쥐게 될까. 현재로선 이재오-강재섭 전 원내대표가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소장·중도파 연합체인 ‘미래모임’의 단일후보 권영세 의원이 강력한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 여기에 이재오-강재섭 의원을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대리인’으로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두 대권주자 간의 경선 ‘예비고사’ 성격도 더해져 더욱 관심을 모은다. 날로 뜨거워지는 한나라당 당권 경쟁의 막후를 들여다봤다.
한나라당 당권 레이스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이재오 전 원내대표는 일부 선호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며 초반 판세에서 멀찌감치 앞서나갔다. 하지만 강재섭 전 원내대표가 레이스 합류를 선언하면서 추격에 불을 바짝 당기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강 의원이 대권에서 당권으로 급선회한 배경을 두고 ‘박심’이 작용한 것이 아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는 한나라당의 7·11 전당대회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 간의 ‘대리전’을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나라당의 대구·경북 지역 한 보좌관은 “이재오 의원의 독주가 계속될 조짐이 보이자 대구·경북 지역 의원들이 모임을 가졌는데 여기서 ‘당권을 수도권 지역에 내주면 다시는 찾아올 수 없을 것이다. 꼭 우리가 차지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안다. 그래서 대권을 바라보던 강 의원을 강하게 설득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대부분 박 전 대표를 지지하는 의원들이기 때문에 박 전 대표와 가장 짝을 잘 이룰 수 있는 카드이자 이재오 의원을 꺾을 잠재력이 있는 카드로 강재섭 의원을 점찍었던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를 토대로 보면 ‘친박 진영의 단일 후보’로 인식되는 강 의원의 갑작스런 당권 경쟁 합류가 이번 전당대회를 ‘박-이 대리전’으로 몰고 가는 양상이다.
그런데 ‘대리전’을 보는 각 주자들의 시각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먼저 이재오 의원 입장에서 보면 ‘대리전’은 그다지 유리한 구도가 아니다.
이 의원은 최근 “‘대리전, 대리전’ 하는데 대한민국이나 한나라당 대리전은 맞다. 누가 당 대표가 되든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당선시켜야 한다. 나는 한나라당을 대리하는 사람이지 특정인을 대리하지는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누구의 대리전이라는 등의 이야기와 ‘친박, 친이’ 하는 식의 구분은 개인적으로 끔찍한 수모다”며 불편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바 있다. 자신이 이 전 시장과 ‘동일선상’에 놓이는 동시에 ‘대리인’으로 비쳐지는 시각을 강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한나라당 한 초선 의원은 “이번 전당대회는 한나라당이 수구보수의 어두운 그림자를 벗고 새로운 집권 세력으로서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꼭 보여줘야 하는 무대다. 이런 점에서 오랜 민주화운동 경력에 강한 리더십과 추진력, 균형 감각 등을 갖춘 이재오 의원이 당 대표로서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당권 경쟁이 개혁 대 수구보수(강재섭 의원을 지칭)의 구도가 아니라 ‘친박-친이 대리전’으로 변질되면 보나마나 지역주의 선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영남권 인사들이 많은 현 한나라당 구조상 수도권 지역을 대표하는 이재오 의원에게 불리한 구도인 동시에 역사의 진보에도 역행하는 퇴행적인 모습이다. 이번 전대는 박근혜-이명박 대리전이 아니라 이재오 의원으로 대표되는 신주류가 한나라당의 구주류에 맞서는 대리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의원으로서는 ‘친박-친이 대리전’이 선거 전략 상 마이너스일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다. 이를 정치적 명분에도 맞는 개혁 대 수구보수의 싸움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것이다.
▲ 강재섭 의원에겐 ‘대리전’ 양상이 불리할 게 없다. 오른쪽은 박근혜 전 대표. | ||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전략통 의원은 “이 전 시장이 지난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홍준표 의원을 지지해주지 않아 당내 일부 인사들로부터 원성을 샀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항간에는 홍준표 의원이 강재섭 의원 지지로 돌아섰다는 소문도 흘러나오는 등 ‘친이 세력’의 분열이 심화될 기미가 보이자 이 전 시장이 이재오 의원을 자신의 우군으로 묶어두기 위해 그런 발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전 시장의 ‘이재오 챙기기’가 이 의원에 득이 될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이 전 시장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P 전 의원이 이재오 의원의 대표 당선을 위해 물밑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점도 이 전 시장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라는 해석도 있다. 이 의원이 원치 않지만 이 전 시장이 자신의 대권 구도를 위해 ‘이재오 지지’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 의원이 대표로 당선되었을 때 이 전 시장의 대권 구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계산하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도 흘러나온다.
한편 강재섭 의원 측은 이번 전당대회를 대권주자들의 ‘대리전’으로 규정하는 것이 싫지 않다는 반응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친박 세력’이 강 의원을 이 의원의 대항마로 내세운 것 자체가 당권 경쟁의 구도를 대권주자들 간의 대리전으로 ‘세팅’하려는 복안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강 의원과 친분이 있는 한 의원은 “최근 강 의원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이번 선거가 대권주자들의 대리전으로 흘러간다면 강 의원에게 절대 유리하다. 박근혜 전 대표가 피습 이후 당내에 확실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눈에 띄게 그 세를 넓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당권 경쟁 구도는 어차피 수도권과 영남권의 대결로 굳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 내 대의원들 가운데 민정계가 아직도 50%를 차지하고 있고 대표 선출 방법도 당원과 여론조사 비율이 7 대 3이기 때문에 강 의원이 매우 유리한 국면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각 후보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대권 주자들의 대리전으로 빠져드는 모습이다. 이는 선거 결과에 따라 ‘대권 구도’에도 필연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먼저 이재오 의원이 당선될 경우 이 의원은 정치적 거물로 성장함과 동시에 박근혜-이명박 두 대권주자 사이에서 일종의 캐스팅 보트를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전망은 이 의원이 누구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이재오식 정치’를 할 것이란 가정 아래에서 성립할 수 있다.
최근 이 의원은 징기스칸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이 누구의 계보도 아님을 밝힌 적이 있었다. 그는 “요즘 징기스칸에게 배운 바 있다. 그것은 ‘싸워서 얻은 것이 아니면 자기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일생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다. 편하게 얻은 것은 자기 것이 아니다”고 말한 바 있다.
▲ 지난 6월 16일 박근혜 대표 이임식에서 이재오 의원(왼쪽)과 강재섭 의원이 악수를 나눴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반면 강재섭 의원이 대표로 당선될 경우 한나라당은 친박 세력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지게 된다. 이는 ‘박근혜 대세론’을 굳어지게 하는 추진제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일련의 역학 구도는 이명박 전 시장을 더욱 한쪽 코너로 몰아 결국 그가 탈당할 명분을 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봐야 한다. 한나라당 주변에는 “박 전 대표가 이번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강재섭 의원)와 원내대표(김무성 의원) 모두를 차지하게 된다면 급격한 힘쏠림 때문에 오히려 대세론에 따른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차라리 당 대표에는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거나 이재오 대표가 되는 쪽이 오히려 박 전 대표에게 유리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당대회에서 주목해봐야 할 점은 소장·중도파의 후보로 떠오른 권영세 의원의 ‘파괴력’과 그를 둘러싼 각종 합종연횡을 들 수 있다. 먼저 권영세 의원은 ‘수요모임’ 리더 남경필 의원을 물리치고 ‘미래모임’의 단일후보로 떠올라 주변을 놀라게 했다. 검사 출신인 권 의원은 남 의원보다는 개혁성향이 옅은 중도파 의원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그를 김덕룡 의원 계보로 분류하고 있다. 김 의원이 한때 박 전 대표가 원하는 당 대표로 인식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권 의원도 넓은 의미에서 친박 계열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권 의원이 1인2표제에서 ‘범 친박 세력의 단합’이라는 명분을 통해 강재섭 의원과 ‘연대’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권 의원은 김덕룡 의원과 친분이 깊다. 그런데 김 의원은 공천 헌금 파문과 관련해 이 의원과의 사이가 일부 틀어진 것으로 안다. 그래서 김 의원 영향력 아래에 있는 권 의원도 이 의원과의 연대보다는 강 의원과 손잡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권 의원도 소장파와의 관계 때문에 다른 주자와 쉽게 연대를 할 형편도 못 된다. ‘권영세 변수’로 전당대회가 복잡한 양상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단순히 당권 주자를 뽑는 축제가 아니다. 그 결과에 따라서 당내 대권 구도에 큰 영향을 줄 ‘나비효과’의 진원지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번 전당대회를 좀 더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