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일 청와대에서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만났다. 문재인 법무장관 임명을 놓고 충돌했던 김근태 의장(왼쪽)과 노 대통령은 이날 화해는커녕 갈등의 골이 더 깊어가는 듯 보였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 대통령은 탈당은 하지 않을 것이며 임기 후에도 당에 남겠다고 하지만 여권 일각에선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낫겠다”는 볼멘소리가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두 사람의 앙금은 이제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됐다고 관측하고 있다.
여기에 노 대통령과 GT가 처한 정치상황은 두 사람의 관계 복원이 쉽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남은 임기에 각종 개혁정책을 밀어붙이는 동시에 차기 대선정국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노 대통령의 복심과 어떻게든 대권주자로서 입지를 구축해야하는 GT의 생존전략이 상충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갈등이 증폭될수록 당청 간 불협화음은 심화될 것이고 여권 분열을 촉발하는 핵뇌관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사느냐 죽느냐’ 그야말로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고 있는 노 대통령과 GT의 권력 암투 및 정치적 노림수를 진단해 봤다.
노 대통령과 GT가 갈등을 빚어왔던 것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얘기는 아니다.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는 지난 2002년 대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노 후보는 GT에게 선대위원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GT는 거절했다. 정치 이력이나 노선이 다소 차이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 노 대통령이 즉흥적 언행으로 구설수에 오르자 GT는 “지도자가 세상에 분노하면 나라가 어지럽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이러한 GT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개각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출했다. 노 대통령은 2004년 6월 열린우리당 양대 계파 수장이자 대권주자인 GT와 정동영(DY) 전 의장을 대권수업 차원에서 입각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GT와 DY 두 사람 모두 지도자로서 입지 구축이 용이한 통일부 장관을 요구했다. 결국 노 대통령은 통일부 장관에 DY를 낙점했고 GT는 분루를 삼키면서 복지부 장관으로 입각해야 했다.
입각 과정에서의 불만이었을까. 아니면 이념적 차이에 따른 소신이었을까. GT는 복지부 장관 재임시절 사사건건 노 대통령과 정부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노 대통령을 겨냥해 “계급장 떼고 붙자”고 압박하는가 하면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는 지난 5·31 지방선거 이후 DY가 낙마하고 GT가 당 의장에 오르며 더욱 심화됐다. 기 싸움 수준이었던 두 사람의 갈등이 본격적인 권력 암투으로 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의 권력과 미래의 권력이 정면충돌하면서 두 사람의 앙금도 깊어갔다.
‘독배를 마시는 심정’으로 마지막 대권 승부수를 던진 GT의 대권 플랜과 ‘중단없는 개혁’을 기치로 정국주도권 장악 및 대선정국 영향력 행사를 노리고 있는 노 대통령의 복심이 충돌하면서 당청 간 갈등도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지난 6월 21일로 예정됐던 노 대통령의 시정연설 계획이 갑자기 취소된 것은 당청 간 갈등이 표출된 대표적 사례다. 정치권 주변에선 연설 취소 배경과 관련해 ‘GT 제동설’ 등 갖가지 억측이 나돌기도 했다. 청와대 측이 국회에 먼저 요청한 연설을 취소한 진짜 속사정은 아직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노 대통령의 깜짝 발언 내지는 충격 카드 제시 등을 우려한 GT와 당 지도부가 청와대 측에 연설내용 자제를 주문했고 당의 무리한 간섭에 화가 난 노 대통령이 연설 취소를 결정했을 것이란 관측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을 뿐이다.
당 의장에 취임하자마자 노 대통령 국회연설 문제로 한바탕 기 싸움을 벌인 두 사람은 인사권 문제로 재충돌했다. GT와 당 지도부는 김병준 부총리에 대한 자진 사퇴를 권고하는 동시에 문재인 법무카드는 ‘반대한다’는 선제 공격을 날렸다. 청와대는 발끈했고 파국으로 치닫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결국 노 대통령이 김 부총리 사표를 수리하고 법무장관에 문재인 전 수석 대신 김성호 국가청렴위 사무처장을 내정함으로써 당청 간 갈등은 일시 봉합되는 형국을 맞았다.
노 대통령 입장에선 여권 분열이란 최악의 사태를 차단하는 동시에 ‘대통령의 인사권 존중’이란 원칙을 확인받았고, GT는 ‘문재인 불가론’을 관철시킴으로써 대통령의 인사권 독단을 견제하는 성과를 일궈냈다. 외형상 상호 윈윈 차원에서 인사권 갈등을 매듭지은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인사권 갈등을 계기로 당청 간 갈등의 골은 더욱 깊게 패였고 노 대통령과 GT의 관계도 더 이상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됐다는 게 여권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노 대통령은 이날 작심한 듯 GT를 겨냥해 “김 의장은 과거 국민의 정부 때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대들었다” “(장관시절) ‘계급장 떼놓고 맞붙자’고 한 적이 있다” 등 GT의 과거 발언을 문제 삼아 강도 높게 비판한 것으로 한 참석자는 전했다. 심지어 외부에서 대권주자를 영입할 수 있다는 ‘외부 선장론’까지 꺼내들면서 GT를 압박하기도 했다.
GT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GT는 “민심이 현 정부에서 완전히 떠났다” “역(逆) 정권 교체 위기다” “당도 변해야 하지만 대통령도 변해야 한다” 등 격렬한 표현으로 노 대통령과 맞선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GT는 당청 간 의사소통 문제를 지적하면서 “내가 김병준 전 부총리 사퇴 문제로 민심을 전달하기 위해 두 번이나 면담을 신청했는데 거절하지 않았느냐”며 노 대통령을 면박하기도 했다.
이처럼 인사권 문제를 계기로 노 대통령과 GT의 ‘불편한’ 관계는 급기야 ‘치유 불능’의 관계로 비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인사권 갈등은 봉합됐지만 노 대통령과 GT를 정점으로 한 당청 간의 정책·노선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는 분위기다.
GT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재계와의 뉴딜(New Deal)’ 정책을 청와대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 노선과 맞지 않는다며 제동을 걸고 있다. 8·15 사면 문제와 관련해 청와대측이 노 대통령 측근들은 사면 대상에 포함시키면서도 당이 요청한 경제인들은 배제한 배경에는 당청 간 감정대립이 내포돼 있을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다. 노 대통령 스스로 ‘마지막 권력’으로 표현한 ‘인사권’을 믿었던 친정으로부터 침해받았지만 더 이상의 권력투쟁은 묵인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 청와대의 이러한 의지는 노 대통령의 향후 국정운영 기조 및 정계개편 움직임, 대권정국 역할론 등과 맞물려 더욱 치밀하게 전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노 대통령이 인사권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존심을 버리고 한 발 물러난 모양새를 취한 것도 정국주도권 장악 등을 염두에 둔 다목적 포석이 담겨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문재인 카드를 포기함으로써 여당 내 비노 세력들의 탈당 내지는 분당 명분을 잠재우면서도 필요에 따라서는 정계개편까지도 염두에 둔 ‘외부선장론’ 카드를 흘려 대선정국에서 막후 영향력을 행사할 것임을 공언한 셈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은 8·15 사면을 통해 정치활동을 재개할 것으로 보이는 안희정 씨에게 정계개편 밑그림 및 정권재창출 플랜 등 중책을 맡길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핵심 측근인 문재인 전 수석에게는 마지막 비서실장직을 맡겨 친노세력 결집 및 자신의 퇴임 후 플랜을 짜게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최근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를 거론해 보혁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배경에는 친노·개혁세력 대결집이라는 나름의 포석이 내포돼 있을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대권고지 점령을 위해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GT도 ‘올인’ 승부를 불사하겠다는 각오다. 사실 GT는 당 의장 취임 당시부터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 정책을 통해 등 돌린 민심을 다잡고 밑바닥을 기고 있는 지지율을 끌어 올리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과거 정권 사례처럼 살아있는 권력을 밞고 일어서야만 진정한 대권주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 노 대통령과의 관계가 악화 일로로 치달았던 것도 GT의 이러한 대권전략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노 대통령과 정면으로 충돌한 인사권 갈등 후폭풍이 GT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대권 마이웨이’를 결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GT는 청와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대권 승부수인 뉴딜정책을 계획대로 밀어붙인다는 각오다. GT가 제안한 4대그룹 총수 회동이 급물살을 타고 있고 투자확대를 전제로 재계에 약속한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문제도 정기국회에서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이와 관련, 이부영 열린우리당 상임고문은 10일 한 라디오 방송 시사프로에 출연해 “올 정기국회가 끝나면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결별 단계에 접어들 것”이라며 사실상의 여권 분열을 예고하기도 했다. 이 고문은 또 “김 의장이 보이고 있는 뉴딜행보와 재계 인사들에 대한 대사면 요구는 노 대통령과 거리 두기의 구체적인 사례”라며 “김 의장의 최근의 행보는 떠나버린 민심을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결단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이 고문의 말처럼 노 대통령과 GT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결별 수순에 돌입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불편한 관계와 감정대립을 넘어 ‘사느냐 죽느냐’하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비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GT가 대권 승부수로 던진 뉴딜정책 및 서민경제 회복 추진안과 노 대통령이 주력하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을 둘러싼 양측의 입장차가 너무 커 또 한 차례 대충돌을 예고하고 있다.
여기에 두 사람은 정계개편과 차기 대선구도와 관련해 상이한 복심을 가지고 있어 혈투를 피하기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노 대통령과 GT의 진검승부가 어떻게 결론이 날지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