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건 전 총리(왼쪽),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 ||
신당파와 사수파가 정면충돌했던 1차 전쟁이 반노·비노그룹 대 친노그룹 간의 대결구도였다면 2차 전쟁은 범여권 제3후보 경쟁을 펼치고 있는 고건 전 총리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둘러싼 신경전의 측면이 강하다. ‘GT·DY 2선 후퇴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인사들 대부분이 ‘친고건파’이고 일부 신당파도 정 전 총장의 대권입지 확보 차원에서 GT와 DY가 백의종군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당 일각에서는 오래전부터 “GT·DY로는 안된다”는 회의론이 거론되긴 했지만 당내 최대 주주인 두 사람의 2선 후퇴론이 공론화된 적은 없었다. 제3후보론이 탄력을 받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현실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GT·DY 2선 후퇴론’은 범여권 제3후보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고 전 총리와 정 전 총장의 대망론과 맞물려 여권 핵분열과 정치권 새판 짜기를 촉발시키는 또다른 핵뇌관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GT·DY 2선 후퇴론’에 불을 지핀 세력은 열린우리당 중도성향 재선그룹이다. 지난 3일 김부겸 정장선 조배숙 오영식 송영길 안영근 의원 등은 회동을 갖고 전·현직 의장인 GT와 DY가 전면에 나설 경우 신당 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두 사람의 2선 후퇴를 주장하고 나섰다.
당내 보수 실용파를 대변해 온 강봉균 정책위의장도 여기에 가세했다. 강 의장은 4일 재야·개혁파 수장격인 GT를 ‘좌파’라는 원색적인 표현까지 동원하며 직격탄을 날렸다. 강 의장은 이날 GT가 주도적으로 추진해 온 정책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김 의장이 당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데 한계가 있다. 백의종군하거나 다른 길로 가야 한다. 갈라서는 것이 해결 방법은 아니지만 생각을 바꾸든가 아니면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며 고강도 펀치를 날렸다.
‘GT·DY 2선 후퇴론’을 주장하는 것이 이들만은 아니다. 1차 기싸움에서 밀린 사수파도 주도권을 다시 빼앗아 올 호기라고 판단한 듯 앞서 주장해 오던 2선 후퇴론에서 더 나아가 두 사람 모두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해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또한 민주당 조순형 의원도 3일 GT·DY의 신당 합의와 관련해 “국정운영 실패 책임을 노 대통령에게 돌리고 다음 대선과 총선에서 살아남겠다는 당리당략”이라며 “우리당 창당 주역인 두 사람은 정계개편 논의에서 2선에 있겠다든가 하는 의사표시가 있어야 한다”고 거들었다. 여기에 일부 신당파와 진보개혁 진영 일각에서도 두 사람의 2선 후퇴론에 동조하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내 친 고건파 의원들을 비롯한 열린우리당내 중도보수 성향 의원 등 10여 명이 이달 중순께 ‘통합신당 추진을 위한 공동모임’ 결성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GT· DY의 2선 후퇴 내지는 백의종군을 공식적으로 요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공식적으로 이런 주장을 펼칠 경우 여당발 정치권 새판짜기 정국의 또다른 핵심 변수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일부 신당파 의원들까지 가세한 소액주주들이 최대 주주이자 신당 창당에 합의한 GT와 DY에게 반기를 든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권 관계자들은 소액주주 봉기 배경에는 정계개편 주도권 장악 등 계파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맞물린 범여권 대권후보 쟁탈전이 투영돼 있을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GT·DY 2선 후퇴론’을 주장하고 있는 인사들이 내세우고 있는 표면적인 이유는 ‘분당’이라는 위기상황을 초래한 전·현직 당 의장으로서의 책임론과 바닥권을 벗어나지 못한 두 사람의 지지율로는 정권재창출이 불가능하다는 현실론이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각 계파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또다른 복심이 숨겨져 있다. 당내 최대 주주이자 여전히 대망론을 버리지 않고 있는 GT와 DY가 신당 창당을 주도할 경우 내심 대권주자로 옹립하고자 하는 고 전 총리나 정 전 총장 등 장외 유력주자들의 합류를 지연시키거나 차단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2선 후퇴 내지는 백의종군하는 모습을 보여야 제3후보들이 범여권 통합을 기치로 대권경쟁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란 논리다.
실제로 GT에게 직격탄을 날린 강 의장은 고 전 총리와 동향(전북)인데다 정치성향(중도보수) 또한 비슷하며 현 열린우리당 지도부내에서 고 전 총리와 가장 가까운 인사로 분류되고 있다. 당 4역인 강 의장이 당 의장인 GT에게 거침 없이 비판의 칼날을 겨눈 배경에는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고 전 총리의 신당호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고육지책이 내포돼 있을 것으로 일부 정치권은 해석하고 있다. 정 전 총장에게는 공개적으로 구애의 손길을 내밀면서 고 전 총리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는 GT의 행보를 제어하기 위해 강 의장이 자진해서 ‘총대’를 멘 것이 아니냐는 관측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GT·DY 2선 후퇴론’에 불을 지핀 중도성향 의원들 대부분이 친고건파로 분류되고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당내 대표적인 친 고건파인 안영근 의원은 이달 중순께 통합신당 추진을 위한 의원모임 결성을 추진하고 있다. 당내 친 고건파와 호남지역 일부 의원 등 10여 명이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4일 기자와 만난 고건 캠프 측의 한 관계자도 “안 의원이 주도하는 신당 추진기구가 이달 중순께 만들어질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러나 고 전 총리는 당분간 이 신당기구에 참여하지 않고 오는 3~4월께 국민통합신당이 출범할 때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또 “열린우리당내 친고건파와 민주당 등 야당 의원까지 포함하면 최소 20여 명의 현역의원이 신당추진 모임에 참여할 것이고 박원순 변호사,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등 유력인사들과도 신당 참여를 조율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운찬 전 총장도 참여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일부 언론이 고 전 총리와 정 전 총장이 손을 잡을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너무 앞서가는 것 같다”며 “두 사람 모두 대권에 뜻이 있는 만큼 범여권 제3후보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의 말처럼 정 전 총장은 지난해 12월 중순께 GT와 회동 사실이 알려진 이후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유력한 범여권 제3후보로 급부상했다. 또 연말연시를 전후해 실시한 각종 여론조사 중 일반인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고 전 총리가 물론 앞서지만 전문가 집단에서는 정 전 총장이 고 전 총리보다 지지율이나 경쟁력에서 일부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 전 총장의 급부상으로 고 전 총리와 고건 캠프는 바짝 긴장하고 있는 분위기다. 고 전 총리가 연초부터 대권구상과 맞물린 정치일정 변경 방안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대변하고 있다. 이와 관련 고건 캠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실무자는 5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고 전 총리는 당초 신당 창당 전에 원탁회의를 출범시킬 계획이었으나 ‘정운찬 카드’ 부상 등 범여권 정치환경 변화에 따른 적절한 정국 구상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며 “열린우리당의 정계개편 추이에 따라 원탁회의 출범을 생략하고 곧바로 신당 창당 수순으로 들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했다.
지난해 말까지 대권 행보로 오해 받을 정도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정 전 총장은 새해 들어 다시 신중 모드로 선회하고 있는 모양새다.
정 전 총장은 4일 고려대 특강에서는 “대통령에 관심이 없으며 후보로 나설 생각이 없다”며 자신이 범여권 제3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이날 “여권에서는 불이 꺼져가니까 나를 불쏘시개로 이용하려 하고 있고 언론은 한나라당 독주에 맞설 상대로 나를 흥행카드로 이용하고 있지만 관심이 없다”며 정치권과 언론에 대한 불편한 심기도 드러냈다.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각 언론사의 신년 여론조사 결과 지지율이 미약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나자 의기소침한 나머지 정치 입문과 대망론에 대해 일시적으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 우세하다. 또 열린우리당의 정계개편 향배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였다가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신중론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자신의 최대 우군으로 지목받고 있는 GT가 2선 후퇴 내지는 백의종군 압박을 받고 있는 정치상황을 감안해 좀더 상황을 지켜보자는 계산도 어느 정도 투영돼 있을 것으로 정치권은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 같은 것이다. GT를 비롯한 신당파 중 ‘정운찬 카드’를 주장하고 있는 의원들이 여전히 정 전 총장의 상품성과 경쟁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한 정 전 총장 카드는 여전히 유효하다 할 것이다. 지금까지 정 전 총장은 비정치권 인사로 분류돼 왔고 대망론과 관련한 속내도 전혀 드러내지 않은 만큼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지지율 조사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이들 의원들의 판단이다. 즉 비상장 우량주인 ‘정운찬 주’가 상장만 되면 주가는 상종가를 칠 것이란 논리다. 따라서 GT계나 일부 통합신당파 의원들은 정 전 총장을 범여권 대선후보로 영입해야 한다는 데 물밑 교감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강 의장으로부터 직격탄을 맞은 GT가 다음날(5일) 곧바로 당내 친 고건파와 중도실용파를 겨냥해 “상황이 어렵다고 ‘짝퉁 한나라당’을 만들면 역사 웃음거리 된다”며 반격에 나선 것도 여기서 밀리면 친고건파에 주도권을 뺏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지식인이나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한 일부 언론사 여론조사에서 정 전 총장이 고 전 총리를 제치고 범여권 후보 선호도 1위에 올랐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일요신문>이 지난해 말 국회 보좌진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도 정 전 총장은 여야 전체 3위를 차지했고 범여권 주자 중에서는 고 전 총리를 제치고 1위에 오른 바 있다.
정 전 총장이 여러 가지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려 지금은 신중한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여당발 정계개편 향배 및 정치 환경 변화 여부에 따라서는 언제든 다시 대망론의 불씨를 되살릴 것이란 관측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정운찬-정동영-김근태의 ‘JJK 연대설’이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결코 그냥 지나쳐 버릴 카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정 전 총장이 본격적인 대권행보에 나설 경우 여권의 신당 움직임은 또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은 분명하며 범여권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고 전 총리와의 대혈투는 불가피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정치권 주변에서 ‘GT·DY 2선 후퇴론’ 배경에 두 사람의 보이지 않은 대권 파워 게임이 숨겨져 있을 것이란 분석이 나돌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