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4일 있었던 열린우리당 의원 총회. | ||
당초 열린우리당의 상황은 의원수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는 통합신당파와 일반 당원들의 힘을 빌어 전당대회에서 반전을 기도하는 사수파 간의 대결로 비쳐져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편지 정치에 힘입어 일단 통합신당파의 일방적인 개편 추진에 제동을 거는 데 성공했던 사수파는 노 대통령의 정치력에 큰 기대를 거는 듯했다. 그러나 막상 의원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가 가행되면서 당내에는 엄청난 회오리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신당파와 사수파 내부에서도 균열 조짐이 일고 있는가 하면 일부 의원들의 선도탈당설도 꽤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허울만 집권 여당이지 식물정당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는 쓴소리는 물론이고 “이미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마저 당 내부에서 나돌고 있을 정도다. “이럴 바엔 전당대회고 뭐고 하루 빨리 헤어지자”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당 진로를 둘러싼 신당파와 사수파의 주도권 싸움이 사분오열되면서 두 동강이 아닌 완전해체 분위기로 비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열린우리당이 전당대회 전에 계파별로 각개전투가 가시화될 것이라는 이른바 ‘조기해체론’을 제기하고 있다.
“대통령이고 대권주자고 다 필요없다.”
13일 의원회관에서 만난 열린우리당 중진 L 의원이 던진 쓴소리다. 중도파인 L 의원은 정계개편과 관련한 당내 갈등 문제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별로 할 말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개인 의견은 배제하고 신당파와 사수파의 극한 대치로 인한 분당 위기를 돌파할 해법을 묻자 L 의원은 “이런 상황에서 뾰족한 해법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이제 결별은 기정사실화 됐고 언제 어떤 명분으로 각 계파가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갖고 헤어지느냐는 문제만 남은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또 “중도파가 중재에 나서고 있지만 한계가 있는 것 같다”며 “대통령의 권위도 당 의장 등 지도부의 지도력도 먹혀들지 않고 있는 상황인 만큼 더 이상의 충돌 없이 명분 있는 이별 수순을 밞는 게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L 의원의 말은 분당을 넘어 완전해체 분위기로 치닫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현주소를 잘 대변하고 있다.
실제로 당 진로 문제 및 정계개편 방향을 둘러싼 당내 계파 간 갈등은 노무현 대통령의 귀국과 의원 상대 설문조사의 실시를 계기로 하루가 다르게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정계개편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기 싸움을 벌였던 신당파와 사수파의 갈등 기류에 중도파와 친고건파가 합류하면서 새 국면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문희상 배기선 유인태 원혜영 의원 등 중진들이 참여하는 ‘화해와 소통의 광장’과 초·재선의원 모임인 ‘처음처럼’이 중심이 된 중도파는 14일 모임을 갖고 열린우리당 소속의원 66명이 서명한 성명서를 발표, 눈길을 끌었다.
현 지도부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빠른 시일 내에 전당대회 일정을 확정하고 전대 준비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성명서 골자다. 이들은 또 비대위와 전대 준비위가 중심이 돼 전대의 성격과 형식 등에 대한 당내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 전대 준비위 구성, 후 타협점 모색’을 당내 갈등을 치유하는 해법으로 내 놓은 것.
이들 중진들과 중도파는 당내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통합신당파와 당 사수파 모두를 겨냥한 비판도 서슴치 않았다. 일부 신당파에 대해선 “조급한 통합논의나 움직임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고, 비대위 해체를 주장하고 있는 사수파에겐 “현 시점에서 비대위는 당 지도부이며 비대위 해체 주장은 매우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모임 결과를 브리핑한 오영식 의원은 “서명에 참여한 66명 외에도 상당수 의원들이 성명 취지에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향후 당 진로 문제 등과 관련한 신당파와 사수파 간의 파워게임에 중진들과 중도파가 적극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일부 중도파 의원들은 고건 전 총리와의 연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안정적 개혁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안개모) 소속으로 고 전 총리와 가까운 안영근 의원은 15일 “정계개편 과정에서 고건 전 총리의 입지가 더 강화돼야 하고 중도개혁세력이 결집해야 한다”며 “오는 18일이나 19일께 고 전 총리 중심의 중도포럼 출범을 공식 제안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안 의원은 또 “현재 열린우리당은 노무현당으로 돼 있다”며 “당원들이 스스로 진로를 결정할 수 있도록 이제는 노 대통령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 의원이 소속된 안개모를 비롯해 실사구시, 희망21포럼 등 중도성향 의원 모임 소속 10여 명이 고 전 총리 중심의 중도포럼에 참여할 것으로 알려져 이들의 행보가 ‘선도 탈당’으로 이어질 경우 전당대회 이전이라도 여권 핵분열을 촉발하는 기폭제 역할을 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처럼 한동안 정계개편 논의에서 소외됐던 중도파와 친고건파가 전면에 나서면서 선도 탈당론도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치권 일각에서 열린우리당 조기 해체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당발 정계개편 정국을 이끌었던 신당파와 사수파가 각각 내부 갈등을 빚고 있는 것도 조기 해체론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통합신당파는 전대 성격과 의제 등을 놓고 계파 간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어 자칫 내분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신당파 중 일부 강경파는 전대를 통해 통합이냐 재창당이냐를 결론 내리고 이에 따라 당의 합당 해산 권한을 가진 지도부를 선출하자는 주장인 반면 중도파는 통합을 지향하되 합의에 기초한 전대를 치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당내 지분을 양분하고 있는 정동영 전 의장계와 김근태 의장계의 연대 분위기가 다소 느슨해지면서 정계개편 주도권을 놓고 양측이 막판 혈투를 벌이게 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일부 신당파 의원들은 내년 전대에서 당의 발전적 해체를 결의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한 서명운동에 돌입해 또 다른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통합신당파인 ‘국민의 길’ 소속 전병헌 의원, ‘희망21’ 소속 양형일 최규식 의원, 안개모 소속 주승용 의원, ‘실사구시’ 소속 우제창 의원 등은 14일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을 통해 “2월 전대는 당의 발전적 해체를 통해 국민 대통합신당으로 가는 획기적 계기가 되어야 한다”며 당 해체론에 불을 지폈다. 이들은 “전대는 통합수임기구를 구성해 전권을 위임하는 자리여야 한다”며 당내 과반인 80여 명의 서명을 받는 것을 목표로 서명 작업에 착수한 상태다.
이들의 주장은 전대 성격을 당 해산 절차로 상정해야 한다는 것이어서 당 사수파는 물론 신당파 내부에서도 적잖은 마찰이 예상된다. 특히 이들 신당파가 추진하는 서명 작업에 동참하는 의원들이 많아질 경우 당 사수파와의 결별은 물론 분당을 촉발하는 뇌관으로 작용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친노세력을 중심으로 한 당 사수파의 내부 사정도 그리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동안 당 사수파가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신당파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절대적 우군과 충성심이 강한 당원들의 ‘일당백’도 불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당 지지율이 10% 미만으로 떨어지자 “열린우리당 간판으론 차기 총선을 기약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일부 의원들의 이탈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실제로 기자는 당 사수파의 입장을 듣기 위해 친노직계 모임인 의정연구센터(의정연)와 참여정치실천연대(참정연) 소속 의원들을 상대로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대부분 일정과 설문조사 등 민감한 시기를 이유로 인터뷰를 거절했다.
참정연 소속 K 의원 측은 “모임에 나간 지 꽤 오래됐다. 우리를 당 사수파로 분류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고, L 의원 측은 “당 진로 문제를 당 사수파 입장에서 대변하는 게 다소 벅차다”는 이유로 인터뷰를 거절했다. 영남권 친노사단으로 분류되고 있는 J 의원 측은 “우리는 당 사수파가 아니고 오히려 통합신당을 지지한다”고 답해 기자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또 당 사수파 중에서도 강력히 반발했던 의원 대상 설문조사에 참여하는 등 이탈 현상이 가시화되고 있으며 중도파의 모임에 기웃거리는 의원들도 눈에 띄고 있다.
이와 관련, 14일 기자와 만난 신당파 초선 K 의원은 “현역 의원들이 고민하고 있는 지상과제는 차기 총선”이라며 “정계개편이니 정권재창출이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차기 총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것이 담보되지 못할 경우 언제든 계보를 이탈할 수 있는 게 정치인의 속성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당 사수파가 아무리 소수정예라 할지라도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면 배를 갈아탈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게 K 의원의 주장이다.
여기에다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이 주장한 것처럼 일부에서는 한나라당행을 기웃거리는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있어 열린우리당의 분위기를 더욱 어지럽게 하고 있다.
지금 사분오열된 열린우리당의 대열은 점차 더 이상 추스르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 일부에서는 내년 2월의 전당대회는커녕 지금이라도 조그만 불똥만 튀면 당장 대폭발을 일으킬 것 같은 숨막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중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