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회에서 만난 비박계 중진 의원은 정진석 신임 원내대표의 최근 행보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어느 노래의 제목처럼 정 원내대표가 ‘친박인 듯 친박 아닌 친박 같은’ 느낌이라는 말이다. 그는 “지역안배를 했다지만 원내부대표단 인선도 그렇고. 계속 미적거리면서 결국 자신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그 산하에 혁신위원회를 둔다니…. 꼭 어디서 한 번 본 듯한 느낌이지 않아?”라고도 했다. 최근 일부 언론에서 지적한 정 원내대표 뒤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논란에 대해서도 “자꾸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보이지 않는 손이 누군지 다 알게 될 것 같다”고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중립 성향을 어필하면서도 ‘총선 친박 책임론’을 차단하는 등 친박 성향을 보이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일단 원내부대표단 인선부터 보자. 정 원내대표는 부산의 김도읍 의원을 원내수석부대표로 앉혔고, 오신환(서울 관악을) 강석진(경남 산청함양거창합천) 권석창(충북 제천단양) 김성원(경기 동두천연천) 성일종(충남 서산태안) 이만희(경북 영천청도) 이양수(강원 속초고성양양) 정태옥(대구 북갑) 최연혜(비례대표) 당선자를 원내부대표단에 선임했다. 민경욱(인천 연수을) 김명연(경기 안산단원갑) 김정재(경북 포항북)는 원내대변인으로 활동한다.
그러면 이들은 왜 친박계 색채가 강하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을까. 우선 강석진 당선자는 친박계 핵심실세인 최경환 의원이 19대 국회에서 원내대표일 때 그 비서실장을 지낸 측근 중 측근이다. 지난 공천정국에서 신성범 의원과 맞붙었을 때 그가 공천을 받는데 최 의원 힘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될 정도였다.
이만희 당선자는 최 의원 지역구를 승계한 후임자다. 최 의원의 원래 지역구는 경북 경산청도였지만 인구 상한을 넘겨 청도가 인근 영천과 붙었고 경산은 단일 선거구가 됐다. 게다가 청도는 최 의원 고향으로 이 당선자가 정치활동을 하려면 최 의원의 도움 없이는 사실상 어려운 곳이다.
민경욱 당선자는 박근혜정부의 청와대 대변인 출신으로 흔히 말하는 ‘진실한 사람들’의 핵심 후보였다. 친박계와의 교감이 좋을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계파색이 강한 당선자가 원내수석대변인이 된 것을 두고 말들이 많다. 민 당선자는 선거운동과정에서 ‘진박 감별사’ 역할을 했던 최 의원에게 자신의 선거사무소 개소식에 꼭 와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대구 행정부시장 출신인 정태옥 당선자와 김정재 당선자도 TK에서 최 의원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최경환의 사람들’이 대거 원내부대표단에 소속돼 활동하게 된 것이다.
당선자들로부터 설문조사를 받고 3선 이상 중진 의원들로부터도 일종의 결재(?)까지 받았다지만 정진석 원내대표 자신이 전당대회를 준비하는 ‘관리형’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그 산하에 당의 쇄신안을 마련할 혁신위를 두기로 한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거세다.
일단 전당대회 개최시기 문제를 정 원내대표가 지휘하게 되는 것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나온다. 총선 참패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않은 친박계는 7월 전당대회 시기를 최대한 미뤄 책임론이 좀 희석되면 친박계 대표주자를 내세워 친정체제를 구축할 심산이었다. 당장 정 원내대표가 전당대회를 “정기국회 시작 전인 8월에 열자”고 하자 비박계에선 “이렇게 한 달씩 한 달씩 미뤄지는 것 아니냐”고 발끈하고 있다.
총선 참패 원인을 분석하고 정권재창출을 위한 쇄신안을 망라할 임무를 띤 혁신위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실패를 목도했던 2년 전의 보수혁신특별위원회(위원장 김문수)와 “다를 게 없다(중립 성향의 당 고위 당직자)”고 비꼬는 목소리가 높다. 이 당직자는 “사실 당의 쇄신안은 지난 보수혁신위에서 다 나왔다. 일부는 관련 법과 당헌·당규에 반영됐지만 대부분은 사장된 것 아니냐”면서 “이미 나와 있는 답에 몇 가지 덧붙일 것이어서 혁신위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고, 그래서 혁신위원장으로 거론되는 다수도 안 하겠다며 손사래를 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혁신위원회가 과거 보수혁신위의 아류로 당이 들썩들썩할 혁신안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는 게 이 당직자의 전언이다.
그래서 정진석 원내대표가 친박계의 아바타가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정 원내대표는 사실상 친박계의 결집을 통해 선출된 원내 지도자다. 친박계가 자파에 유리하지 않다면 정 원내대표를 지지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줄곧 자신이 중립 성향임을 어필해 왔다. 경선 당시에는 주요 언론사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본인을 ‘중립 성향’으로 분류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친박계는 자파에 우호적인 정 원내대표를 밀면서 계파색이 짙은 유기준 후보를 쳐내는(유 후보는 7표를 받았다) 모습을 연출했다. 하지만 정 원내대표가 친박계 성향이 강하다는 것은 정치권 호사가들 사이에선 다 아는 얘기다. 부친은 박정희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장을 지냈고, 그 역시도 이명박정부에서 박근혜 당시 의원 몫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아무리 본인이 친박이 아니라고 부인해도 ‘친박인 듯 친박 같은’ 퍼즐 맞추기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원내대표 경선 당시에 비박계 후보로 나선 나경원 의원도 “이번 원내대표 경선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결과가 나오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정책위의장 후보로 거론된 TK의 김광림 의원이 정진석의 손을 잡을 것이냐, 나경원과 갈 것이냐를 두고 최경환 의원과 상의한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친박계도 향후 당내 권력지형을 자파에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한 정지작업에 나서고 있다. 당장 17일 친박계 맏형격인 서청원 의원이 친박계 중진 의원들과의 대대적인 오찬 계획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친박계 의원은 “서 의원이 국회의장에 욕심을 내고 있기 때문에 관련 이야기를 할 것도 같은데 해당 자리에서 친박계가 앞으로 어떻게 가야하는지 행동강령 등에 대한 이야기도 오가지 않겠느냐”며 ‘사실상 총선 이후 친박계가 이렇게 모이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 자리에 최경환 의원이 나오느냐를 두고 사실 확인에 나서기도 했다. 자신의 지역구에서 자숙모드였던 최 의원이 등장한다면 친박계가 기지개를 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최근 정진석 원내대표의 발언 내용이 심상치 않다. 정 원내대표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에 “가소롭다. 가소로운 이야기”라며 불쾌감을 드러내더니 “새누리당에 소위 친박이 70~80명 있을텐데 그 사람들이 다 (총선 참패에) 무슨 책임이 있나. 친박에서 지도급에 있던 사람들은 책임이 있는지는 몰라도, (단순히) 이른바 친박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무슨 책임이 있느냐”고 두둔했다.
또 정 원내대표는 친박이 당권을 잡기 위해 전당대회에 나오면 안 된다는 기류가 있다는 지적에는 “친박계 전체를 책임론으로 등식화하는 건 동의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정 원내대표의 이런 발언에 대해 비박계에선 “친박계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자꾸 조성된다면 당이 쪼개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냐“며 벼르는 모양새다. 정 원내대표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형국이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