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나물 가지나물 호박나물 피마자 토란대 고사리 고구마순 고춧잎 시래기 등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대보름에 말린 나물 요리를 푸짐하게 준비해 먹었다.
말린 나물을 먹은 것은 사계절 내내 푸른 채소를 먹을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겨울에는 채소가 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부터 가을까지 제철에 나는 채소를 그때그때 잘 말려두었다가 겨울 동안 하나씩 꺼내 먹었다.
또 대보름이 지나고 나면 봄나물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파릇파릇한 봄나물이 나오면 말린 나물에 손이 가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새봄이 오기 전에 먹다 남은 말린 나물을 다 먹어버리기 위해 대보름 상에 나물을 올렸다고 한다.
‘대보름에 말린 나물을 먹으면 그 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속설도 있지만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다.
말린 나물을 생 채소와 비교했을 때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 채소를 말리는 과정에서 비타민 C나 엽산 등 열에 약한 영양소가 어느 정도 파괴되기는 해도 생 채소와 크게 차이가 없는 각종 비타민이 들어 있다.
반면 수분이 줄어들면서 섬유질과 미네랄 성분은 농축돼 생 채소보다 훨씬 많아진다. 우선 섬유질은 말린 나물의 질깃한 맛을 내는 성분으로, 변비를 없앤다. 섬유질이 물을 흡수해 대변의 부피를 증가시키고, 변의 습기를 유지시켜 쾌변을 돕는 것이다.
이미숙 서울여대 식품영양학과 교수(식생활클리닉 ‘건강한 식탁’ 대표)는 “다만 말린 나물을 지나치게 많이 섭취해 섬유질 과잉 상태가 되면 오히려 변이 단단해질 수 있다”며 “이것을 막으려면 충분한 수분을 함께 섭취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말린 나물을 통해 섬유질을 잘 섭취하면 다이어트에도 좋다. 섬유질은 칼로리가 없으면서 먹었을 때 포만감을 느끼게 해준다.
병원에서 고지혈증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경우에도 말린 나물을 가까이하면 좋다. 섬유질이 몸에 해로운 각종 중금속이나 콜레스테롤 등의 유해물질을 흡착해 몸 밖으로 배출시킨다. 또한 영양의 흡수속도를 생리적인 수준, 즉 치아나 위 소장 대장 간장 등의 기관이 무리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영양분이 천천히 흡수되면 혈당이 천천히 오르기 때문에 당뇨병을 예방·개선하는 데 좋다.
섬유질이 많은 식품을 자주 먹으면 두뇌 발달, 치매 예방에 좋다는 보고도 있다. 질기기 때문에 많이 씹어서 삼킬 수밖에 없는데, 많이 씹을수록 뇌의 혈류량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나라 사람들의 하루 평균 섬유질 섭취량은 13g 정도. 전문가들은 하루에 25~30g 정도의 섭취를 권한다. 이 정도의 섬유질을 섭취하기 위해서는 대보름에 오곡밥에 말린 나물을 먹는 것처럼 평소 잡곡밥을 먹고 여러 가지 채소, 해조류를 자주 먹는 것이 좋다.
하지만 말린 나물 같은 고섬유질 식품은 소화기관에 오래 머무르기 때문에 수술 후 회복기에 있는 사람이나 대장암, 만성 위염 등을 앓고 있는 환자는 피하는 것이 좋다. 소화가 잘 되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말린 나물에 농축된 칼슘, 철 등의 미네랄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미네랄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데 3.5%가량을 차지하는 미량 영양소다. 하지만 인체를 구성하는 54종의 원소 가운데 50종이 미네랄이기 때문에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안 된다. 어느 한 가지가 부족해지면 다른 미네랄에도 영향을 미쳐 인체의 모든 균형이 깨진다.
다만 만성 신부전 환자는 칼륨, 인 등의 미네랄이 농축된 말린 나물이 신장에 부담을 줄 수 있다.
대보름에 준비하는 나물은 보통 아홉 가지에 이른다. “홀수를 길한 숫자로 여겨온 사상이 반영돼 있다. 찹쌀, 차조, 팥, 콩 등 다섯 가지 곡류로 짓는 오곡밥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 이미숙 교수의 설명이다.
하지만 아홉 가지를 준비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일곱 가지 또는 다섯 가지 말린 나물을 준비해서 먹기도 했다. 이들 나물의 종류에 따라 어떤 효능이 있을까.
씁쓸한 맛의 취나물은 오곡밥을 싸먹는 복쌈의 재료. 영양이 뛰어나 ‘산나물의 왕’으로 불린다. 당분과 단백질 외에도 칼슘 인 철분 등의 미네랄이 고루 들어 있고 비타민 중에서는 비타민 A B1 B2 등이 풍부하다.
▲ 정월 대보름에 먹는 나물은 각종 영양소의 보고다. 사진은 무말랭이.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취나물의 종류는 60여 가지가 넘는데 종류에 따라 효능이 다르다. 예를 들어 쌈을 싸먹는 곰취는 통증을 없애고, 참취는 해독작용이 강하다. 개암취는 간 기능을 보호하고 피부건강에 좋다.
취나물을 생으로 먹으면 수산이 많아 몸속의 칼슘과 결합, 결석이 생길 우려가 있다. 하지만 수산은 열에 약해 끓는 물에 살짝 데치기만 해도 제거된다.
버리기 쉬운 무청을 잘 말린 것이 시래기. 무청은 무보다도 비타민A와 C, 칼슘이 더 많고 섬유질이 풍부하다. 또 질병과 노화를 부추기는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베타카로틴, 클로로필 같은 천연 항산화 성분도 많이 들어 있다.
특히 무청의 푸른색을 내는 색소인 클로로필은 지방의 산화를 방지하고 항암과 항돌연변이 효과도 크다. 고콜레스테롤 식이를 한 흰쥐를 대상으로 무청파우더를 먹게 했더니 무청이 간조직의 항산화 방어 효소를 활성화시켜 산화가 억제됐다는 국내 연구 결과가 나온 바 있다. 이런 이유에서 고지혈증이 있거나 흡연이나 과음, 스트레스 등 유해 활성산소가 생기기 쉬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시래기 나물을 자주 먹는 것이 좋다.
무말랭이에는 녹말 분해효소인 디아스타아제가 들어 있어 탄수화물 식품의 소화를 돕는다. 무말랭이는 껍질째 만든 것이 영양면에서 좋다. 속보다 껍질에 비타민 C가 더 많기 때문이다.
별 영양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 가지. 하지만 가지 100g에는 210mg이나 되는 칼륨이 들어 있다. 말린 가지의 경우 칼륨의 함량이 10배로 증가해 훌륭한 칼륨 공급원이다.
가지 특유의 색을 내는 안토시아닌 계열의 색소인 나스닌(자주색)과 히아신(적갈색)은 피를 맑게 해준다. 이 두 가지 성분이 지방을 흡수하고 혈관 내의 노폐물을 녹여 배설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지혈증이나 고혈압, 동맥경화 등을 예방하는 데 가지만큼 좋은 식품도 드물다.
또한 스코폴레틴, 스코파론이라는 성분이 있어 통증을 줄여주고, 발암물질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어서 난소암에서의 암세포 증식을 억제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한방에서는 가지를 ‘가자(茄子)’라는 약재명으로 부른다. 성질이 차가워서 열을 내리고 혈액순환을 도우며 통증, 부기를 줄이는 효능이 있어 혈변을 보거나 종기가 있어 열이 날 때, 피부가 벗겨졌을 때 주로 처방한다.
다만 성질이 차가운 식품이므로 냉증이나 천식이 있는 사람, 기침을 하는 사람, 임신부는 많이 먹지 않도록 한다.
가지는 가능하면 튀김이나 조림 등 기름을 이용한 조리방법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리놀레산과 비타민 E 같은 지용성 성분의 흡수율을 한결 높일 수 있다.
표고버섯이나 석이버섯 등 말린 버섯도 대보름 나물의 재료로 빠지지 않는다. 생 표고버섯은 질감이 부드러워서 좋지만 영양면에선 말린 표고버섯이 더 낫다. 햇볕에 말리면 에르고스테린 성분이 비타민 D로 변해 칼슘의 흡수를 돕는다.
또 표고버섯에는 ‘에리타데닌’ 이라고 해서 혈압을 낮추는 성분이 들어 있다. 물에 불리면 이 성분이 잘 우러난다. 혈압이 높은 사람은 잠자기 전에 말린 표고버섯 한 개를 한 컵의 물에 담가뒀다가 다음날 아침 마시면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 중국요리에서 돼지고기를 사용할 때 표고버섯이 빠지지 않는 것도 섬유질이 콜레스테롤 흡수율을 떨어뜨려 고혈압, 동맥경화 등의 성인병 걱정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표고버섯은 ‘레티난’을 비롯한 여섯 가지 다당체가 들어 있어서 항암효과가 우수하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004년에 말린 표고버섯을 10대 항암식품으로 선정했다.
고구마순은 섬유질이 풍부해 변비는 물론 다이어트, 대장암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또 칼슘이 많아 뼈 건강이 걱정되는 사람이 자주 먹으면 좋다. 같은 무게를 기준으로 할 때 말린 고구마순에는 우유의 10배나 되는 칼슘이 들어 있다. 참고로 말린 토란대는 우유의 6배, 무말랭이는 2배의 칼슘이 들어 있다.
짜게 먹는 식습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칼륨도 다른 채소보다 많다. 칼륨은 세포 내의 화학반응에 관여해 정상 혈압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주는 영양소로 고혈압 예방에 좋다.
호박오가리는 애호박 또는 늙은 호박을 말려서 만든다. 모두 탄수화물 외에도 비타민 B와 C, 베타카로틴이 풍부해 평소 눈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 먹으면 좋고, 피부도 고와진다. 또 이뇨와 해독 작용을 해 간이 나쁘고 체질이 냉한 사람에게 잘 맞는다.
송은숙 건강전문 프리랜서
도움말=이미숙 서울여대 식품영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