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안희정 씨와 이화영 열린우리당 의원이 지난해 북측 인사와 접촉한 사실이 알려져 파장이 커지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남북정상회담 문제가 정치권의 화두로 부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참여정부 출범 후 대북송금 특검으로 경색된 남북관계와 지난해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10월 핵실험으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남북관계 타개책 방안으로 정상회담 문제가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 북한 문제 전문가들과 언론들도 앞다퉈 정상회담 시나리오를 상정하는 등 노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2차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에 힘을 실어줬다.
그렇지만 노 대통령은 그동안 북한의 핵 문제 해결을 정상회담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며 투명한 대북정책 기조를 천명해 왔다. 정상회담을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고 6자회담 추이 등을 지켜보며 상호 신뢰와 한반도 평화정책에 입각한 환경이 조성되면 자연스럽게 정상회담 문제를 논의해 볼 수 있지만 절대 무리는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혀 왔던 것.
하지만 지난해 10월 안 씨 등 비선라인이 북측 인사를 접촉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노 대통령과 청와대 핵심 인사들도 이러한 사실을 사전에 인지했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비공식 대북 접촉설을 강하게 부인해 왔던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도덕성에 적잖은 흠집이 생기고 있는 분위기다. 물론 북측 인사를 접촉한 당사자인 안 씨와 이화영 열린우리당 의원, 청와대 등은 이구동성으로 정상회담과는 무관한 북측 인사의 요청에 따른 만남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비선라인이 대북창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만큼 정치권은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정상회담 사진에 노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한 것. | ||
실제로 DJ(김대중 전 대통령) 정부 시절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 전 의원은 30일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남쪽에 안희정 씨 외에 또다른 비선라인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 씨의 비밀 대북접촉을 최초로 제기하기도 했던 장 전 의원은 “지난해 10월 20일 대북 비밀접촉 논란을 빚고 있는 시점에서 안 씨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을 찾아가서 이 문제를 상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북측에서 더 적극적으로 남측과의 비선라인을 찾고 있는 것 같고 남쪽에서도 지금 이 라인 외에 또다른 비선라인이 있지 않나 이런 의구심이 좀 강하게 든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한 고위관계자인 A 의원도 22일 기자와 만나 다수의 대북 비선라인 존재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대북통으로 잘 알려진 A 의원은 “지난해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자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관계 해법 차원에서 비선라인을 풀가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지난해 11월 노 대통령이 DJ의 자택을 직접 방문한 배경에도 두 사람의 정치적 앙금 해소와 더불어 경색된 남북관계 해법 차원에서 DJ의 자문을 얻기 위한 노 대통령의 고육책이 내포돼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선라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사가 구체적으로 누구냐’는 기자의 질문에 A 의원은 “노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386 세대 참모진과 대북 전문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만 말해줄 수 있다”며 “지난 2월 특사로 족쇄가 풀린 박지원 실장과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 등 DJ 정부 시절 대북정책을 진두지휘했던 인사들도 대북 비선라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과 청와대가 비선라인 외에 국정원과 통일부 등 대북업무와 관련있는 정부 채널을 풀가동하는 등 정상회담 극비 플랜을 물밑 가동하고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임기단축 발언에 이어 당적 정리 등 가용할 수 있는 승부카드를 어느 정도 소진한 노 대통령이 마지막 승부카드로 정상회담에 ‘올인’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정치권에서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나라당 주변에선 대선 막판 대반전 노림수와 맞물린 노 대통령의 정상회담 시나리오까지 나돌고 있다. ‘한미 FTA 협상 타결(4월 초)→ 북핵 6자회담 합의 이행(4월 이후)→ 한미 정상회담(6월)→ 북미 정상회담(8월)→ 범여권 대권후보 등장(9~10월)→ 남북정상회담(10월)→ 정권재창출(12월)’ 등으로 이어지는 수순을 밟을 것이란 게 시나리오의 골자다.
▲ 비밀리에 북측 인사와 접촉한 안희정 씨(왼쪽)와 이화영 열린우리당 의원. | ||
이와 관련 이화영 의원은 지난 28일 기자와 만나 사견임을 전제로 “연내에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6자회담 결과에 따라 다소 유동적이긴 하지만 국제관계는 흐름이 중요하다”며 “2+2 내지는 2+4회담 분위기가 무르익는 등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주변국과 북한의 기류가 원활한 만큼 남북 정상회담도 연내에 성사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정상회담 플랜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이 절실한 노 대통령이 FTA 최종 협상 과정에서 미국 부시 대통령과 정치적 빅딜을 시도했을 것이란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한나라당이 비선라인의 남북 비밀접촉과 관련해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 추진 방침을 정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김형오 원내대표는 30일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비선을 동원한 남북정상회담 추진은 대선용 또는 정치 판세를 흔들려는 의도”라며 “국민적 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으며 우리는 이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국정조사를 실시키로 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국정조사가 추진될 경우 비선라인의 대북 접촉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정치권 주변에서 나돌고 있는 청와대 차원의 정상회담 극비 플랜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를 병행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가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신북풍’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도록 사전에 방어막과 함께 상시 감시체제를 가동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