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최근 여권의 내홍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총선 후 정중동 행보를 보이던 친박계는 원내대표 경선을 계기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진석 원내대표 당선 역시 친박의 지원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정 원내대표가 혁신위원장과 비대위원 인사 등에서 비박을 중용하자 친박은 전국위를 무산시키는 등 ‘실력 행사’에 나섰다. 다음은 한 친박 중진 의원의 귀띔이다.
“총선이 끝나고 우리의 목표는 당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공천을 밀어붙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과반에 실패해 정계개편이 불가피한데,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내부를 확실히 다져놔야 한다는 판단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밀어준 정 원내대표가 자기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다. 두고 볼 수 없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당권은 물론 대선까지 힘들어진다.”
친박계의 이러한 스탠스 중심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자리 잡고 있다. 올해 12월 임기가 끝나는 반 총장을 대선 주자로 내세우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게 친박 핵심부 복안이라는 얘기다. 앞서의 친박 중진 의원은 “총선에 진 후 대선에 대한 위기감이 더 커졌다. 영남과 충청이 손을 잡아야 대선에서 필승할 수 있다고 봤다. 영남이 당권을 접수해 충청권 대선 후보(반 총장)를 뒷받침해야한다는 논리”라고 말했다.
안철수 대표가 이끄는 국민의당과의 연대설 역시 여기에서 비롯됐다. 영남과 충청 외에 호남표까지 가져올 수 있다면 대선에서 필승할 것이란 계산이다. 또 반 총장 외에 안철수라는 대선 후보를 안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한다. 실제로 일부 친박 인사들은 이런 시나리오를 전제로 안 대표 측과 접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안 대표는 5월 18일 “새누리당과의 연대는 없다”고 일축했다. 어찌됐건 국민의당과의 연대 역시 그 기저엔 ‘충청대망론’이 있었던 셈이다.
이처럼 친박 핵심부가 ‘반기문 대권 프로젝트’를 위한 본격적인 채비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박 대통령은 충북 출신의 이원종 실장을 발탁했다. 이번 인사가 ‘남다른’ 주목을 받았던 것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반 총장과의 연결 고리 때문이다. 이 실장이 친박 핵심부와 반 총장 간 ‘메신저’ 역할을 할 것이란 추측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충청 출신인 둘은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 대통령 대선캠프 출신의 한 원로 인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원종 신임 실장은 여러 번 총리나 비서실장 후보로 오르내리긴 했지만 이번 인사는 이례적이라는 반응이다. 박 대통령이 현 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은 측근을 발탁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박이라고 할 수 없는 이 실장을 골랐다. 박 대통령이 충청을 머릿속에 넣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곧 이 실장이 반 총장과 관련해 대선에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실장이 청와대로 입성하면서 당청 핵심 포스트는 충청권 인사가 맡게 됐다. 당을 이끄는 정진석 원내대표는 충남 공주 출신이다. 정치권의 대표적인 ‘마당발’로 꼽히는 정 원내대표도 반 총장 차기 행보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란 게 정가의 전망이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그동안 설로만 돌던 반기문 대망론이 정 원내대표 당선에 이어 이 실장 임명으로 점점 구체화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 와중에 반 총장 역시 의미심장한 발언을 내놔 비상한 관심을 끈다. 반 총장은 얼마 전 한 만찬장에서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한 질문에 “아직 7개월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제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많이 좀 도와주셨으면 고맙겠다”라고 애매모호한 답을 내놨다. 이에 대해 정치 전문가들은 사실상 대권 출마 뜻이 담긴 발언이라고 이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동안 친박 핵심부에선 몇몇 의원들이 반 총장 영입에 공을 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청원·윤상현 의원이 대표적이다. 특히 지난 1월 충청포럼 회장에 취임한 윤 의원의 경우 반기문 대망론에 불을 지핀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앞서의 박근혜 캠프 원로 인사는 흥미로운 말을 들려줬다.
“충청대망론의 밑그림을 그리고 또 반 총장 영입에 관여하고 있는 친박 인사는 따로 있다. 바로 박 대통령 자문 그룹에 속해 있는 A 씨다. A 씨가 충청대망론의 설계자인 셈이다. 역시 충청 출신인 A 씨는 그동안 박 대통령에게 정권 재창출을 위해선 충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또 반 총장이 그 적임자라고도 했다. 윤상현 의원 등이 움직이게 된 것도 A 씨가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