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훈 전 민노당 중앙위원이 중국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혐의로 지난 26일 구속수감됐다. 이번 사건의 파장은 386 정치인들에게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 | ||
사건에 관련된 민노당이나 일부 과거 운동권 정치인들로부터는 신공안 정국을 조성하고 있다며 반발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고 국정원장의 교체와 관련해서도 이 사건과의 관련설이 나오는 등 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고 있지만 공안당국은 사건의 규모가 예상외로 클 것임을 시사하고 있어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전망이다.
국가정보원(국정원)과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26일 민주노동당 전 중앙위원 이정훈 씨(43)와 재미교포 장민호 씨(44·미국명 마이클 장), 386 운동권 출신 손정목 씨(42) 등 3명을 국가보안법상 회합 통신 등의 혐의로 전격 구속했다. 또 민노당 최기영 사무부총장(41)과 정보통신업계 종사자 이진강 씨(42) 등에 대해서도 27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특히 공안당국은 이들의 자택 및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당직자와 여당 의원 보좌관, 시민단체 관계자 등의 이름이 적힌 메모 등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메모에 적힌 인사들의 연루 여부에 따라서는 참여 정부 최대의 공안 사건으로 화할 가능성마저 커지고 있다.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은 중국에서 북한 공작원을 접촉한 혐의로 지난 26일 구속된 장 씨다. 장씨는 81학번으로 성균관대에 입학했지만 중퇴하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대학 교육을 받았으며 한국에 들어와 주로 대학가와 정보통신 업계 등에서 활동했고 80년대 말과 90년대 후반 세 차례에 걸쳐 북한을 드나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그는 북한 체재 중 충성 서약을 하고 북한 노동당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대외연락부의 직접 지휘를 받으며 20여 년간 한국에서 고정 간첩으로 활동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장 씨는 운동권 출신들을 포섭, ‘김정일 위원장을 한마음으로 모신다’는 뜻의 ‘일심회’라는 비밀조직까지 만든 것으로 당국은 밝히고 있다. 공안당국은 장 씨가 구속된 이 전 중앙위원과 사업가 손 씨 등을 중국에서 북한 공작원들과 연결해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은 장 씨의 구속영장에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간첩 행위는 나타나지 않았다며 압수된 서류 등을 통해 실제 국가 기밀 등을 북한에 전달했는지를 밝히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공안당국이 가장 관심을 표시하는 것은 장 씨가 386 운동권 출신 인사들에 접촉한 부분이다. 실제로 공안당국이 구속된 장 씨의 자택 및 사무실 압수수색 과정에서 발견된 메모장에는 정치권과 시민단체 관계자, 재야인사 등 6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그 밖에도 그가 그동안 친하게 접촉해온 인사들이 사회 각계 각층에 상당수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이번 사건이 386 정치권과 재야 운동권 쪽으로 불똥이 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메모에 적시된 인사들이 장 씨와 어떤 관계인지 또 장 씨의 간첩 의혹 활동에 직접 관여가 돼 있는지 여부 등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공안당국은 메모 내용에 비춰볼 때 장 씨가 국내 정치권 및 재야 운동권 출신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해 왔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추정하면서 메모에 등장한 인사들의 이적 행위 여부를 철저히 조사한다는 방침이다.
일부에서는 국정원의 이번 간첩단 수사가 386 운동권 출신을 겨냥하고 있는 것에 주목, 신공안 정국을 조성하려는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국정원은 현재 이 사건 외에도 3~4건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을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져 당분간 간첩단 사건 파문이 가라앉지는 않을 전망이다.
이처럼 공안당국의 칼날이 386 정치권 및 재야 운동권을 겨냥할 수밖에 없어 민노당을 중심으로 한 386세대 정치권과 재야 운동권은 바짝 긴장하고 있는 분위기다. 민노당은 27일 전·현직 당직자들이 간첩 혐의로 체포 또는 구속된 것과 관련해 ‘노무현판 공안사건’ 등의 원색적 표현을 동원하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민노당은 이날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긴급 최고위원 의원단 연석회의를 열어 이해삼 최고위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책기구를 구성하고 진상 파악과 함께 법적 대응을 포함한 강력한 대책을 강구키로 했다. 이 최고위원은 “이 사건은 사실상 최근에 외교안보라인을 교체하는 가운데서 국정원 내부 힘의 역관계에 의해서 진행되는 국정원 내 공작”이라며 “내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집권을 기정사실화 한 국정원 내 공안 세력들이 최근 각종 사건들을 기획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열린우리당 우상호 대변인도 27일 국회에서 현안 브리핑을 갖고 여권 내 386 인사들이 개입했다는 일부 의혹과 관련해 “내부적으로 확인한 결과 이번 간첩단 사건이 여권 386들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내려 우리당은 크게 걱정하는 분위기가 아니다”고 밝혔다. 우 대변인은 “이전에 학생운동을 하던 중 면식이 있지만 이후 살아온 길이 달라 여권 인사들이 이번 사건에 조직적으로 연루됐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 결론”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검찰 및 공안당국의 철저한 수사와 관련자 문책을 촉구하고 있다. 나경원 대변인은 27일 “간첩단 사건 관련자 2명은 사실상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생활비가 지급된다고 하는데 결국 간첩에 공작금을 대준 꼴”이라며 “경위를 철저히 조사하고 관련자는 문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번 사건이 정치권에까지 파장을 미칠지 여부다. 정치권과 공안당국 일각에서는 여권 386세대 정치인 일부가 이번 사건에 연루돼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국정원도 장 씨가 국내에서 386 학생운동권 출신의 일부 정치인과 자주 만났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들의 연루 의혹을 파헤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국정원은 고려대 삼민투위원장 출신인 이 씨가 장 씨에게 포섭된 곳이 열린우리당 386 운동권 출신 정치인 A 씨의 개인 사무실이었다고 밝힌바 있다. 이런 가운데 민노당 간첩단 사건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인 이해삼 최고위원은 27일 “최근 간첩혐의로 구속된 이정훈 전 중앙위원과 사건 주범으로 발표된 장민호 씨가 열린우리당 허인회 씨 소개로 만났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국정원이 밝힌 A 씨가 허 씨임을 시사했다. 이 최고위원은 이날 모 라디오 시사 프로에 출연해 “이 분(장민호 씨)은 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열린우리당의 허인회 씨 소개로 사업하는 사람(이정훈 씨)을 만나 논의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이들 사이에 자세한 내용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허 씨는 이를 강력히 부인했지만 간첩단 사건이 불거진 후 열린우리당 386 정치인의 실명이 언론에서 구체적으로 거론되기는 처음이어서 정치권을 긴장시키고 있다. 허 씨는 지난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서울 동대문을)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현재는 열린우리당 전국청년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정원이 현재 수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일심회’의 실체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범 격인 장 씨가 1997년부터 조직해 온 것으로 알려진 ‘일심회’에는 이미 구속된 이정훈 손정목 최기영 씨 등도 가입한 것으로 국정원은 보고 있으며 장 씨가 접촉해 온 인물이 최대 20명 선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이들도 ‘일심회’에 가입했는지 여부를 캐고 있다.
이처럼 공안당국의 수사 초점이 정치권으로 서서히 옮겨짐에 따라 여의도 정가는 긴장 속에서 수사 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상태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