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용지 1장짜리인 문건에는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 당시 소속 의원들의 성향을 ‘순수 신당파’ ‘중도파’ ‘당 사수파’ 등 세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다. ‘영입완전배제’ ‘영입선별검토’란 부제도 붙어 있다. 하지만 문건의 출처와 배포 배경 등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어 누가 어떤 목적으로 괴문서를 만들었고 또 국회 주변에 유포했는지 등에 대한 궁금증만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권 주변에선 탄핵주역이었던 조순형 민주당 상임고문이 7·26 재보선을 통해 재기한 이후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정계개편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민주당이나 그 지지세력들이 정계개편 불씨를 살리기 위해 괴문서를 뿌린 게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더구나 민주당을 뛰쳐나간 열린우리당 인사들에 대한 살생부라는 소리까지 들리고 있다.
문건이 처음 발견된 것은 지난 1일 오후. 국회 본관 기자실 앞에 설치돼 있는 보도자료 배포용 책상 위였다. 이 책상은 각 정당이나 국회의원, 국회 직원, 시민단체 등이 기자들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보도자료나 성명서 등을 올려놓는 곳이다. 기자는 이날 이 곳을 지나다 우연히 문건을 발견했다. 그 출처를 파악하려 했지만 배포자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본관 기자실에서 상주하고 있는 한 일간지 기자는 “점심 식사 후 책상 위에 놓여진 보도자료를 검토하는 중에 수십 장의 괴문서를 발견했다”며 “문건은 한 시간도 채 안 돼 모두 기자들 손에 들어갔고 문건을 못 구한 기자들은 동료들에게 복사를 부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문건을 손에 쥔 기자들은 문건의 출처와 배경 등을 파악하느라 분주히 움직였지만 그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민주당을 비롯해 각 정당 관계자들에게 문의했지만 한결같이 “모른다”는 답변뿐이었다. 누군가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문건을 만들었고 또 여론 확산을 목적으로 기자들 눈에 잘 띄는 곳에 배포했을 것이란 추측만 난무했다.
문건은 민주당 분당 당시 소속 의원들의 성향을 ‘순수 신당파’ ‘중도파’ ‘당 사수파’ 등 세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각 그룹에는 앞으로의 정계 개편에서 이들에 대해 취해질 처우로 순수 신당파에는 ‘영입완전배제’, 중도파에는 ‘영입선별검토’란 부제도 붙어 있다. 순수 신당파에는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던 이른바 ‘천(정배)·신(기남)·정(동영)’ 그룹을 비롯해 김원기 임채정 등 25명이, 중도파는 세 분류로 나눠 모두 57명, 당 사수파 역시 세 분류로 나눠 18명이 거명돼 있다.
▲ (왼쪽부터) 정동영, 천정배, 신기남 | ||
문건 내용을 접한 정치권 관계자들은 민주당이나 그 지지세력이 괴문서를 작성, 유포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분당되기 전 민주당 의원들의 성향을 비교적 자세히 분류했고 이들을 상대로 선별적 영입을 검토하겠다는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앞서 한화갑 민주당 대표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돌아오면 받아줄 수 있다”며 과거 민주당 소속 의원들의 자진 복귀를 강조한 바 있다. 또 7·26 재보선에서 당선된 조순형 상임고문은 28일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탈당하면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통합 등 범여권세력의 정계개편 논의가 수월해질 것”이라며 민주당 중심의 정계개편 가능성을 시사했었다.
7·26 재보선 이후 정계개편 주도권을 선점한 민주당과 그 지지세력들이 민주개혁세력 통합을 위해 군불 지피기에 나선 게 아니냐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열린우리당 인사들 중 중도파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펄쩍 뛰며 문건 출처를 부인하고 있다. 이상열 대변인은 3일 기자와 통화에서 “문건 출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며 “내용을 보니 분당 직전 명단과 비슷한 것 같은데 누가 무슨 목적으로 유포했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대변인은 또 “당 내부에서 정계개편과 관련한 이런저런 얘기가 논의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당 차원에서 그런 괴문서를 만들어 유포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박하면서 “위기에 처한 여권이 집안단속 차원에서 괴문서를 유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권 분열시 친노직계 소수 정당 창당 가능성을 염두에 둔 여권 내부가 역공작을 편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반면 열린우리당의 한 중진의원은 기자에게 “괴문서 제목이 ‘민주당 탈당파에 대한 검토 대상자 명단’이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출처와 정치적 노림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며 “다만 민주당 차원의 공식적인 문건이라기보다 일부 지지세력이 정계개편 불씨를 지피기 위해 유포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에서는 이 한 장의 문건이 정계개편을 촉발하는 뇌관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2003년 1월 이른바 ‘민주당 살생부’가 인터넷 상에 유포된 이후 민주당이 극심한 내홍을 겪으면서 결국 분당이라는 최악의 사태로 비화됐다는 사실은 이러한 시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