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C 드라마 <주몽>의 한 장면과 김근태 의장(맨왼쪽), 손학규 전 지사. | ||
지난 7월 말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기자 간담회에서 최근의 인기 드라마 <주몽>을 언급해 주목을 받았다. 이날 간담회에서 김 의장은 경제계와의 ‘빅딜론’, 경제인 사면 요청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여러 가지 발언을 하는 가운데 <주몽>을 언급하며 ‘소금론’을 꺼냈던 것이다. 그는 “주몽이 위기에 빠진 부여를 구하기 위해 소금산을 찾아 고산국으로 떠나는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도 소금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민들의 먹고사는 문제가 어려운 요즘 적극적인 투자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소금산’이라는 설명이었다.
결국 8·15 특별사면에서 경제계 인사들이 제외되며 김 의장의 요청은 무시됐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김 의장이 ‘주몽’을 자처하며 소금산을 찾기를 원했으나 결과는 드라마처럼 바라던 대로 되지는 않았다고 입방아를 찧기도 했다.
어쨌거나 인기 드라마 <주몽>이 김근태 의장에게 무언가 ‘힌트’를 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주몽’이 되고자 하는 정치인은 비단 김 의장뿐만이 아니라는 사실.
요즘 자칭 타칭 주몽을 닮으려하는 이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다. 민심대장정을 이어가고 있는 손 전 지사는 요즘 주변에서 들려오는 “100일 대장정의 행보가 주몽과 닮아있다”는 평에 내심 반가워하는 눈치다. 측근이 이야기하는 그 이유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주몽이 드라마 속에서 셋째 아들 아니냐. (손 전 지사가) 한나라당 내에서 박근혜, 이명박에 이어 대권후보 3인자로 거론되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또 주몽이 내부에서 다른 ‘왕자’들과 싸우지 않고 궁을 떠나 세상을 배우기 위해 고초를 마다하지 않는 모습도 손 전 지사가 대장정을 하는 것과 꼭 같다”는 것이 이 측근의 설명이다.
▲ MBC <영웅시대> 캐릭터와 박근혜 전 대표(맨 왼쪽), (맨오른쪽)이명박 맨 전 시장. | ||
노무현 대통령도 한때 드라마로 인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불멸의 이순신>이 방영될 당시 “이순신의 캐릭터에 노무현 대통령의 이미지를 반영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던 것. 극중에서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모습이 노무현 정권이 표방하고 있는 ‘열린 자세’와 닮아 있는 것 아니냐는 정치적 해석이었다. 당시 대본을 집필했던 윤선주 작가는 노무현 대통령을 ‘묘사’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으나 상당수 드라마 제작진이 현 정권의 ‘눈치’를 살폈다는 것이 방송가의 일반적 시각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본의 아니게 브라운관이나 스크린 속에 실제 인물로 나온다. <그 때 그 사람들> <영웅시대> <제3공화국> 등 박정희 정부를 담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박 전 대표 역시 직간접적으로 주요 소재가 되곤 했다. 그 때마다 이러저러한 논란에 시달려왔기 때문인지 박 전 대표는 자신의 캐릭터가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것에 대해 다소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이환경 작가가 드라마 <영웅시대>를 집필할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박 전 대표에게 면담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당시 만남은 박 전 대표 측의 ‘거절’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박근혜 전 대표는 요즘 KBS 2TV의 외화 시리즈 <커맨더 인 치프>를 즐겨보고 있다고 한다. 이 드라마는 미국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소재로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웅시대>는 현재 박근혜 전 대표와 한나라당 내에서 대권 경쟁을 하고 있는 이명박 전 시장을 미화했다는 논란에 시달렸다. 특히 이명박 전 시장을 모델로 한 ‘박대철’이 학생시절 투옥되는 과정과 군 면제 사실을 다룬 부분은 실제와 판이하게 다르거나 불필요한 장면이어서 논란을 더욱 부추겼다. 이 때문에 극중에서 ‘박대철’ 역을 맡았던 유동근은 애꿎은 비난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결국 <영웅시대>는 ‘이명박 미화 논란’에 시달린 끝에 조기종영 되는 상황을 맞아야 했다. 실체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이명박 전 시장을 ‘견제’하는 정치권 외압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당시 이환경 작가가 인터뷰를 통해 밝힌 “정치권 차세대 주자를 다룰 때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이니 주의하라는 얘기를 수차례 들었다”는 말은 드라마 한 편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치인들의 또 다른 모습을 대변한다. 이명박 전 시장은 <영웅시대>의 조기종영에 대해 서운함을 드러냈다.
한편 현재 방영중인 사극 <연개소문>의 원작소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열렬한 애독자였다고 한다. 원작 ‘연개소문’은 1975년부터 3년 동안 신문에 연재돼 선풍적 인기를 끈 바 있다.
여러 정치인들이 드라마를 즐기는 이유가 있다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을 넘어서 ‘현실을 미화’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