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린우리당 비상대책위원회 회의 장면. 10·25 재보선에서도 전패함으로써 여당발 정계개편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이 중량급 인사들을 정무특보단에 임명해 이들의 역할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 ||
중진과 초재선 의원 등 당내 제 세력들이 연일 회동을 갖고 정계개편과 관련한 의견 조율에 나서고 있는 만큼 국정감사가 끝나는 이번 주말을 기점으로 정치권 새판짜기 움직임은 본격화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여기에 북핵 해법을 둘러싼 노무현 대통령과 여권 내 차기주자들이 적잖은 견해차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도 여권 분화를 촉발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시기와 방법, 명분이 문제이지 여권발 정계개편 신호탄은 이미 울린 것이나 다름없다는 분석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 최근 노 대통령이 이해찬 전 총리, 문재인 전 민정수석,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 오영교 전 행자부 장관 등 중량급 인사들을 정무특보 또는 정책특보로 발령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들이 정계개편과정에서 노 대통령의 전위부대로서 모종의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긴장하고 있다.
10·25 재보선 다음날(26일) 오전에 열린 열린우리당 비상대책위 회의실은 침통한 분위기 그 자체였다. 김근태(GT) 의장은 “국민의 심판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고개를 떨구었고 김한길 원내대표는 “이러한 말마저 국민에게 상투적으로 들리게 된 상황이 아프다”고 말했다.
현 체제로는 더 이상 집권당으로서의 위상도 정권재창출 가능성도 희박하다는 데 공감했던 탓일까. 화두는 자연스럽게 정계개편론으로 이어졌다.
GT는 “열린우리당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평화수호세력 대결집을 추진하겠다”며 정계개편론에 불씨를 지폈다. 그동안 수면 아래서 꿈틀거리던 여당발 정계개편론이 당 공식회의에서 공론화된 셈이다.
이목희 전략기획위원장도 재보선 당일(25일) 밤 전패가 확정되자 기자들에게 “재창당을 위한 실천 프로그램을 곧 제시하고 중도개혁세력 통합에 나서겠다”고 언급해 정계개편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음을 시사했다. 따라서 당초 정기국회가 끝나는 연말을 전후로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됐던 정치권 새판짜기 움직임은 당장 국정감사 이후(1일)라도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6일 비대위 회의 이후 중진과 초재선 등 제 계파들은 회동을 갖고 해법 모색 및 정계개편과 관련한 의견 조율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분위기다.
문희상 전 의장과 유인태 의원 등 당내 중진의원 모임인 ‘광장 모임’은 26일 밤 긴급 회합을 갖고 “국감이 진행 중인 만큼 당의 진로 논의는 자제하면서 당의 단합과 결속이 중요한 때”라고 의견을 모은 것으로 한 참석자는 전했다. 또 중도개혁 성향의 초선 의원 모임인 ‘처음처럼’도 회동을 통해 내년 2월로 예정된 전당대회를 앞당겨야 한다는 이른바 ‘조기전대론’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조기전대론 및 정계개편 방법론과 관련해서는 제 계파의 견해차가 커 논의 과정에서 갈등과 충돌 등 적잖은 산통을 예고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계개편 과정에서 제 계파가 끝내 중지를 모으지 못할 경우 공중분해 등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여권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정계개편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당을 재정비한 후 범여권 세력을 통합해야 한다는 ‘리모델링’론이고 또 하나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당을 해체한 후 민주·중도·개혁세력을 아우르는 통합신당을 창당해야 한다는 ‘헤쳐모여식 통합신당’론이 그것이다.
▲ 김근태(왼쪽), 정동영 | ||
조기 전대론을 주장하고 있는 ‘처음처럼’ 회원(23명)들은 26일 기자회견을 통해 “내년 2월로 예정된 전당대회를 늦어도 1월까지 앞당길 것을 촉구한다. 비대위(현 지도부)는 전당대회까지 비상한 각오로 소임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며 당 재정비 후 열린우리당 중심의 범여권 통합론을 제기했다.
친노그룹 모임인 참여정치실천연대(참정연) 대표를 맡고 있는 김형주 의원은 “전대에 대한 성격 규정, 정계개편의 세부적 문제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지금은 ‘처음처럼’이 제시한 방향으로 간다고 보면 된다”고 말해 리모델링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청와대와 노 대통령의 입장은 보다 완고하다. 노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하는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26일 “(노 대통령은) 지난 88년 이래로 정치활동을 해오면서 지역구도에 맞서 싸웠기 때문에 정치권 재편 논의가 지역 분할구도를 강화하는 쪽으로 가는 것은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해 정계개편과 관련한 노심(盧心)은 ‘리모델링’론에 가까이 가 있음을 시사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공식 비공식 자리에서 ‘열린우리당 사수’ 입장을 천명한 바 있고 친노 직계 세력들은 10여 명이 남더라도 열린우리당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있다. 따라서 노 대통령과 친노세력들은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지역구도 타파’에 동조하는 범여권 세력을 끌어안는 리모델링으로 정계개편 방향을 잡아갈 것으로 관측된다.
통합신당론을 주장하는 세력들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호남권 의원들의 좌장격으로 당내 대표적인 통합론자인 염동연 의원은 “재창당론은 당을 먼저 정비하고 통합도 여당 중심으로 하겠다는 것인데 아직도 현실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얘기”라며 당 해체 후 범여권 통합신당론을 주장하고 있다.
탈계파 성격의 초선 모임인 ‘국민의 길’ 간사인 전병헌 의원도 “재창당은 호박에 줄을 긋는 것이고 조기 전대는 호박껍질을 두껍게 하려는 것일 뿐”이라며 리모델링론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하고 있다.
범여권 대권주자로 분류되고 있는 고건 전 총리 역시 “여권 내에서 논의되고 있는 중도통합 신당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며 ‘헤쳐모여식 신당론’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귀국후 정치활동 재개 명분을 찾고 있는 DY의 선택도 관심사다. DY는 재보선 이전에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열린우리당 창당은 시대정신을 담고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며 ‘열린우리당 실패론’을 거론해 친노세력들의 거센 반발을 유발시켰다. 또 북핵 해법과 관련해서는 “대북 포용정책 근간을 흔들어선 안된다”며 노 대통령과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 재검토’ 입장과 다소 상반된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열린우리당과 노 대통령의 노선에 일정 거리를 두면서 본궤도에 진입하고 있는 정계개편론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복심이 깔려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 DY계인 한 초선의원은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DY가 다시 여권으로 들어가 약화된 대권입지를 만회한다는 것은 여러 정황상 불가능한 만큼 당 해체를 전제로 한 범여권 통합론에 동조하면서 자신의 역할과 대망론을 펼쳐나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분석가들도 대선정국 막판에 이뤄진 후보 간 극적인 연대 및 극대화된 시너지 효과를 등에 업고 대권을 거머쥔 과거 대선 사례에 비춰볼 때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여권의 ‘위장이혼’설이 현실화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보고 있다.
북핵 해법을 둘러싼 노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대치상황도 여권 분열과 정계개편을 촉발시키는 화약고로 자리 잡고 있다. 북핵사태 이후 다시 갈등국면으로 접어든 두 사람의 앙금이 깊어질수록 범여권 지지세력도 양분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DJ는 “민주당 분당이 여당 비극의 씨앗”이라며 노 대통령에 직격탄을 날리는가 하면 최근 전국을 돌며 햇볕정책 당위성 및 정당성을 설파할 계획을 잡아놓고 있다. 특히 여권 내 차기주자들이 DJ의 언행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며 ‘탈 노무현’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GT는 청와대와 정부가 북한 핵실험에 따른 대응조치로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 참여 입장을 밝히자 ‘PSI 불가’ 원칙을 천명하는 동시에 지난 20일에는 당내 논란에도 불구하고 개성공단 방문을 강행하는 등 나름대로 ‘강단있는’ 대북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개성공단 춤판 소동’은 또다른 정치이슈로 등장, 입지를 흔들고 있다.
DY 역시 북핵 해법과 관련해서는 ‘DJ 노선’에 동조하는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고, 친노파로 분류되고 있는 천정배 의원도 “북한의 핵실험 사태를 불러온 것은 포용정책 때문이 아니라 참여정부 대북정책의 일관성 부족 때문”이라며 노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분위기다.
당초 ‘대북 제재 공조’를 주장하며 ‘DJ 노선’과 다소 상반된 입장을 보였던 한화갑 민주당 대표 역시 호남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며칠 후 ‘햇볕정책 기조 강화’로 급선회했다.
범 여권주자 중 유일하게 고 전 총리만이 ‘DJ 노선’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만 그가 언제까지 자신의 대북관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실제로 고 전 총리는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차별화 차원에서 “온정적인 대북정책을 원점에서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나 호남 민심이 들썩이자 대북정책과 관련한 언급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이 같은 대권주자들의 입장차는 ‘탈 노무현’을 기치로 참여정부와의 차별화 및 호남 민심을 끌어안고자 하는 범여권 잠룡들의 대권전략이 내포돼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여권 내 잠룡들은 북핵사태와 관련한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자신들의 노선을 조율할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입장 조율이 장차 자연스럽게 정계개편의 방향과 맞물리면서 여권 분열을 촉발하는 뇌관으로 작용할 것이란 분석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