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제 개헌론은 일단 한나라당의 핵심 지지기반인 영남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공론화가 추진되고 있는 상황. 이들은 특히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오는 2006년 말까지 개헌논의 매듭’ 방침과 “2004년 17대 총선 이후 `집권 2기에 내각제에 가까운 분권형 대통령제를 운영하겠다”고 밝힌 점을 들어 내각제 개헌을 당장 공론화하자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내각제 개헌론이 한나라당에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2월26일 천안 연수원에서 열린 의원 지구당 연찬회 때부터. 당시 언론의 관심은 서청원 대표 이하 현 지도부의 사퇴 여부 등을 둘러싼 당권파와 소장개혁파간 대립에만 맞춰져 있었지만 영남권 의원들 사이에서는 내각제 개헌의 불가피성을 상호 확인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 지난달 20일 정계은퇴 선언을 한 뒤 당사를 떠나려는 이회 창 전 한나라당 대선후보 앞에 의원들과 당직자들이 침통 한 얼굴로 모여 있다. | ||
김용균, 박종근 의원 등은 “현행 대통령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극한 정치투쟁을 피할 수 없다”면서 “행정수반이 무능하거나 포악해도, 또 부패해도 5년 임기를 보장해야 하는 현행 헌법은 반드시 재검토돼야 한다”고 개헌 필요성을 설명했다.
또 김영일 사무총장도 “내각제 개헌에 대한 영남권 의원들의 주장에 공감을 표시했고 당내에서도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밝혔고 당 정치개혁특위 간사인 허태열 의원도 “이번 대선에서도 확인된 동서간, 세대간 대립을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이루기 위해 적당한 시기에 내각제 개헌이 검토돼야 한다”며 가세했다. 박승국 의원은 한 발 더 나아가 “노 당선자의 5년 임기를 보장한다는 전제하에서 16대 국회에서 내각제 개헌을 매듭짓는 방안도 검토해 봐야 한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비(非)영남권에서도 내각제 개헌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의원들이 늘고 있다. 원내 사령탑인 이규택 원내총무는 3일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권력구조와 진정한 원내정치 구현, 지역화합을 위해 오는 2월 임시국회에서 내각제 문제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해 파장을 낳았고 최병렬 의원도 순수 내각제는 아니지만 이원집정부제에 대한 호감을 공개적으로 피력했다.
이 총무는 특히 또 “지금부터 논의를 진행해 17대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뜻을 물은 뒤 곧바로 개헌하면 된다”며 나름대로 개헌 스케줄까지 제시했다. 그는 발언 파문이 커지자 추후 ‘개인 의견’이라고 해명했지만 “특정지역에서 95%의 득표가 나오는 것은 김대중 대통령 때도 그렇고, 노 당선자 때도 그렇다” “원내 책임자인 총무로서 하는 얘기”라는 발언을 계속 쏟아냈다.
한나라당내에서 이처럼 내각제 개헌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대선 패배의 충격파가 워낙 컸던 데다 지금과 같은 정치지형하에서는 차기 대선 승리도 어렵다는 위기감 때문. 부산지역 한 초선 의원은 “정당 지지율에서 한나라당이 민주당을 훨씬 앞섰고 이회창 후보가 4년11개월 동안 지지율 1위를 달렸건만 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두고 후보 단일화라는 이벤트 하나에 패배하는 비정상적인 일이 발생했다”며 “5년마다 한 번씩 치러지는 대선이 이처럼 ‘투기성’으로 물들면 원내 의석이 1백51석이 아니라 2백석이 돼도 정권을 잡지 못하는 결과가 빚어질 수도 있다”고 밝혔다.
차기 대선에 내세울 만한 주자가 마땅찮다는 것도 한나라당의 고민. 한 핵심 당직자는 “당내에서 당권과 관련해 ‘포스트 이회창’ 운운하는 것은 맞을지 모르지만 대권주자로선 손에 꼽을 만한 사람이 없다”며 “이제는 ‘모 아니면 도’식으로 대권주자 1인에게 모든 것을 걸 것이 아니라 권력 분점이 제도적으로 유지되는 내각제에 관심을 돌릴 때도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당장 소장파들이 거세게 반발해 `당론화 과정에서 진통이 불가피할 전망. 미래연대 소속 한 의원은 “내각제론자들의 주장은 내용을 떠나 근저에 패배주의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문제”라며 “지금은 전면적인 당 쇄신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주력해야지 아쉽다고 어떻게 하면 지금 당장 권력을 조금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을까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또 내각제 개헌에 공감하는 의원들 중에서도 대선 패배 직후부터 이를 공론화하는 것은 당략적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시기 조절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수도권 한 재선 의원은 “당론이 대통령 책임제인 상황에서 내각제 개헌을 당의 공약으로 채택하려면 국민검증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며 “자칫 잘못하면 정치권 전반의 개혁 흐름을 반대하기 위해 내각제 개헌을 이용하는 것처럼 인식돼 코너에 몰릴 수 있다”고 말했다.
노무현 당선자측도 내각제를 포함한 개헌의 공론화엔 이의를 달지 않겠지만 한나라당내 내각제론자들의 `조기 추진 방침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노 당선자가` ‘17대 총선 후 분권적 대통령제 운영―2006년내 개헌 논의 매듭’을 밝힌 것은 정치개혁에 대한 의지를 강조하고 이를 투명하게 추진하겠다는 뜻이지 무작정 권력을 분점하자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노 당선자의 한 핵심 측근은 “노 당선자가 집권 후 정치스케줄을 밝힌 것은 내부적으로는 당을 전면쇄신해 17대 총선에 사활을 걸고 임하라는 메시지이고 대야 관계에서는 한나라당이 중•대선거구제 등 지역구도를 타파할 수 있는 개혁방안에 합의해 줄 경우 총선 결과에 따라 프랑스식 `동거 정부(코아비타시옹)처럼 권력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라며 “한나라당 일각의 내각제 개헌 조기추진론은 새 정권 출범 후 전개될 개혁 드라이브의 초점을 흐리려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 측근은 또 “개헌은 광범위한 국민여론을 바탕으로 정치권에서 협상이 진행돼야 하며 그것이 노무현 정부의 국정운용을 방해하는 방향으로 전개돼서는 안된다”고 말해 노 당선자가 제시한 2006년 이전까지는 본격적인 협상에 나서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박영일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