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정인봉 전 의원이 이른바 ‘이명박 X파일’ 보따리를 들고 국회에 들어서고 있다. | ||
가뜩이나 이-박 양진영은 오는 3월 10일까지 확정해야 하는 경선 방법과 시기, 후보검증 등에 관한 제반사항을 놓고도 상당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 이런 가운데 이번 일련의 검증과 관련한 폭로전으로 양진영의 감정싸움이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어느 한쪽이 탈당할 빌미를 찾으려 할 가능성도 점점 커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들려온다. ‘정인봉 나비효과’에 한나라당의 단일대오가 과연 금이 갈 것인지 따져보았다.
정인봉에 이은 김유찬 전 비서관의 기자회견으로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사실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 사이의 신경전은 일반적으로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최근 들어 두 사람은 불가피하게 같은 모임에 참석할 경우 가벼운 악수만 나눈 뒤 서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특히 양쪽은 공식 일정을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먼저 동일한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최대한 피한다. 일정을 잡는 참모들은 “서로 마주치면 과열 얘기가 나올까봐 가능하면 (일정이 겹치는 것을) 피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같이 있으면 언론과 행사 참석자들의 관심이 분산되기 때문에 되도록 단독 샷을 원한다”라고 말한다.
일정 잡기와 관련한 불미스런 일들도 발생한다. 최근 이 전 시장은 자신의 일정을 박 전 대표가 ‘가로채기’한 것에 대해 불쾌해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박 전 대표 측이 매너도 없이 중간에 일정을 치고 들어와 자신의 일정을 부득이 연기할 수밖에 없어 매우 언짢아했다는 것이다. 전말은 이렇다.
A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에 있는 한 종교단체 행사에 이 전 시장을 초대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박 전 대표 측에서 자신들도 그 종교단체 행사에 참석할 의사를 전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박 전 대표 측은 “무조건 이 전 시장보다 먼저 일정을 잡아달라. 그렇지 않으면 참석하지 않겠다”는 뜻을 종교단체에 전달했다고 한다. 그 종교단체는 ‘할 수 없이’ 박 전 대표의 일정을 먼저 잡아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고 한다. 그런데 A 의원은 자신들이 일정을 이미 잡아놓았는데도 박 전 대표 측이 뒤늦게 그에 앞서서 행사를 해버리자 매우 불쾌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전 시장의 일정을 아예 3월로 연기해버렸다.
A 의원은 이에 대해 “이 전 시장은 최근 여수 방문을 전격 연기했을 때도 박 전 대표 측의 ‘장난’이 있었다며 언짢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며칠 뒤 또 다시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박 전 대표 측이 지지율 1위인 이 전 시장을 따라잡기 위해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재를 뿌리는 등 비신사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고 박 전 대표 측을 비난했다. A 의원은 또 “박 전 대표가 직접 일정 지시를 하지는 않았겠지만 아래 참모들이 조급한 마음에 이 전 시장 일정을 잘라먹으며 물타기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 앞으로 이 전 시장 측도 그에 적극 대응해야 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그런데 박 전 대표 측에서는 이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며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캠프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이 전 시장의 일정을 모두 다 알고 그런 짓을 하겠느냐. 주최측에서 후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상대방 후보가 먼저 하기로 했는데 특별히 앞서서 당신 일정을 먼저 잡았다’며 선심을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우리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비열한 비방 하지 말라고 해라. 사실 우리도 그와 유사한 일들을 겪고 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정정당당히 하자”고 말했다.
사실 요즘 한나라당 출입 기자들은 양쪽 캠프를 취재하면서 서로를 비난하는 수위가 점점 높아짐을 체감할 수 있다. 아직 본격적인 경선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양측의 비방전과 ‘정보 흘리기’는 그 도를 넘고 있다는 해석이다.
최근의 ‘정인봉 파문’은 설 민심을 잡기 위한 기싸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당내에서는 “결국 양측이 결별 수순으로 돌입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해지고 있다. ‘정인봉 파문’은 그 명분을 쌓기 위한 양측의 첫 번째 ‘교전장’이라는 것이다.
▲ 지난 1월 한 행사에 참석한 이명박 전 시장(오른쪽)과 박근혜 전 대표가 건배하고 있다. | ||
사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3월 10일까지 국민승리위원회가 경선 방법, 시기와 후보검증 문제 등에 관해 합의하기로 했지만 합의 자체가 ‘구두선’에 그칠 가능성이 많다. 두 후보가 경선을 하지 않고 독자출마를 할 것”이라는 분석이 계속 나오고 있다. 현재 원희룡 의원을 제외하고 이 전 시장이나 박 전 대표 모두 경선에 참여하겠다는 선언을 공식적으로 하지 않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경선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아직 경선 시기나 방법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변명도 있지만 두 후보 모두 향후의 안갯속 정치 상황을 고려, 최대한 경선 참여 의사 표명을 늦추려 한다는 게 지배적 해석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두 후보 모두 경선 참여 의사를 미리 공개적으로 선언해 경선 실시 여부의 불투명성을 제거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
그런데 이 전 시장이나 박 전 대표로서는 경선의 매력을 크게 못 느끼는 게 사실이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전문가는 이에 대해 “비록 경선 실시를 합의한다고 해도 실제로 경선이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에서 두 후보 모두 독자 출마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확신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라도 예측할 수 없는 박빙의 경선은 피하고 싶을 것 아니겠는가. 경선에서 탈락하면 정치생명은 끝이 난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해 독자 출마한다면 대선 뒤 정치적 지분을 챙길 수도 있다. 특히 이 전 시장으로서는 당심을 확실히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당 차원의 후보검증 도마에 오를 경우 매우 부당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럴 경우 후보검증 부당성을 역설하며 탈당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경선이 실시되지 않는 상황이 되면 두 후보 가운데 한 명은 당을 뛰쳐나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면 한나라당이 분열할 가능성에 대해 국민 10명 가운데 6명은 ‘가능성이 높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먼저 뛰쳐나갈 사람은 누구일까.
지난 2월 15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탈당 예상 인물로 이 전 시장(30.7%)을 꼽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17.4%)를 들었고, 박 전 대표를 탈당 예상 인물로 전망한 응답자는 12.6%에 그쳤다.
이 전 시장이 현재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음에도 여전히 탈당 가능성이 높은 후보로 ‘찍힌’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이 전 시장은 ‘당심’을 확실하게 믿지 못하고 있다. 지지세력의 절반 정도는 충성도 높은 한나라당 열성파들이 아니라 중도세력이다. 이 전 시장으로서는 당 깃발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이 전 시장이 후보검증으로 당이 그를 계속 ‘괴롭힌다고’ 판단할 경우 전격 탈당해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한다.
이번 김유찬 파문은 한나라당에 네거티브의 후유증이 얼마나 큰지를 암시해주고 있다. 정 변호사의 X파일 논란 뒤 이 전 시장 측이 “우리도 박근혜 X파일이 있다”고 맞불을 놓은 것만 봐도 이 문제가 어떻게 번질 것인지 웅변해주고 있다. 본격적인 경선 국면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미 준비된 X파일을 토대로 양측간의 폭로전이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두 주자 진영의 지지 의원들이 수면위로 공개될 경우 당이 사실상 둘로 쪼개지면서 지금의 검증논란보다 훨씬 치열한 백병전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도 많다.
김정훈 정보위원장은 이에 대해 “이렇게 가면 극단적으로 당이 분열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청와대가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자료를 흘렸다는 정보가 있는데 각 후보 측이 이를 활용한다면 여권의 의도에 휘말려 그들이 바라는 바대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후보검증 문제로 당이 당장 깨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두 진영 간의 감정적 골이 깊어진다면 경선 후유증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자칫 한나라당 후보는 본선 링에 올라가기도 전에 체력이 바닥나 여권 후보에 어부지리를 선물해줄 수도 있는 게 현재 진행중인 후보검증 논란의 실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