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정치권에서는 고건 전 총리의 행보를 ‘벤처정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도전 혹은 도박’ ‘대박 혹은 거품’ 등이 함축된 말일 것이다. | ||
그런데 그 뒤 고 전 총리의 행보가 아리송하다. 애초 희망연대는 사회 각 분야 명망가 2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대 언론 창구인 대변인까지 선임하는 등 사실상 정당 조직으로 운영될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희망연대 ‘창립’에 대한 어떤 시그널도 보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희망연대를 정치 조직화하는 게 쉽지 않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고 전 총리가 희망연대를 일종의 ‘벤처기업’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잘 되면 대박, 안 되면 발빼기’ 행보라는 것이다. 고 전 총리의 ‘벤처정치’를 따라가 봤다.
고건 전 총리는 5·31 지방선거 전에 여야 가릴 것 없이 뜨거운 ‘러브콜’을 받아왔다. 고 전 총리와 가까운 민주당 신중식 의원은 5·31 지방선거 직전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고 전 총리에게 정치적 조언을 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신 의원의 말은 단순히 그가 각 정파로부터 연대 제의를 받는 인기 정치인의 수준을 뛰어넘는다는 자신감의 발로다. 고 전 총리가 언제 어디서든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꾀할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거품’이 아니라 ‘내용’이 있다는 판단이다.
정치권의 그런 분위기를 읽고 ‘감을 잡은’ 고 전 총리는 지방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희망연대’ 발족을 공고했다. 물론 ‘희망연대’가 정치조직이 아니라 ‘시민운동단체’라는 전제는 따랐다. 또한 조직과 자금이 거의 없는 ‘아마추어’ 고 전 총리가 희망연대를 바탕으로 정치세력화를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세간의 ‘깎아내림’도 들렸다. 때를 더 기다려야 하는데 너무 성급했다며 ‘대권 조급증’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고 전 총리로서는 ‘그 무엇인가’를 보여줘야만 했다. 대중적 인기를 계속 유지하며 대권에 대한 희망을 계속 보여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몸을 담을 배경이 필요했다. “돌다리를 두드려본 뒤 건너지 않는다”는 주변의 비판도 더 이상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칼’을 뽑았다. 희망연대를 띄워 대권주자로서의 웨이트를 높이고 자신의 잠재력을 회의적으로 보는 ‘부동층’을 끌어들이기 위한 일종의 승부수였다.
‘희망연대’는 7월 26일 치러지는 재·보궐 선거 이후 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고 전 총리는 “현 정치권이 꿈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희망연대는 향후 사회 각 분야 일반 국민을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 성격의 연대모임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고 전 총리는 희망연대 발족 공고 뒤 주변 지인들을 만나 ‘큰 꿈’을 말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대권 행보를 시작했다. 그는 지난 6월 말 경기고 동문 모임에서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권 도전’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6월 초부터 중앙 일간지 몇 군데와 최초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행정가로서만 있었기 때문에 언행이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만 보고 갈 테니 동문들이 많이 도와달라. 내가 부르는 걸 기다리지 말고 모두 각자 알아서 열심히 뛰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이날 미국과의 관계 설정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특히 젊은이들과 대화를 할 때면 “대미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잘 돼야 한국이 잘사는 길이다”라며 대미 관계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다닌다고 한다.
고 전 총리는 5·31 지방선거 직후 희망연대 설립을 발표한 뒤 부쩍 정치적 탄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 그런지 이 날 매우 자신감에 차 있었다는 게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더욱이 희망연대는 내년 대권을 향한 고 전 총리의 의욕적인 첫 정치적 행보였기 때문에 동문들의 뜨거운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고 전 총리의 자신감과는 달리 희망연대 ‘작업’은 아직 그리 신통치 않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먼저 고 전 총리와 친분이 깊은 한나라당 A 의원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최근 고 전 총리와 독대를 했다고 한다.
A 의원은 “고 전 총리가 희망연대에 대해서 느슨한 연대 정도로만 얘기를 하더라. 일부에서는 정당 직전 단계에까지 왔다고 평가하는데 그것은 아닌 것 같다. 희망연대가 생각보다 기대에 못 미친다고 했다. 걱정하는 모습 같더라”고 말했다. 그는 고 전 총리에게 “지금은 호남과 충청권을 ‘서부벨트’로 묶어 정치세력화하는 게 시급하다. 실체가 있는 정치세력을 가지고 여야 정치권과 딜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언제든 무너지는 거품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최근 희망연대에 발을 담그려다가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는 정치권 인사 B 씨의 의견도 있다. 그는 희망연대에 대해 “고 전 총리가 발족 공고만 해놓은 뒤 크게 관여를 하지 않고 실무자들에게 인사 영입을 지시한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래서 인재 영입이 지지부진하다고 들었다. 나는 그 모임에 관심이 있어서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쪽에서 비 정치인만 가입할 수 있다는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 아닌가. 얼마나 순수한 ‘민간인’을 영입하려는 것인지 몰라도 정치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입을 거부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들 입맛에 맞는 사람만 뽑겠다는 것이 통합의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의 뜻인지 모르겠다”며 볼멘 소리를 했다.
희망연대는 고 전 총리에게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뜻대로 잘 뜨지 않자 정치권에서는 “고 전 총리가 애초부터 정치 조직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지 않았느냐”는 해석도 나온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전문가는 이에 대해 “고 전 총리는 처음부터 ‘벤처 정치’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이전투구의 정치판에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을 만드는 식의 옛날 정치는 아예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주변에서 하도 ‘다된 밥상에 숟가락만 달랑 얹으려 한다’는 비판이 많으니 할 수 없이 희망연대를 띄운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잘 되면 자신의 대권 조직으로 키울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발을 빼고 시민단체 형식의 국민의식 개혁운동체로 남길 가능성도 크다.
실제로 그는 희망연대 관계자들에게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애매모호하게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정치 특성이 어떤가. ‘보스’로부터 미래에 대한 보장이나 권력 창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충성을 할 것 아닌가. 그런 것을 보여주지 못하니 희망연대도 주변에선 보는 것처럼 정당 조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물론 고 전 총리 측에서는 그런 시각을 부정하고 있다. 고 전 총리의 한 측근은 “지금 한창 30~40대 전문가 그룹에 대한 영입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8월에 있을 발족대회를 주목해 보라. 정치권에도 신선한 자극제가 되는 새로운 정치실험이 될 것이다. 정치를 소비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는 일종의 사회운동체 성격이다. 희망연대의 정치세력화는 그 다음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의 발언 속에는 희망연대를 띄워 고 전 총리 중심의 정계개편을 주도하겠다는 원려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구상도 희망연대 추진이 지지부진하면서 벽에 부딪힌 모습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끊임없이 “고 전 총리가 출마하겠다는 얘기도 하지 않고 있는데 어느 누가 자기 이름을 빌려줄 수 있겠느냐”는 시큰둥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자칫 국민통합과 실용주의를 내건 ‘희망연대’가 지역주의 틀 속에 함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고 전 총리가 희망연대를 정당 조직으로 키워낼 뜻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추진할 힘이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현재로선 그리 명쾌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고 전 총리가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앞서 한나라당 A 의원이 조언했던 ‘서부벨트’를 중심으로 한 ‘고건 신당’을 만드는 것도 한 방법으로 거론된다. 희망연대라는 어정쩡한 시민단체 형식의 정치 조직이 아닌 고건 신당으로 승부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직에 고 전 총리 측 주장대로 현역 의원 30~40명이 따라와야 대권에 승부를 걸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 전 총리 측은 “과거처럼 민주산악회니 민추협이니 하는 정치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끌어들이고 하는 그런 정치를 국민은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고 전 총리는 정치 지형이 바뀔 때까지 더 기다리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두고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고 전 총리는 아직 ‘코스닥 시장’에 상장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투자자들이 모일 리가 있겠느냐. 그나마 희망연대는 코스닥 상장 조건(정당 조직)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그가 과연 코스닥에 상장할 마음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 하고 있다. 결국 고 전 총리는 벤처기업의 대박 신화를 벤치마킹해 최소 부담으로 최대 수확을 거두려는 벤처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고 전 총리는 정치 패러다임의 개혁을 바라고 있다. 희망연대도 그런 가치관의 표출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 현실과 동떨어져 국민들의 관심 밖에서 진행될 경우 ‘벤처 대박을 염두에 둔 제스처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