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만에 형성된 여소야대 정국이 정치권뿐만 아니라 검찰 수사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박은숙 기자
검찰 내에서도 수사 방향이나 강도는 모두 총선 이후에나 가시화될 것이란 얘기가 종종 나왔었다. “총선 전에 대대적으로 수사를 하면 정치적 오해만 살 뿐이어서 총선 이후로 수사를 미뤄둔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4월로 접어들면서 물밑 움직임이 조금씩 외부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을 이끌고 있는 김기동 단장이 서울중앙지검에 있는 사건들을 두루 살펴본 후 특정 기업을 수사하겠다고 김수남 검찰총장에게 보고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김 총장이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요구하면서 첫 수사 타깃을 재검토 중이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총선 후 이런 얘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6년 만에 형성된 여소야대 정국이 정치권뿐만 아니라 검찰 수사에도 직접 영향을 미친 탓이다. 섣부르게 사정의 칼날을 빼들었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검찰 내에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정 수사는 이대로 물 건너 가는 것일까.
# 대대적인 사정수사 잠시 수면 아래 가라앉나
현재 검찰 내에선 당분간 사정수사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데 무게가 실린다. 새누리당의 표류가 총선 참패 이후 장기화되고 있는 데다, 더불어민주당이 원내 제1당을 차지하고 제3당인 국민의당이 캐스팅보트를 쥐게 된 상황을 좀 더 두고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적어도 5월까지는 사정수사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 시점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사건 등 현재 서울중앙지검에서 수사 중인 여러 사건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때와도 맞물린다. KT&G, 농협중앙회장선거사건, 용산비리사건 수사 등도 그때쯤이면 거의 대부분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
검찰의 한 고위 인사는 “새누리당과 청와대가 총선에서 패한 후 수습해 나가는 과정이 더디고 혼란스럽지 않느냐”며 “심지어 언론에선 박근혜 대통령의 독선적 리더십을 가장 심각한 패배 원인으로 판단하면서 새누리당내 친박계 해체까지도 요구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여당과 청와대가 상황을 어떻게 정리하는지, 더민주와 국민의당이 어떤 태도로 정국을 이끌어가는지를 봐야 우리도 다음 방향을 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검찰 고위 인사도 “당분간 검찰은 정중동하면서 정치권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면서 “검찰 내부에서도 섣불리 행동에 옮기는 것은 자제하고 관망세로 일관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전했다.
검찰이 이렇게 판단하는 데는 청와대가 사정수사에 신경을 쓸 만큼 여유가 없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또 총선 이전처럼 섣불리 검찰권을 동원했다가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검찰 장악력도 예전 같지 않게 느슨해질 수 있다.
그러면 사정수사 첫 타깃이 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초 박근혜 정부 기조대로 공공 및 민간 분야 등에 두루 걸쳐 대규모 사정을 검찰이 계획했다면, 이제는 박근혜 대통령 주변 인물들이 타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정권 말기가 되면 검찰이 숨겨둔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 않느냐”며 “그런 상황에서 여소야대 국면에다 새누리당의 혼란이 조기에 정리되기도 어려워 보이는 만큼 검찰이 더 이상 정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결국 사정수사 첫 타깃은 현 정권 실세들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검찰이 검토한 일부 기업사건 중에서 새누리당 친박계 실세들과 관련된 게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인사권을 청와대가 쥐고 있으니 검찰 내 주류가 등을 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19대보다 늘어난 선거사범 수사가 정치권을 압박하는 카드가 될 수도 있어 민정수석실에서 그 명단을 놓고 여러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 루머 난무하는 예사롭지 않은 선거사범 수사
본격적인 사정수사 전 검찰은 사실상 선거사범 수사에 주력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향후 한두 달 내에 수사를 마무리하고, 공안부뿐만 아니라 특수부까지 나서 선거사범을 수사하겠다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이런 입장을 밝힌 후 ‘당선인 중에 누가 수사 명단에 있더라’는 등 선거사범 수사와 관련한 루머가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또 검찰은 4월 13일 현재 제20대 국회의원 당선자 중 104명을 입건하고 98명을 수사중이라고 밝혔지만, 총선 이후 더 늘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선거가 끝나면 당연히 선거사범은 더 늘기 마련”이라며 “중요한 것은 아무리 선거사범이 늘어도 이 중에서 당선무효형이 얼마나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19대 총선에서는 공소시효 만료일까지 당선자 30명을 기소했고, 이 중에서 10명에게 당선무효형이 선고됐다. 18대 총선에서도 당선자 34명을 기소해 15명이 당선무효가 됐다.
총선 당일까지 입건된 선거사범이 19대 총선보다 31.6% 증가한 데다, 총선 이후 고소·고발 사례가 더 늘었다면 19대나 18대보다 기소자와 당선무효자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현재 검찰이 하고 있는 선거사범 수사가 향후 정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치권 한 인사는 “검찰이 수사 중인 선거사범들을 정부·여당은 정당별로 분류해서 갖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며 “여당 누구, 야당 누구가 선거사범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얘기가 계속 나오는 게 심상치 않다”고 말했다.
김성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