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력이 급속히 저하될 때는 정신과를 찾아가 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 대부분 일시적 건망증은 생활습관을 고치는 것만으로 쉽게 고칠 수 있지만, 뇌 손상이나 우울증의 전조증상인 경우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사진은 분당차병원 정신과 서신영 교수의 환자 상담 | ||
실제로 예전에는 뇌의 노화가 시작되는 40∼50대에 건망증이 많이 나타났는데, 요즘에는 불안과 스트레스, 우울 등의 영향으로 건망증을 호소하는 30대들이 병원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기억력이 떨어져 우울해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 경우 오히려 우울해서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약속을 자주 잊어버리거나 고유명사가 잘 기억나지 않는 등의 사소한 건망증이라도 갑자기 빈도가 늘어났다고 생각된다면 그냥 무시하지 말고 적극적인 개선을 모색해야 한다고 전문의들은 조언한다.
건망증은 한 마디로 ‘잊어버리는 증상’이다. 나이가 들면서 갑자기 건망증이 자주 반복되면 혹시 치매에 걸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다. 건망증은 대부분 일시적이고, 심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에까지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므로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치료가 필요한 경우도 없지 않은만큼 일단 자신에게 발생한 건망증의 원인과 성격을 잘 분석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경험한 것을 뇌의 특정 부위에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에 따라 끄집어내어 사용하는 정신활동 능력을 갖고 있다. 이것이 기억이다.
기억된 정보는 항시 머리속에 떠올려있는 것이 아니다. 입력→저장→등록→회상이라는 단계를 거쳐 정보를 두뇌속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정보를 꺼내어 활용하는 것이다.
기억 과정의 첫 번째 단계인 감각기억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을 통해 받아들인 것을 기억하는 매우 짧은 인식이다. 일상에서 얻어지는 대부분의 인식정보들은 그 자리에서 잊혀지지만, 필요성에 따라 집중하여 수집하는 정보들은 둘째 단계인 단기기억으로 넘어간다.
단기기억이란 집중하는 동안 존재하는 기억. 이 기억을 오래 잊지 않기 위해서는 반복학습 등을 통해 셋째 단계인 장기기억으로 이동시켜야만 한다. 장기기억으로 저장하지 않은 정보는 5∼10분이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장기기억은 잠재적인 기억을 위해 저장되는 정보를 말하며, 이때에는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형태로 뇌에 저장된다.
기억의 저장 단계에서 보듯, 사람이 일상을 통해 습득하는 정보의 대부분을 잊어버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기억 과정의 일부라 할수 있다. 정보의 홍수시대에 넘쳐나는 수많은 정보들을 모두 기억하려면 두뇌에 과부하가 걸리게 되므로 불필요한 정보는 바로바로 지워서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기 좋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정보를 자꾸 잊어버려서 필요한 때에 제대로 꺼내 쓰지 못한다면 불편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기억해야 할 정보를 제대로 저장하지 못하는 것을 건망증이라고 볼 수 있다.
건망증이 시작되는 원인은 다양하다.
주의력이 부족하거나 스트레스, 불안이나 우울, 피로감이 쌓이면 기억력이 떨어지기 쉽다. 또 신체적인 질병, 시각 청각장애, 술에 취한 상태, 영양결핍 등도 기억력 감퇴의 주요 원인이 된다.
사회적 활동이 줄거나 무력감으로 인해 정신적 긴장감이 크게 떨어져도 기억력이 떨어진다. 사회적 접촉이 적어지면 자극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기억할 필요성도 줄어들기 때문에 절로 기억력이 감퇴된다.
단순히 집중이 안되거나 일이 안된다며 건망증으로 병원을 찾는 젊은 층에는 우울증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분당차병원 정신과 서신영 교수는 “우울증 척도검사를 해보면 많은 건망증 환자에게서 스트레스나 업무 과다로 인한 우울증이 진단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경쟁적이고 성취욕이 강한 사람일수록 나타나기 쉽다. 또 밤에 일을 하는 등 야행성 생활,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연예인이나 작가, 예술가에게 많은 편”이라고 말한다.
승진이나 명퇴 등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감이 스트레스로 작용해 자신도 모르게 우울증을 겪는 직장인들이 많다. 우울증이 동기와 집중력, 지각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이로 인해 건망증이 심해진다. 이때는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심리치료를 병행하면 증세가 호전된다.
옷을 다리던 다리미를 그대로 켜놓고 외출한다든가 가스불에 냄비를 올려놓은 채 외출하는 등의 건망증을 경험하는 주부들도 많다. 이 같은 주부들의 건망증은 주부 우울증의 초기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건망증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할 때 신속히 검사를 받으면 우울증으로 발전되는 것을 막고 기억력도 쉽게 회복할 수 있다.
스트레스 외에 업무상 과음의 기회가 많은 샐러리맨들도 기억력 감퇴의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 술을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마시면 단기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 부위가 심하게 손상돼 기억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술을 많이 마시고 방금 전의 일을 기억 못해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하는 것은 바로 ‘해마’ 손상이 원인이다. 아무리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많이 마시고도 자기 집에 무사히 돌아가는 것은 기억력이 건재해서가 아니라 장기 기억이 아직 무사하기 때문일 뿐이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손이 떨리고 잠이 오지 않는 등의 금단증세를 겪을 정도라면 어느 정도 건망증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방금 한 말을 반복할 뿐 아니라 들고온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하거나 무엇을 들고왔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기 일쑤다. 이처럼 뇌 세포가 손상되면 치료를 하더라도 완전 회복이 어려우므로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긴다면 술을 삼가는 게 좋다.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되면 뇌세포가 회복불능으로 망가져 알코올성 치매에 이르게 된다.
술을 좋아하는 주당들은 깜박깜박하는 건망증 외에 거짓말도 잘 한다. 인간성이 나빠서라기 보다는 없어진 기억을 보충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다.
젊은 여성에게 많이 생기는 갑상선기능 저하증이나 갑상선기능 항진증 같은 갑상선 질환도 기억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그외에 내분비계 질환이나 저산소증, 저혈당, 당뇨병, 빈혈, 뇌졸중, 뇌염, 뇌종양 등도 기억력 감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억력 감퇴는 성인뿐만 아니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수험생, 자극적인 환경에 노출된 어린이에게까지 나타나고 있다. 컴퓨터 게임이나 TV 등에 오래 노출돼 뇌가 피로해져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뇌의 피로를 회복하면 집중력을 되찾을 수 있지만, 이런 상태를 장기적으로 되풀이하면 회복이 어려워질 수 있으므로, 무엇에든 기억력이 떨어질 정도까지 몰두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
건망증을 막고 기억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스트레스와 과로를 줄이도록 한다. 적당한 운동과 휴식 등 규칙적인 생활습관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휴식을 취하지 않고 일이나 공부만 하면 과중한 스트레스가 뇌에서 글루코코르티코이드 호르몬의 분비를 늘리는데, 이 호르몬은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저장되는 과정을 방해한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험생의 경우에도 무리하게 잠을 줄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운동은 뇌의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만들어준다. 걷기, 달리기, 줄넘기, 수영, 등산 등 유산소 운동은 뇌의 혈류가 좋아져 산소와 영양분이 충분히 공급되면서 기억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 명상이나 요가 등의 수련도 집중력을 향상시킬 수 있어서 좋다.
영양결핍도 학습능력을 떨어뜨리고 집중력을 감소시켜 기억력을 떨어뜨리므로 주의해야 한다. 평소 영양의 균형이 잡힌 식생활을 하도록 한다. 특히 엽산이나 비타민 E(토코페롤)가 부족하면 기억력에 좋지 않다. 엽산은 동물성 음식에 많으나 동물성 지방을 많이 먹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타민 E는 현미, 메주콩, 콩기름, 참기름, 아몬드, 땅콩 등에 들어 있다. 고등어, 꽁치, 정어리 등 푸른 어유 성분에 들어 있는 오메가 지방산도 기억력에 좋은 것으
로 알려져 있다.
반면 술은 지나치면 뇌를 손상시켜 기억력을 떨어뜨리고, 담배 역시 혈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증가시키고 모세 뇌혈관의 혈류를 나쁘게 만들어 좋지 않다.
독서나 외국어 공부, 퍼즐 맞추기, 악기 연주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적절한 지적 자극을 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 또 중요한 일은 메모하는 습관을 갖도록 한다.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중요한 일은 생각이 날 때마다 바로 메모해 둔다.
송은숙 건강전문 프리랜서
도움말/강남성모병원 정신과 이창욱 교수,
연세대의대 정신과 오병훈 교수, 분당차병원 정신과 서신영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