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에 참석, 국정전반에 대해 예정시간을 넘기면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정국은 요동을 치고 있다. 여권내 정계개편 논의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친노그룹을 지원하기 위한 노 대통령의 또다른 승부수와 “밀리면 죽는다”는 범여권 주자들의 위기감이 충돌하면서 대권전쟁은 이제 마지막 결전만을 남겨 놓은 형국이다. 대권주자들은 노 대통령의 발언에 분개하며 대결 자세를 더욱 강화하면서도 노 대통령과 노 대통령 발언에 반색하는 친노그룹이 보여줄 향후 행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범여권을 중심으로 한 정계개편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 대통령이 또 다시 던진 폭탄성 승부수를 둘러싼 정국의 소용돌이를 집중 추적했다.
범여권 차기주자들을 겨냥한 선전포고는 노 대통령이 먼저 날렸다. 노 대통령은 지난 21일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민주평통자문위 상임위원회에서 “고 총리가 다리가 되어 그(사회지도층) 쪽하고 나하고 가까워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총리로 기용했었다. 결과적으로 실패해 버린 인사였다”며 ‘고 총리 인사 실패론’을 거론해 파문을 야기했다. 노 대통령은 또 “링컨 대통령의 포용 인사는 제가 김근태·정동영 씨를 내각에 기용한 그 정도하고 비슷한 수준인데 저는 비슷하게 하고도 인사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고 사니까 힘들다”며 여권 내 유력한 차기주자인 DY와 GT의 장관 발탁도 실패한 인사임을 시사했다. 한마디로 이들에게 어떤 점수도 주지 못하겠다는 뉘앙스다.
범여권 대권주자들을 직접 겨냥한 노 대통령의 깜짝 발언은 또다시 차기주자 진영을 뒤흔들었다. 특히 당 진로 및 정계개편 방향을 둘러싼 열린우리당 내 통합신당파와 당 사수파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노 대통령의 발언 이면에는 고 전 총리를 의중에 둔 범여권 통합론을 주창하고 있는 신당파를 겨냥, 견제와 대반격의 의도가 내포돼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노 대통령 발언 직후 맞대응을 자제하는 듯했던 고 전 총리 측은 다음날 정면 대응카드로 입장을 급선회했다. 고 전 총리는 22일 개인명의의 성명을 통해 “대통령 발언은 자가당착이며 자기부정”이라며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국민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면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외면하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 국정을 전단한 당연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열린우리당내 친고건파인 안영근 의원은 22일 MBC 라디오에 출연해 “노 대통령이 요즘 정국에 대해 많이 불편해 한다는 생각이 든다”며 “견제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주장했고 선도탈당론을 제기한 김성곤 의원도 “본인이 임명한 총리를 잘못된 인사로 폄하하는 것은 최고 책임자로 적절한 발언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통합신당파는 노 대통령의 발언에는 고 전 총리와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는 신당파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GT계의 한 초선의원은 22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정계개편과 차기 대선구도와 관련한 노 대통령의 본심이 드러난 것”이라며 “‘반노무현’ 내지는 ‘비노무현’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범여권 차기주자들과의 선 긋기를 분명히 함으로써 당 사수파를 측면 지원하는 동시에 소수라도 친노세력과 함께 끝까지 참여정부의 개혁성과 정체성을 고수하겠다는 복심이 내포돼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야권도 일제히 노 대통령의 발언을 문제 삼았다. 민주당 이상열 대변인은 “실정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 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국정에만 전념하라”고 비판했고,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너나 잘 하세요’가 생각난다. 더 이상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언급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다”고 비꼬았다.
이처럼 노 대통령의 발언 파문이 범여권을 비롯해 정치권 전체로 확산되자 청와대는 “발언 진의가 왜곡됐다”며 즉각 해명에 나섰지만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분위기다. 정치권은 청와대의 해명은 궁색한 변명일 뿐 노 대통령이 작심하고 내 던진 발언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숨겨진 비수가 무엇인지 파악하느라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의 21일 발언에는 고 전 총리와 신당파(DY·GT)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되는 “괘씸하다”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난데없이 굴러 들어온 놈” 등 정제되지 않은 격한 표현들이 많았다. 더구나 이날 발언 도중 노 대통령은 격한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연단을 내리치거나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는 후문이다. ‘하야’ 발언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노 대통령이 뭔가 작심한 듯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 스스로 “정계개편 과정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한 만큼 본격화되고 있는 정치권 새판짜기 및 차기 대선구도와 관련한 속내를 드러낸 것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 지난 14일 CBS 개국 52주년 행사장에 참석한 대권주자들. 앞모습만 왼쪽부터 정동영 전 의장, 김근태 의장, 고건 전 총리. 국회사진기자단 | ||
고 전 총리는 총리직 사퇴 이후 노 대통령과 등거리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대북문제 등 정책적인 부분을 제외하곤 참여정부의 이념 및 노선 등과 관련해서는 큰 마찰을 빚지 않았다. 현 정부 초대 총리로서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발언은 고 전 총리로서는 ‘울고 싶던 차에 뺨 때려주는’격으로 모든 고민을 한꺼번에 해결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떻게든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통해 범여권 통합주자로 우뚝서고 싶은 고 전 총리에게 노 대통령이 그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고 전 총리 진영은 이번 기회에 노 대통령과 정면 대결구도를 만들어 하락한 지지율을 다시 끌어올일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가뜩이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범여권 제3 후보로 급부상하면서 고 전 총리의 대권 입지가 약화되고 있는 현 상황을 감안하면 노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고 전 총리가 노 대통령과 현 정부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분위기다.
고 전 총리 진영은 당 진로 문제 등으로 제 계파들이 극심한 갈등을 빚으면서 핵분열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혼란과 한화갑 민주당 대표의 의원직 상실로 구심력을 잃고 있는 민주당의 내분을 예의주시하면서 신당작업에 박차를 가한다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당초 3, 4월께로 계획했던 창당 일정도 앞당길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20일 기자와 만난 고 전 총리 캠프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뜻은 있지만 정치 여건상 소극적인 행동을 보였던 여야 현역 의원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고건신당이 주춤했던 게 사실”이라고 전제한 뒤 “하지만 열린우리당 분열이 초읽기에 들어갔고 민주당의 향후 진로와 직결돼 있는 한화갑 대표의 거취 문제가 결정되는 22일 이후에는 신당 작업이 급물살을 타게 될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참여할 현역 의원 수를 어느 정도로 예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관계자는 “열린우리당내 친고건파와 호남권 의원 30여 명, 민주당과 국민중심당 소속으로 고 전 총리와 뜻을 함께하고 있는 의원 7~8명 등 40여 명 안팎이 될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또 “언제 어느 세력이 용기를 내 고건 진영에 합류하느냐는 문제만 남아 있다”며 “물꼬를 트는 게 어렵지 한번 트인 물줄기는 개천으로 강물로 급기야 큰 바다로 흘러들어가는게 자연의 이치”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의 말처럼 현재 열린우리당내 친 고건파 의원들은 선도탈당론을 거론하며 언제든 뛰쳐나올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한화갑 전 대표의 의원직 상실 이후 신중식 최인기 이낙연 의원 등 민주당내 친 고건파와 고 전 총리 측의 연대 움직임에도 가속도가 붙고 있는 분위기다.
“DY와 GT의 장관 기용은 포용 인사였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을 접한 DY와 GT 진영은 파문 확산을 우려해 즉각적인 대응은 자제하고 있지만 내심 불쾌한 심사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22일 확대간부회의에 참석한 GT는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무거운 표정만 지을 뿐 침묵으로 일관했다. 속은 끓고 있지만 참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했다. 대신 평화개혁 세력을 통합하는 신당 추진은 멈추지 않겠다는 발언에서는 비장함이 묻어 있었다.
GT는 이날 회의에서 “의원워크숍을 갖는다. 결론은 분명하다. 부족했던 점을 인정하고 새롭게 재출발하자는 다짐을 하는 것”이라며 통합신당 작업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또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려는 ‘꼼수’는 역사의 준엄한 비판을 받을 것”이라며 노 대통령과 친노그룹을 겨냥한 듯한 의미심장한 발언도 했다.
DY는 노 대통령의 발언과 관련해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DY계 의원들은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DY계의 한 초선의원은 “정계개편 논의 과정에서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는 DY와 GT에게 ‘그만 헤어지자’는 메시지를 던진 게 아니겠느냐”며 “DY도 노 대통령의 이러한 복심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는 만큼 조만간 적절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노 대통령의 지난 21일 발언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노 대통령 의 발언은 말만 무성했던 노 대통령과 DY·GT 간의 이별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매개 역할을 할 것으로 정치권 관계자들은 관측하고 있다.
또 고 전 총리 측이 정면대응 카드를 꺼내든 만큼 범여권을 아우르는 정치권 새판짜기는 급물을 타게 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노 대통령과 범여권 주자들 간의 대권 전쟁은 그야말로 ‘사느냐 죽느냐’는 서바이벌 게임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