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 대통령은 ‘하야 시사’ 발언을 통해 국정 운영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한나라당에 대한 서운한 감정과 여당의 항명에 분노를 표출한 셈이다. 최근 노 대통령은 이 같은 ‘극한 발언’과 관련해 “당적을 유지하겠다”며 한 발 물러서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지만 ‘하야 시사’ 발언의 잔영은 아직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정치권은 노 대통령이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도 달은 보지 않고 그의 손가락 끝에 또 어떤 ‘음모’가 숨어 있는지 분석하기에 바쁘다. 과연 그가 벼랑 끝 발언을 통해 얻으려는 게 무엇일까.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의 ‘하야 시사’ 발언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했던 것일까. 먼저 ‘표면적인’ 해석부터 살펴보자.
청와대 참모들은 그의 발언을 두고 “너무나 힘들다는 심정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노 대통령은 ‘식물 대통령’이 느끼는 무력감을 ‘굴복’이라고 표현하며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대통령 더 해서 무엇 하겠느냐’는 심정을 표출했다는 것이다. 또한 노 대통령은 ‘앞으로 타협하고 필요하면 굴복도 하면서 일할 테니 더 이상 흔들지 말라’는 메시지를 정치권에 던졌다는 것이다.
반면 야당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임진왜란 당시 세자인 광해군의 인기가 올라가자 선조는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15차례나 신하들을 협박했는데 대통령의 발언은 이와 다를 게 없다”며 역사적 사례를 빗대 노 대통령 발언을 ‘대 국민 협박’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해석들은 표면적인 분석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노 대통령이 보여준 ‘역발상’과 그가 과감한 승부수를 통한 대반전의 명수였다는 점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그의 ‘임기 관련’ 발언 뒤에 뾰족한 칼날이 숨겨져 있을 것으로 본다. 지지율도 오르지 않고 정권 재창출에 대한 희망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임기 문제’를 마지막 승부수로 내걸고 벼랑 끝 전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의 ‘속셈’은 과연 무엇일까.
사실 정치권에서는 현재 대권주자의 부재로 인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여권의 정계개편 파장보다 오히려 ‘한나라당 발’ 정계개편의 파급력을 더 주시하고 있다. 한 친노그룹 의원은 “진정한 정계개편의 시작은 한나라당의 분화에서 출발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근 노 대통령의 ‘임기 관련 발언’은 그동안 그가 은밀하게 추진해온 한나라당 분열 작업의 큰 흐름에 속하는 하나의 작은 전술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의 전략통 A 의원은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의 발언은 매우 치밀하게 준비된 고도의 전술적 성격을 담고 있다고 보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지난해 여름 노 대통령이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 한나라당은 내부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일부에선 대통령 제의를 심각하게 검토해보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이 대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공개적인 방법으로 제안을 했다. 만약 그가 대연정에 진정성을 보였다면 보다 은밀하게 구체적인 방법으로 한나라당에 제안을 했을 수도 있다. 결국 그 제안은 박근혜 전 대표에 의해 공식 거부되긴 했지만 당내에서는 그 사안을 두고 전선이 명확하게 형성돼 분열 조짐이 보였던 게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A 의원은 “대연정에 이어 친노그룹에서는 오픈프라이머리를 주장했다. 이는 한나라당의 경선 방식과 묘하게 맞물리면서 향후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갈등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노 대통령은 또 다시 임기 관련 발언을 끄집어냈다. 이를 두고도 한나라당 내에서는 시각차가 존재한다. 앞으로 이 문제도 오픈프라이머리만큼 친이-친박 그룹 간 갈등의 소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 이명박(왼쪽), 박근혜 | ||
후보 경선 방법뿐 아니라 조기 대선 여부를 두고도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 간에 전면전이 벌어질 수 있다. 현재 이 문제를 바라보는 양측 간에 일정한 온도차가 감지된다. 이 전 시장 측으로서는 현재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고 최근 당내 세력 규합에도 성공적인 결과를 얻고 있기 때문에 당장 조기대선을 치르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는 것 같다. 이 전 시장은 공식적으로 조기 대선을 반대하지만 일부 친이 의원들은 ‘받아들여서 하루빨리 정권교체 준비를 하자’고 주장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이명박 맨’으로 알려진 이재오 최고위원이 “노 대통령이 공연히 자신의 직위를 더 유지하기 위해 중립내각을 하자, 거국내각을 하자, 나는 국방만 맡겠다고 하면 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면서 조기 대선을 주장한 것도 이 같은 판단에서였다는 것이다. 친이 그룹의 또 다른 C 의원도 “노 대통령이 내년에 직을 던질 것으로 본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 지금부터라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노 대통령은 이미 대통령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혼자 순순히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술수를 부릴지 모른다”며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측으로서는 현재 지지율이 계속 추락하고 있기 때문에 조기 대선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한 의원은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는 현재의 지지율 격차를 심각하게 보는 것 같다. 그는 최근 전효숙 헌재소장 임명 반대 농성장에서 한 의원을 조용히 불러내 약 30분 동안 ‘도와달라’며 읍소작전을 벌였다고 한다. 박 전 대표도 최근의 지지율 격차에 ‘마음이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점을 보면 박 전 대표가 조기 대선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고 밝혔다.
현재의 당내 기류를 보면 친이-친박 그룹이 향후 노 대통령의 전격 조기대선 제의가 있을 경우 극심한 갈등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실시된 디오피니언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조기 대선이 실시된다면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의 후보 단일화가 어려울 것’이라고 대답한 국민이 58.6%에 달했다는 사실에서도 양측의 갈등은 그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한나라당은 조기 대선이 제2의 탄핵 국면으로 비화될 가능성에도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앞서의 B 의원은 이에 대해 “면밀한 검토도 없이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다가 지난 17대 총선 때 얼마나 고생을 했나. 노 대통령이 직을 내던질 정도로 심각한 의제를 던졌는데도 권력쟁탈을 벌이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제2의 탄핵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노 대통령의 임기 발언 중에는 탈당도 언급되었다. 비록 노 대통령이 다시 ‘당적 유지’를 말하긴 했지만 탈당 문제는 사화산이 아닌 휴화산일 뿐이다. 정치권에서는 노 대통령이 탈당하면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노 대통령의 ‘대연정’, ‘여·야·정 정치협상회의’ 제안에 비춰봐도 거국중립내각의 일차 대상은 한나라당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노 대통령의 노림수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이 결코 거국 중립내각 구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을 분열시키기 위해 총리직을 포함해 파격적인 거국 중립내각 구성을 제안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노 대통령은 탈당한 신분이기 때문에 각 대권 주자들과 자유롭게 접촉하며 ‘연대’를 모색할 수 있다. 국가 위기상황을 당적이 없는 대통령과 차기 후보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 나가는 명분과 모양새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나라당 대권주자들 간의 분열로 실제 거국 내각이 구성될 가능성은 낮고 결국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분열과 함께 권력 재창출을 위한 한나라당 후보와의 연대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