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6 재보선을 통해 수도권에서 호남민심의 전략적 선택을 받은 민주당이 향후 정계개편의 중심이 되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 지난 25일 덕성여대 앞에서 열린 조순형 후보의 유세에 한화갑·장상 공동대표 손봉숙 의원 등 당 지도부가 총출동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 | ||
그럼에도 민주당이 수도권에서 호남 민심의 전략적 선택을 받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는 앞으로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재결합’을 성사시키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7·11 전당대회에서 주류-비주류 간의 갈등을 이미 노정한 바 있는 한나라당에도 정계개편의 쓰나미가 밀려들 가능성도 크다. 조순형 효과가 가져올 정계개편 도미노 게임이 어떻게 전개될지 들여다봤다.
조순형의 승리는 곧 민주당의 승리였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를 통해 ‘반노무현 비 한나라당’ 연대를 구축하는 데 자신들이 그 중심에 설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선 “의석 12석에 불과한 ‘다윗’이 142석의 ‘골리앗’을 무릎 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민주당의 이번 선거 승리를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화갑 민주당 대표는 ‘열린우리당은 뇌사 상태’라며 앞으로의 정계개편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그 자신감의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대표가 믿는 구석은 바로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호남 민심의 전략적 선택이다. 서울 성북을에서 호남 유권자는 약 30%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아니었다면 조순형 후보는 6번째의 금배지를 달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호남 외의 지역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민주당이 이번에는 호남 민심의 도움으로 정계개편의 주인공으로까지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호남 표심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정계개편의 주도권이 열린우리당으로도, 민주당으로도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을 맞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바라는 정계개편의 시나리오는 무엇일까. 한화갑 대표가 최근 부쩍 발언 강도를 높이는 부분은 바로 신당 창당이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과정에서 없어질 당에 투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열린우리당 해체의 필연을 공공연하게 주장해 왔다. 민주당의 복안은 열린우리당의 ‘반노’ 내지는 ‘비노’ 성향의 의원들과 연대한 뒤 고건 전 총리 세력과 국민중심당 등 제 정파와 제휴, 신당을 창당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 중심의 신당 창당은 민주당만의 희망사항은 아니다. 열린우리당 내부에서 호남지역 의원을 중심으로 신당 창당의 필요성이 깊숙하게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내 민주당과의 통합론자인 염동연 전 사무총장은 이미 지난달 말 민주당 한화갑 대표와의 비밀회동에서 신당 창당 필요성에 뜻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염 전 사무총장은 최근 “한 대표와 만나 정계개편과 신당 창당에 관련해 깊은 의견을 나눴다. 새로운 곳에 터를 잡아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한다는 데 생각을 같이했다”고 밝혀 신당 창당을 본격 추진할 의사를 내비쳤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도 최근 고 전 총리와 접촉, 정계개편 방안 등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이번 선거 결과로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평상심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동요된 사람이 많다. 이들은 노무현 대통령 탈당과 개헌 등 신당 창당의 계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 중에는 여전히 호남 민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입장이 중요한 ‘변수’다. 한화갑 대표가 민주당의 전 오너였던 DJ의 뜻을 거스르면서 정계개편을 위해 민주당을 공중 분해시킬 수는 없다. 정치권에 정통한 민기획의 박성민 대표는 “정계개편을 할 수 있는 세 주체는 한나라당과 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다. 이 중 한나라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주주이고 노무현 대통령은 촉매역할을 할 것”이라고까지 전망하고 있다. 민주당이 정계개편 과정에서 DJ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가의 대체적 시각이다.
그렇다면 DJ는 신당 창당이나 열린우리당과의 합당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아직 DJ는 이와 관련해 어떤 의사도 표명한 적이 없다. 하지만 옛 동교동계 의원들을 통해 DJ의 ‘복심’을 간접 확인해볼 수는 있다.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정원 도청 사태로 고초를 겪은 바 있는 신건 전 국정원장,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부부와 김옥두 전 의원 등 자신의 측근들을 동교동 자택으로 초청해 저녁을 같이 했다고 한다. 옥고를 치른 두 사람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나는 나이 70세가 넘어서 대통령이 되었다. 여러분들은 지금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언젠가 또 좋은 기회가 올 수도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는 덕담을 했다는 후문이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정치적 얘기는 자제했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향후 정국 전망에 대해 ‘희망적인’ 얘기를 했다는 게 이 모임의 전후 관계를 잘 아는 A 씨의 전언이다.
동교동 출신의 또 다른 한 전직 의원은 “DJ가 합당이나 신당 창당에 대해 명확한 뜻을 밝히진 않았지만 긍정적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DJ의 마지막 ‘소원’은 남북 화합에 이은 영-호남 간의 정치적 화합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DJ는 민주당이 제 정파와 연합을 한 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정치적 화해와 연대를 할 것을 기대한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향후 정계개편에서 친노 그룹은 왕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DJ가 아직 박 전 대표와의 연대를 공식화하지는 않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설립한 영남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등 양측 간의 스킨십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정계개편 과정에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지역감정 해소라는 대의명분으로 영-호남의 정파가 결합하는 구도도 상정해볼 수 있다. 박성민 대표는 또 “노무현 대통령이 ‘대연정론’을 제기한 것도 이 같은 박근혜 전 대표와 DJ의 화합 가능성에 대한 견제 카드”라고 설명하고 있다.
민주당이 현재 추구하는 정계개편의 요체는 ‘노무현 왕따 작전’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한 대표는 최근 정대철 열린우리당 고문과 만난 자리에서 민주당 옛 세력의 복원에 대해 합의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 자리에서 양측은 일부 이견이 있음에도 자신들을 배신한 노 대통령과 다른 세력 간의 연대를 철저하게 막자는 데는 의견을 같이했다는 후문이다.
특히 정대철 고문은 최근 한 지인에게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정치는 노 정권 이후에나 다시 한번 해 보자”며 강한 배신감을 드러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 고문은 조순형 의원과도 매우 친분이 깊은 사이여서 이번 선거에서 간접 지원 사격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15대 총선 때 DJ의 최측근이었던 J 전 의원과도 최근 자주 만나며 민주당 중심의 정계개편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열린우리당에서 고위직을 지낸 옛 동교동계 인사 M, B 의원이 향후 양당의 합당을 적극 추진하며 탈당을 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이는 민주당 중심의 정계개편이 언론에 드러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척되고 있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운 좋게’ 정계개편을 주도해 나간다면 그 시기는 어떻게 될까. 민주당은 ‘쇠뿔도 단김에 빼겠다’는 입장이다. 한 대표는 최근 “(열린우리당 정대철 고문이)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탈당하든 안 하든 정기국회 전이라도 의기투합하면 신당 창당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신당 창당을 제안했다. 나도 그 원칙에 찬성한다”고 밝혀 정계개편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우리도 지난 7·11 전당대회를 통해 친 박근혜 세력과 친 이명박 세력 간의 갈등이 너무 크게 드러났다. 양측간 대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민주당이 저렇게 정계개편을 서두르는 데는 자신들이 푸시를 하게 되면 갈등이 잠복해 있는 한나라당도 도미노식으로 정계개편의 한 축으로 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쉽게 그 덫에 걸려들지는 미지수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정계개편 시기는 열린우리당 내분을 촉발시키는 촉매로 작용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일부에서는 “7·26 재보선 참패와 민주당 조순형 후보의 당선에 따라 양당에서 반 한나라당 세력의 대통합을 비롯한 정계개편을 조기에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김근태 의장 등 지도부는 정계개편 논의를 정기국회 이후로 미루기로 한 상황이어서 이 문제를 두고 당내 갈등이 불거질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이는 가뜩이나 불안한 김근태 체제를 더욱 약화시켜 정계개편을 재촉하는 갈등 요소가 되고 있다.
민주당은 12석 꼬마 정당에 불과하다. 조순형 의원의 당선이 142명의 거대 정당을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치의 중대변수 호남 민심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조순형의 나비효과도 서서히 여의도를 뒤덮을 것으로 보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