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0년간 이들 3김은 YS를 중심으로 한 영남권과 DJ를 정점으로 한 호남권, JP가 이끌었던 충청권 등이 3각 편대를 형성하며 상호 경쟁과 전략적 연대를 통해 권력을 주거니 받거니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역패권주의는 우리 정치의 후진성과 갈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이러한 지역 패권주의가 그들을 정치적 격변에서도 보호하고 성장시켜 대권으로의 길도 가능케 했다고 할 수 있다.
40여 년간 한국 정치사를 이끌어 왔던 ‘3김 정치’는 200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퇴임과 2004년 총선에서 낙선한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정계 은퇴로 사실상 종식됐다. 하지만 3김이 물러난 이후 3각 편대를 이끌어 갈 확실한 지역맹주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각 지역은 현재 주인 없는 무주공산인 셈이다. 따라서 지금 여야 잠룡들과 차세대 정치인들은 지역맹주 자리를 놓고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특히 여야 차기주자 진영에서는 “지역맹주를 놓치면 더 이상의 대권도 없다”는 위기감으로 대권 전초전을 방불케 하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과연 누가 ‘포스트 3김’의 각 지역 맹주로 등장할 것인지 영·호남과 충청권 등 지역패권을 놓고 서바이벌 경쟁에 돌입한 여야 차기주자 및 차세대 정치인들의 각축전을 살펴본다.
호남권
DJ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호남권은 여권 차기주자들의 치열한 각축장으로 화했다. 범여권 주자로 분류되고 있는 고건 전 총리, 열린우리당 유력후보군인 정동영 전 의장과 천정배 의원, 민주당 부활과 함께 차기 대선에서 킹메이커 역을 기대하고 있는 한화갑 대표 등이 호남 맹주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
지난 5·31 지방선거 당시 열린우리당 당 의장이었던 정 전 의장과 고 전 총리의 호남구애 경쟁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미 대권행보를 걷기 시작한 두 사람이 처음으로 충돌한 전북지사 선거에서 호남민심 잡기 경쟁을 펼쳤던 것. 선거에서 정 전 의장이 전북 지사 자리를 지켜 겨우 체면은 유지했다. 그러나 전남과 광주에서는 민주당에 패하고 당권을 내놓는 계기가 됨으로써 사실상 승자를 가리지는 못했다.
열린우리당 창당주역이자 정치적 동지관계인 정 전 의장과 천정배 의원 진영 간에도 미묘한 긴장감이 조성되고 있다. 정 전 의장이 5·31 지방선거 완패에 따른 책임론에 휩싸여 백의종군하고 있는 상황에서 천 의원이 당에 복귀해 본격적인 대권레이스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남 신안 출신인 한화갑 대표는 DJ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이후 줄곧 동교동계와 정치역정을 함께 했다는 점을 들어 DJ 적자론으로 맞서고 있다. 당 분열과 탄핵사태, 2004년 총선을 거치면서 군소정당으로 전락할 때까지만 해도 가망이 없어보이던 한 대표의 영향력은 지난 5·31 지방선거를 계기로 전남을 넘어 전북으로 넘어드는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현재 각종 여론조사를 놓고 볼 때 호남에서의 지지도가 가장 높은 대권주자는 고건 전 총리다. <일요신문>이 지난 9월 말 리얼미터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에서도 고 전 총리는 광주 전남에서 47.1%, 전북에서 38.5%로 단연 1위다. 반면 정 전 의장은 전북에서 12.0%로 체면을 세우고 있지만 광주 전남에서는 2.9%로 오히려 김근태 의장보다 낮다. 최근 고 전 총리의 전반적인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호남에서의 지지율은 높아지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에도 불구하고 고 전 총리가 호남의 맹주로 DJ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우선 고 전 총리는 선친의 고향이 전북 옥구로 전북 인사로 분류되고 있지만 서울 출신이기 때문에 뚜렷한 지역적 기반이 부족해 대선 과정의 추이에 따라 호남 민심도 출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계에서는 오히려 장기적으로 볼 때 잠재적인 호남 맹주 후보로 한 민주당 대표, 정 전 의장이 더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이가 많다. 한 대표는 전남 일대에 확실한 지분을 갖고 있으며 고향이 전북 순창인 정 전 의장도 전북 일대에 일정 지분을 갖고 있어 대선과정에서는 물론 대선 이후에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 회복을 꾀할 기반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당분간 전남 북을 분할할 가능성을 높게보는 이들이 많다.
이처럼 호남 빅3의 접전 속에서 천정배 의원의 움직임을 주목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천 의원은 수도권(경기 안산단원 갑)이 지역구지만 전남 신안 출신으로 최근 통합신당론을 내세우며 호남 쪽으로 자주 발길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어떤 양상이 펼쳐지든 호남지역에서 과거 DJ 만큼의 절대강자가 나타나기는 힘들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계 소식통들은 당분간 전남과 전북이 나눠지고 다시 일정 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지역 패권다툼 양상으로 ‘포스트 DJ’ 경쟁이 전개될 것으로 보고 있다.
▲ (왼쪽부터) 심대평, 이인제, 이완구, 정우택 | ||
충청권은 JP가 40여 년간 지역 맹주자리를 지켜온 지역이다. ‘영원한 2인자’로 통했던 JP가 오랜 세월 세상이 몇 번씩이나 변하는 가운데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충청’이라는 든든한 지역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원한 권력은 없다”는 속설을 대변하듯 JP는 지난 2004년 총선 때 낙마하면서 정치권을 떠났다. JP가 떠나자마자 ‘포스트 JP’를 노리는 지역맹주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포스트 JP’ 경쟁 중심은 심대평 국민중심당(국중당) 대표와 이인제 최고위원이었다.
지난 2월 10여 년간 충청권을 대변해 왔던 자민련이 해체되고 대신 국중당이 새로운 충청권 대변자로 나섰지만 그 행로는 험했다. 새로운 지역맹주를 기치로 5·31 지방선거 때 후보자를 대거 내세웠지만 목표치에 크게 못 미치면서 출항부터 내홍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심 대표가 당무에서 손을 뗐고, 중앙당은 대표권한정지가처분신청을 내는가 하면 지난 9월 13일에는 서울시당이 자진 해산됐다. 여기에 충청권 맹주를 노리고 있는 이인제 최고위원의 탈당설 및 신당 창당설이 나돌면서 극도로 혼란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이 같은 내우와 함께 외환도 겹친 상태가. 행정수도를 내세우며 열린우리당이 충청지역을 파고들고 반노무현 정서를 들고 한나라당이 몰려들며 충청지역은 사실상 JP 은퇴 이후 독자적인 세력권으로서의 역할이 사라진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돌기 까지 한다.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충청지역 내 국중당의 지지율이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보다 훨씬 못 미쳤다는 사실은 이를 대변하고 있다. 충청권이 대통령 선거의 캐스팅보드를 쥐고 있지만 충청민심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세력은 이미 존재하기 힘들다는 평가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소속 일부 정치인들이 차세대 충청지역 맹주 경합에 적극 뛰어들고 있는 것도 이런 현상 때문이다. 지난 5·31 지방선거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이완구 충남지사와 정우택 충북지사 모두 자민련 출신으로 충청권에선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에선 경제부총리를 역임한 홍재형 의원이 행정수도 이전 계획으로 탄력을 받고 있는 충남지역 민심을 담보로 꿈을 키우고 있다.
JP 이후 충청권은 지금 내분과 외침으로 분할의 위기를 맞은 가운데 당분간 군웅할거 시대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영남권은 전통적으로 한나라당의 텃밭이다. 박정희 정권이후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에 이르기까지 영남권은 권력의 단맛을 장기간에 걸쳐 즐겼던 지역이다. 2002년 대선 때 이 지역 민심이 경남 김해 출신인 노무현 민주당 후보 대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영남권 민심 추이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영남 지역은 한나라당의 텃밭이기 때문에 이 지역의 싸움은 예선전의 사활을 가를 중요한 지역이다. 결국 당내 경선에서 맞대결이 불가피한 두 사람 입장에서는 당내 기반 및 정치적 버팀목인 영남권 민심의 향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이 지역의 맹주 싸움에서 밀린다면 대권의 꿈도 접어야 하는 위기상황에 봉착할 수 있다.
따라서 영남권 맹주자리를 놓고 한나라당내 유력인사들의 경쟁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 대권주자 ‘빅2’로 자리매김한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간의 맹주 싸움은 대권 전초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박 전 대표는 대구가 고향이고 이 전 시장은 경북 포항 출신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남지역의 패자는 과거의 정치적 유산에 힘입고 있는 박 전 대표였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전국적으로는 이 전 시장이 박 전 대표를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날 때도 영남 지역에서만은 박 전 대표가 우위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의 영남권 공략도 만만치 않다.
<내일신문>과 한길리서치가 공동으로 지난 9월 14~15일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이 전 시장의 대구·경북지역 지지율이 37.4%로 박 전 대표의 28.9%에 앞선 이래 업치락뒤치락 하고 있다. 이에 고무된 이 전 시장은 내친 김에 영남권의 맹주 자리를 굳힌다는 전략이다.
경북 의성이 고향인 강재섭 대표도 호시탐탐 지역맹주 자리를 노리고 있다. 강 대표는 비록 대권을 포기하고 당권을 선택했지만 차세대를 노리며 칼을 갈고 있다. 박 전 대표와 이 전 시장 중 어느 한 사람은 대권경쟁 과정에서 큰 출혈이 불가피하지만 강 대표는 차기대선을 관리하며 차분하게 정치적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여권도 이 지역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지는 않다. 친노 진영의 유력한 차기주자로 분류되고 있는 유시민 복지부 장관도 경북 경주 출신으로 영남 지역 교두보 마련의 선봉장으로 나설 가능성이 있다.
TK 지역 맹주 싸움이 한나라당 차기주자 및 차세대 인사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반면 PK(부산·경남) 지역은 여권내 유력 정치인들이 ‘포스트 YS’를 겨냥하며 물밑 행보를 걷고 있다.
일반적으로 PK는 영남의 일부로 그 정치적 성향도 전반적으로는 영남과 같이하고는 있지만 노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라는 점에서 열린우리당으로서도 나몰라라 할 수만은 없는 처지이며 또 지지세력도 적지 않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나 정부 요직에 이 지역 인사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현 정부 실세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PK 지역에서 꾸준히 힘을 키워가고 있는 여권 인사는 김혁규 의원과 김두관 전 최고위원이 대표적이다.
이정철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