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최근 강재섭 대표의 경선 중재안에 강하게 반발하자 일각에선 탈당까지 거론하고 있다. | ||
사실 이번 경선 룰 논란은 솔로몬 왕의 할아버지가 와도 공정한 결론을 내기 힘들게 돼 있다. 어떤 안을 내더라도 양측에게는 미진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정치적 해결이 필요했다. 이에 강재섭 대표는 친박 진영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말까지 들으며 최후의 중재안을 내놓았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미흡하지만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박 전 대표는 강 대표의 안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자칫하면 박 전 대표가 당 분열 초래와 정권 재창출 실패의 ‘독박’을 쓰게 생겼다. 당 주인을 자처하던 박근혜 전 대표. 왜 그는 ‘벼랑 끝 전술’을 쓸 수밖에 없었을까.
‘그녀’는확실히 변했다. 평소 언행이 상당히 절제돼 있고 신중하기로 소문이 나 있는 박근혜 전 대표. 기자들도 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신중하게 계산된 그의 발언에서 ‘꺼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기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터뷰하기 어려운 정치인으로 꼽힌다. 뻔한 대답만 돌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변했고, 변해가고 있다. 특히 박 전 대표의 언행이 평소와 달리 ‘정제’되지 않고 직설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화된 ‘징후’가 재보선 뒤 더욱 늘어났다. 한때 그는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말을 히트시키며 ‘언어의 마술사’로도 불렸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의 언사는 ‘부정적인’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경선 룰 변경과 관련해 “처음 혁신안도 그렇고 지난번에 8월 20만 안도 이 전 시장은 바꾸자고 자꾸 주장해 걸레 같이 만들었다”고 밝힌 ‘걸레 발언’이었다. 그 뒤 강재섭 중재안과 관련해서도 “다 어그러졌는데, 기가 막힌다”라고 말했던 것과 “고스톱 모두 아시죠? 고스톱을 칠 때도 한번 정한 룰을 치다가 바꿉니까?”라고 반문하는 부분도 “그럴 수 있다”는 주장보다는 박 전 대표의 ‘바른생활’ 이미지와는 맞지 않다는 평가가 더 많다.
박 전 대표를 80년대 초부터 알고 지내온 A 씨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걸레’나 그런 말을 전혀 안 하는 사람인데 이번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당의 상황이 매우 어렵게 가는 것 같다. 그동안 이 전 시장과 대결하면서 박 전 대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말들이 자꾸 나오기 시작하면 박 전 대표의 부정적인 이미지만 굳어질까 봐 걱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한 박 전 대표 측의 입장은 “박 전 대표의 말보다 지금 돌아가는 당의 상황을 먼저 보라. 그동안 경선 룰과 관련해 몇 번 양보했지만 또 이렇게 불공정한 안을 덥석 받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느냐. 박 전 대표는 한번 정한 원칙에 대해선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그가 하는 말들도 그런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의 달라진 말투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가 그렇게 말하는 배경에 잘못된 정보나 조언이 개입됐다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최근 캠프 내부에서는 ‘박 전 대표를 감싸고 있는 의원들이 후보 검증을 둘러싸고 과도하게 이명박 전 시장에 대한 나쁜 인상을 집어넣으면서 박 전 대표가 그에 경도돼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 지난 9일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운데)가 경선 중재안을 만들었으나 박 전 대표는 수용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두 번째의 강공 배경은 박 전 대표가 원칙에 관한 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으로 통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대응이라는 것이다. 그는 최근 “원칙을 걸레처럼 만들어놓으면 누가 그것을 지키겠느냐”라는 ‘과격한’ 말까지 하며 경선 원칙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사실 박 전 대표에게 원칙이라는 단어는 정치의 처음이자 끝이다. 그는 특히 정치권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벤트나 ‘정치적 쇼’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경선 전략을 짜는 참모들도 ‘현실 정치’와 괴리가 있다며 이벤트를 적절히 사용할 것을 조언하지만 질책만 받기 때문에 최근에는 아예 건의하는 것도 조심스러워한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박 전 대표의 경선 룰 강경 노선이 그의 비밀 전략팀인 ‘강남팀’(일부에서는 논현동팀이라고도 부름)에서 주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 팀은 박 전 대표가 정계 입문 때부터 정치 전략에 관한 조언을 듣던 비밀 사조직인 것으로 알려진다. 일부에서는 한때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J 씨와 박 전 대표의 친인척이 관련돼 있다는 얘기도 있다. 박 전 대표 캠프 사정을 잘 알고 있는 B 씨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강재섭 중재안과 관련해 의견을 표명할 때(5월 10일 아침 발언) ‘경선에 참여 안 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해 크게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당을 깨자는 의미로 해석됐기 때문에 언론도 크게 다뤘다. 박 전 대표 발언이 알려지자 캠프 인사들이 의외의 초강수에 가장 먼저 놀랐다고 한다. 캠프 공식 회의 석상에서는 경선 불참은 검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가 나중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경선 구도를 송두리째 흔드는 그런 파격적인 발언은 캠프 내 의원들이 결정할 수준이 아니다. 그래서 박 전 대표의 강남팀에서 이번 경선 룰 정국의 주요 사안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 캠프에서도 ‘강남팀’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 캠프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일부에서 ‘강남팀이 너무 전략 수립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도 터져나온 것으로 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오랫동안 같이 일해오던 사람들이니 신경 쓰지 말라’는 반응을 보이며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박 전 대표 아래에서 당직을 지냈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박 대표 주재 회의 중 어떤 사안에 대해 한참 얘기하고 결론까지 났던 일이 아무런 이유 없이 밤 사이에 바뀐 적이 몇 번 있어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마 박 전 대표의 비밀팀이 개입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박 전 대표 측의 한 관계자는 “어느 대권 주자도 사조직이 다 있었다. 밖에서 제 3자의 시각이나, 국민들의 눈높이로 조언을 해줄 수 있다고 본다. 박 전 대표가 사조직에 의해 잘못 판단할 만큼 허점이 많은 분이 아니다. 그리고 최근의 강경책이 강남팀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동안 박 전 대표는 여러 번 경선 룰에 관해 양보했는데 말도 안 되는 안을 가지고 받아들이라고 하니까 당연하게 대응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박 전 대표 캠프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조직이라고 모두 이상한 시각으로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캠프 내에서 논의되고 검증되지도 않은 비밀팀의 전략들이 갑자기 치고 들어와 공식적인 전략들을 엎어버린다면 캠프에서도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경선 룰 과정에서 박 전 대표의 여과되지 않은 몇몇 발언들이 강남팀의 강경한 조언 때문에 에스컬레이트(상승작용)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든다”라고 말했다.
한편 박 전 대표를 잘 알고 있는 앞서의 A 씨는 박 전 대표의 강공책에 대해 색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는 “박 전 대표는 23세 때부터 청와대 퍼스트레이디로서 권력의 부침을 모두 지켜본 사람이다. 그는 이명박 전 시장의 정신적 지주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수없이 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정 회장의 일개 ‘신하’에 지나지 않았던 이 전 시장은 어떻게 보겠는가. 한마디로 우습게 볼 것 아닌가. 박 전 대표의 이런 시각도 최근의 강공책을 이끄는 원인(遠因)이 되었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탄핵 정국에서 온몸으로 당을 지켜낸 한나라당의 ‘잔다르크’였다. 하지만 어느새 그는 탈당까지 거론될 정도로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제 그는 ‘탄핵의 추억’을 떠올리며 정치 생명을 건 최후의 승부수를 띄울 날을 기다리고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