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여권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뚜렷한 시각차를 보이며 대립각을 세우자 범여권 내 대선주자들도 대권 이해득실을 따지며 치열한 노심(盧心)·김심(金心) 논쟁을 예고하고 있다. 또 전·현직 최고 권력자인 두 사람의 갈등은 현실화 단계로 접어든 범여권 5월 빅뱅설과 맞물려 범여권 세력 재편 및 대선지형에 지각변동을 부추기는 핵뇌관으로 작용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과거(DJ)·현재(노 대통령)·미래(대선주자) 권력이 뒤엉켜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는 범여권 권력투쟁과 차기 대권을 놓고 벌이는 노 대통령과 DJ의 진검승부 속으로 들어가 봤다.
노 대통령과 DJ는 참여정부 출범이후 반목을 거듭하며 적잖은 애증관계를 쌓아왔다. 지난해 11월 노 대통령이 DJ의 동교동 자택을 전격 방문한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복원됐을 것이란 관측에 무게감이 실렸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두 사람 간에 대권 연대 내지는 모종의 밀약이 오갔을 것이란 의혹이 제기될 정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 복원 기류는 오래가지 않았다.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권력의 속성과 DJ가 말한 ‘정치는 생물’이라는 표현을 입증이라도 하듯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권력암투를 전개해 왔다. 특히 범여권 발 정계개편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두 사람의 입장도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열린우리당 사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노 대통령은 범여권 통합파가 주도하고 있는 통합신당을 지역주의 회귀로 매도하고 있다. 그는 지난 2일 청와대브리핑에 올린 글을 통해 “열린우리당은 지역 간 대결을 극복하고 전국에서 경쟁이 있는 정치를 하자는 뜻으로 세운 정당”이라며 “지역주의에 기대려는 정치는 대결과 분열의 정치이며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 당부터 깨고 보자는 것은 파괴의 정치”라며 통합파를 싸잡아 비난했다. 열린우리당 지분을 양분하고 있는 정동영·김근태 전 의장의 탈당 움직임을 강력히 성토하는 동시에 범여권 통합을 주장하고 있는 DJ를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DJ는 범여권 통합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DJ는 2일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표와 회동에서 “국민이 바라는 것은 양당제도일 것이다.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는 금년 후반기에 가면 양당대결로 압축될 것”이라며 범여권 통합론을 거듭 역설했다. 그는 나아가 범여권 후보단일화만이 한나라당 후보에 맞서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임을 강조하고 있다. 범여권 통합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선후보와 관련해서도 두 사람은 분명한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
노 대통령은 아직 구체적인 대권 복심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노 대통령이 직접 주도한 ‘대선주자 흠집내기’ 전략에 비춰볼 때 노심의 향배는 영남·친노 주자에 근접해 있을 것이란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한나라당 빅2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 범여권 주자인 손학규 정동영 김근태 천정배 등 친노주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대선주자들을 ‘네거티브 리스트’에 올려놓고 흔들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시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범여권의 유력한 제3후보로 거론됐던 고건 전 총리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낙마 배경에도 노 대통령과 친노그룹의 보이지 않은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란 의혹도 끊이질 않고 있는 실정이다.
DJ는 쉽게 대권 복심을 드러내 보이지 않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섣불리 후계자를 지목했다가 자칫 그르칠 경우 거센 후폭풍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DJ는 범여권 주자 중 자신의 최대 치적인 햇볕정책을 계승·발전시킬 수 있고 범여권 통합노선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을 내심 의중에 두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한나라당 탈당이후 범여권 후보로 편입된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햇볕정책 계승을 주창하고 나오자 정치권 주변에서 ‘DJ-손학규 연대론’이 나돌았던 것도 이러한 관측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처럼 노 대통령과 DJ가 본격화되고 있는 대선정국에서 권력암투를 전개하면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자 범여권 대선주자들도 대권 이해득실을 따지며 정치 생명을 담보로 한 줄서기 경쟁에 돌입하고 있는 형국이다.
열린우리당 탈당을 예고한 정동영·김근태 전 의장이 노 대통령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이별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도 줄서기 경쟁과 무관치 않을 것이란 시각이다.
정·김 전 의장이 열린우리당과 노 대통령이라는 큰 우산을 빠져나와 독자적인 대권행보를 걷기 위해서는 호남의 대부이자 민주평화세력의 대부로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DJ라는 또 다른 큰 지원군이 절실할 것이다. 열린우리당과의 이별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두 사람이 노 대통령을 향한 거친 공격을 서슴치 않고 있는 배경에는 김심을 얻기 위한 고육책도 어느 정도 투영돼 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특히 정 전 의장은 9일 참여정부 평가포럼을 즉각 해체하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호남과 충청 연합의 지역주의 정당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발언이야말로 지독한 지역주의”라며 “DJ·노무현을 지지했던 호남·충청의 민심이 지역주의였다는 말이냐”며 노 대통령과 청와대를 연일 공격하고 있다.
김 전 의장도 지난달 18일 광주를 방문해 “김근태가 살아 있는 호남 정신의 진정한 계승자다. 작년 가을 북핵 위기 때 정치권 밖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있었다면 정치권에는 김근태가 있었다”며 호남과 김심 얻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
손학규 전 지사와 민생정치모임의 천정배 의원 역시 ‘탈노무현’과 동시에 ‘DJ 코드’로 전환 중이다. 노 대통령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범여권 대선주자들이 DJ를 구심점으로 세력 확장과 대권주도권 장악을 도모하고 있는 형국이다.
노 대통령 진영과 DJ 진영의 보이지 않은 대권암투는 남북관계 영향력 행사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카드는 연말 대선정국의 최대 변수로 꼽히고 있다. 대선 전에 정상회담이 개최될 경우 범여권은 대권 주도권을 장악할 더 없는 호기를 잡을 수 있고 정상회담을 주도한 쪽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DJ와 그 측근들이 줄기차게 ‘DJ 대북특사’를 주장했던 것이나 남북관계에 별다른 진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과 청와대가 DJ 카드를 애써 외면했던 배경에는 대선 영향력을 고려한 양측의 전략이 내포돼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 올해 들어 노 대통령이 이해찬 전 총리와 김혁규 의원 등 친노주자들에게 대북문제와 관련해 역할을 분담시키면서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도 대권 전략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운찬 전 총장이 퇴장한 배경에도 노 대통령과 DJ의 대권암투가 작용했을 것이란 관측을 제기하고 있다. DJ와 교감하고 있는 동교동계가 정 전 총장과 자주 접촉하며 범여권 후보로 정 전 총장을 적극 지원할 움직임을 보이자 위기감을 느낀 노 대통령과 친노그룹이 정 전 총장을 압박해 결국 불출마를 유도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 실제로 동교동계는 정 전 총장 낙마 이후에도 범여권 주자 중 DJ의 정책과 정치철학을 계승시킬 수 있는 주자를 두루 접촉하며 경쟁력과 자질을 검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노 대통령과 DJ는 각각 친노주자와 햇볕정책 계승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자신이 염두에 둔 후계자가 범여권 최종주자로 선택될 수 있도록 치열한 권력 파워게임을 전개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범여권이 대선 막판에 ‘반한나라당’ 전선에 의기투합해 ‘후보단일화’를 추진할 경우에도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의 후계자를 최종후보로 내세운다는 복심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본격화되고 있는 노 대통령과 DJ의 권력암투가 범여권 세력 재편 과정 및 치열한 대권구도에서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또 파괴력은 어느 정도일지 두 거물의 대결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