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계개편 과정에서 여당의 대권주자들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일 수밖에 없다. 이들의 묘수는 뭘까. 사진은 지난 9월 말 열린우리당 확대간부회의에서 발언하는 김근태 당 의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1일 CBS와 리얼미터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열린우리당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로 인식돼 온 정동영 전 의장이나 김근태 의장의 지지율은 각각 3.5%와 1.8%로 1위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지지율(34.5%)에 10분의 1 또는 20분의 1 수준이다. 이처럼 지지율 면에서 바닥을 기고 있는 여당 대권주자들에게 정계개편이라는 회오리바람은 그마저도 날려버릴 수 있는 결정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열린우리당 차기 대권주자들에게 실지 회복의 길은 있을까. 이들 대권주자들이 정계개편 과정에서 취할 역할과 대응책을 취재했다.
열린우리당 내에서 공식적으로 정계개편의 포문을 연 사람은 천정배 의원이다. 법무부 장관을 지낸 여권의 실세인 천 의원이 나름대로 대권의 꿈을 키워 온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그러나 그동안 정 전 의장이나 김 의장에 비해 존재감이 미미해 지지율 조사에서도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천 의원이기에 차라리 행동하기가 편했을지도 모른다. 천 의원은 ‘통합신당론’을 들고 나오며 그의 존재를 비로소 과시, 정계개편의 중심에 서서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겠다는 입장이다.
천 의원은 10·25 재보선에서 여당이 참패하자 곧바로 ‘통합신당 추진’을 선언하려고 했지만 선거 직후 어수선한 분위기에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는 우려로 일주일 뒤로 미루었다. 그리고 지난달 2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목포 방문길에 동행하고 돌아온 뒤 곧바로 기자회견을 갖고 “신당 창당에 앞장서겠다”고 선언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천 의원이 DJ와의 교감 속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천 의원 측은 “신당 추진과 관련해 DJ와의 교감은 없었다. 천 의원의 독자적인 목소리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호남 민심 속을 파고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천 의원은 법무장관 퇴임 후 호남 나들이가 부쩍 늘었다. 지난 3일에도 광주지역 경총(경영자총협회)의 조찬 모임에 참석해 대통합을 위한 신당 창당을 거듭 주장했다. 천 의원은 호남에서 확실한 대표주자로 자리 매김하면서 존재감을 확실히 해나간다는 전략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에게는 약점이 있다. 불과 3년 전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개혁을 외치며 민주당에서 분당한 그가 다시 승리를 위해서 민주당과 합치자고 하는 자기모순에 빠져버린 셈이다. 이에 대해 천 의원의 한 측근은 “민주당을 포함한 대통합이 지역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다. 정치철학과 이념이 같은 세력끼리 뭉치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친노 세력의 거센 반발에 대해서도 이 측근은 “노 대통령 자신도 YS-DJ 단일화를 주장하지 않았나. 그걸 누가 지역야합이라고 비판했나. 대통합이다”라며 “국민의 신뢰를 잃은 정당을 끝까지 끌고 가는 것 또한 명분이 없잖은가”라고 반문했다.
▲ 천정배 (왼쪽), 정동영 | ||
우선 김 의장은 집권여당의 수장으로 정기국회 기간에 이런 논의가 불거진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다. 그로서는 통합신당이 자신의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단은 당의 ‘리모델링론’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그의 표면적인 반대 논리는 지금은 산적한 현안을 처리하는 데 신경을 쏟아야할 때라는 점이다. 또한 섣불리 정계개편을 건드려 뚜렷한 결론도 못 내린 채 논의가 정치공학적 이합집산으로 흐르면 국민의 신뢰를 얻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김 의장 측은 “분열 없는 통합이라는 큰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는 아직 정리된 입장이 없고 그럴 시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진지함’이 트레이드마크인 김 의장이 고민만 거듭하다 실기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있다. 이에 대해 김 의장 측은 “2004년 민주당 분당과정도 5개월이나 걸렸다. 논의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전했다. 또한 “여권의 핵심 지지세력인 호남은 언제나 전략적 선택을 해왔다.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시대정신을 제시하고 경쟁력을 갖추면 될 것”이라며 “민주당 분당 사태 당시에는 김 의장이 비주류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때가 되면 주도적으로 정계개편을 이끌고 가겠다”라고 말했다.
정동영 전 의장의 경우 정계개편 논의가 폭발하는 시점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정당 내에서도 정 전 의장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직 굳게 입을 닫고 있다.
지난달 유럽방문을 마치고 처음으로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정 전 의장은 “열린우리당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는 일단 통합신당 쪽에 발을 담근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정 전 의장의 경우도 2004년 민주당과의 분당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선뜻 통합신당을 선호하기는 어렵다. 바로 이것이 그의 침묵의 이유인 듯하다. 정 전 의장의 공보를 담당하고 있는 이재경 나라비전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계개편에 대해서 아무런 할 말이 없고 앞으로도 당분간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이다”고 전했다. 심지어 정 전 의장이 정계개편에 대해 내부적으로 함구령을 내렸다는 말도 들린다. 오히려 일부에서는 정 전 의장이 친노 세력이 주장하는 ‘조기전대론’에 대비해 조직을 정비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그는 현역 국회의원도 아니다. 그렇다고 당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아직 정 전 의장에게 정리된 입장이 없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당직자는 “정 의장도 신당과 노 대통령과의 관계 등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당분간 추이를 지켜보며 결정할 것”이라며 “다만 그의 스타일상 대세를 쫓아가는 것보다 기회가 오면 대세를 만들어가며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고 전했다.
정계개편의 과정에서 여당의 대권주자들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인 셈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손을 놓고 이 회오리바람을 그냥 쳐다 볼 리는 만무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이 그들에게는 최후의 승부처일 수 있다.
김지훈 기자 rapi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