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22일 서울 염창동 컨테이너기념관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강재섭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천막당사 이전 3주년 기념 간담회’를 가졌다. 국회사진기자단 | ||
최근 한나라당이 그동안의 대북 강경 정책을 뒤집고 보다 유화적인 정책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이 ‘집토끼 산토끼 논쟁’이 새롭게 불붙고 있다. 전통적 지지세력인 ‘집토끼’를 지키기 위해 기존 강경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최근의 한반도 평화무드와 남북 정상회담 이야기도 오가는 현재의 대선 정국을 고려할 때 대북 정책을 어느 정도 유화적으로 가져가 ‘산토끼’(중도세력)를 잡아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져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집토끼-산토끼’ 논쟁은 이명박 전 서울 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양상을 보이면서 대선가도에 빨간불이 켜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당내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연속 패배한 한나라당은 정국 토론회가 있을 때마다 고민에 휩싸인다. ‘집토끼(전통 지지세력)를 지키느냐, 산토끼(잠재적 중도세력)를 잡아오느냐’라는 딜레마 때문이다.
전여옥 의원은 전통적인 집토끼론자. 그는 “정치인들이 집토끼 산토끼 이야기를 많이 한다. 유권자를 토끼에 비유하는 것도 찬성하지 않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가출한 집토끼만 찾아와도 한나라당은 집권할 수 있다고 본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남경필 의원은 산토끼론으로 맞선다. 그는 “집권을 위해선 한나라당의 전통적인 지지층으로, 집토끼라고 할 수 있는 보수우파만으로는 모자라다. 야성을 발휘해도 집토끼만을 겨냥해선 안 되고 산토끼를 잡기 위해 당의 외연을 더욱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남경필 의원의 ‘산토끼론’이 세를 모으는 양상이다. 그 대표적인 시험대가 대북 노선 변경 문제다. 산토끼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 평화무드에 맞춰 그동안의 강경 기조를 대폭 수정해야만 한다. 그래야 한나라당이 그동안 소홀히 했던 중도세력을 끌어들여 대선도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북미관계가 급속히 진전되던 무렵인 3월 중순께 김형오 원내대표는 “핵 불능화까지 가는 데는 1년 정도 걸리는데 그렇다고 1년 후에나 정상회담을 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며 현 정권 임기 내 남북정상회담도 수용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미국까지 대북 유화책을 쓰는 마당에 한나라당만 강경 기조를 고수할 경우 ‘왕따’가 되면서 집권전략에 차질이 있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는 모두 대선에서 산토끼들을 모아 ‘+2%’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전략적 선택인 셈이다.
지금 한나라당은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냉전 수구세력으로 내몰릴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파격적인 대북 유화정책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나라당의 새로운 대북 정책을 내놓을 TF팀의 초안에는 전작권 전환 인정, 북한실체 인정, 준외교급 남북 상호 대표부 신설, 핵불능화 조치를 전제로 한 평화체제 구축 논의와 남북정상회담 찬성 등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급진적인’ 정책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연속 패배한 당으로서는 불과 20만~30만 표로 결정 난 두 번의 승부가 모두 중도층을 잡지 못해 아깝게 진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한나라당은 보수의 색깔을 벗어 던지고 이념의 중간지대로 이동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빠져 있는 것이다. 당 지도부의 이번 결정도 당 기저에 흐르는 산토끼론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기존의 지지세력인 집토끼는 도망가지 않을 테니 산토끼만 조금 더 잡으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방정식인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 전환 시도가 충분한 당내 의견 수렴을 거치지 않고 일부 지도부에 의해 결정되면서 당내 일부에서는 자칫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모두 놓쳐 대선에도 악영향을 주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청와대가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것이 대선을 위한 정략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에 대한 당내의 공감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의원들의 전체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원내대표가 회담 수용의 뜻을 밝히고 그 뒤에도 파격적인 대북 유화정책이 잇따라 나오면서 중도층의 의원들도 ‘너무 빨리 나가는 것 아닌가’라며 걱정하기도 했다. 그 결과 최근에는 남북정상회담과 전시작전통제권 반환 등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다시 나오는 등 갈팡질팡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되면 당의 대북 정책이 충분한 검토도 없이 갑자기 바뀐 것에 대해 집토끼들은 불안해할 것이고, 산토끼들은 ‘역시 한나라당은 수구 보수세력이다’라고 실망하고 등을 돌릴 것이다. 당의 오락가락 행보에 두 토끼 모두 지지를 철회할 가능성이 커지고 이는 대선에도 악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정치평론가는 이에 대해 “산토끼를 잡는 노력은 당에 덧칠되어 있는 수구세력의 이미지를 떨쳐내는 데 유리하게 쓰일 수 있다. 하지만 집권을 하기 위해서는 보수의 진지를 탄탄하게 구축하는 것이 좋다. 집토끼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집토끼를 안심시키는 정책과 홍보 개념을 작성해 일관성 있게 밀고 나아가는 것이 유리하다. 산토끼는 잡으러 간다고 잡히지 않는다. 경계선상에 있는 2%의 산토끼는 일관된 전략으로 풍성하게 자란 집토끼에 매혹당해 저절로 몰려드는 것이다. 2007년 대선의 승리도 산토끼보다 집토끼의 성질을 잘 연구해 그들을 확실한 자기편으로 삼는 후보가 거머쥘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이러한 당의 대북 정책 혼선이 당내 유력한 대권주자인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 사이에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나라당이 대북정책의 변화를 모색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당내 보수 성향 의원들과 뉴라이트 등이 이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특히 김용갑 의원은 지난 27일 보도자료를 내고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과 좌파세력의 홍위병 역할까지 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당내 특정 대선 후보 진영이 한나라당의 대북 정책을 친북 좌파 정책으로 변질시키고 있다”고 주장, ‘특정 대선 후보 진영’을 겨냥하면서 이번 사태의 불똥은 ‘빅 2’의 대립으로 옮겨 붙었다.
한나라당의 한 ‘친이’ 성향 의원은 이에 대해 “김 의원은 누가 봐도 박 전 대표 사람 아닌가. 박 전 대표가 김 의원을 앞세워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이 전 시장을 선제 공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지율 침체로 고민하고 있는 박 전 대표로서는 이 전 시장과 대립각을 세워 선명성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당심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도세력의 지지도 받고 있는 이 전 시장으로서는 진보적 색채를 강조해 외연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 전 시장의 전략에 색깔론으로 제동을 걸겠다는 것이 박 전 대표 측의 생각인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 측의 색깔론에 대해 이 전 시장 측도 강경 대응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두언 의원은 “경선 과정에서 우리를 향한 색깔론이 나올 것으로 이미 예상했다. 시대착오적 행태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전 시장 쪽으로 분류되는 한 중진의원의 보좌관은 “경선은 ‘집토끼’(당원)를 대상으로 한 것이므로 색깔론이 일부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보수 성향이 강한 한나라당 당원이나 지지층은 일반 국민들보다 색깔론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열린 전당대회에서도 대표 경선에 나선 이규택 의원과 일부 보수성향 단체들이 민중당 사무총장 출신인 이재오 최고위원의 ‘전력’을 문제삼아 색깔 공세를 벌였고, 실제 선거결과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박근혜 전 대표 진영은 색깔론 공방에 대해 “전혀 그럴 의도가 없다”며 원론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측은 이 전 시장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투쟁 때 이명박 전 시장은 무얼 했느냐”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박 전 대표 쪽의 유승민 의원은 “이 전 시장의 이념 노선과 대북 정책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당 대표 경선 때처럼 상당히 중요한 이슈로 부각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한편 최근의 대북 정책 혼선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아직까지 새로운 대북정책에 대한 우리 당의 입장이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아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내달 중순께 입장이 최종적으로 정리되면 정체성 논란도 어느 정도 가라앉을 것으로 본다”며 서둘러 진화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이미 불이 붙은 ‘이-박 전쟁’이 대북 정책 전장으로 비화되면서 경선 경쟁은 초반부터 불꽃을 튀길 전망이다.
정치권에서는 “무엇보다 한나라당이 언제 자신들 편으로 올지도 모르는 산토끼를 잡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이에 집에 있던 토끼들마저 뛰쳐나갈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 당 지도부의 확실하고 일관된 대책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후보들도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대선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한나라당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