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대연합 통한 HC 대세론 굳히기 작전’ 문건(왼쪽)과 ‘한나라당 빅3, 2007년 대선 경쟁력 분석’ 문건. | ||
그런데 실제 미국이 지난 2002년 16대 대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원하는 등 보다 구체적으로 개입했거나 혹은 개입하려 한 정황이 담긴 중요 문건들을 <일요신문>이 단독 입수했다. ‘국민대연합 통한 HC 대세론 굳히기 작전’ 등의 이 문건들은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의 미국 스파이 의혹을 수사했던 검찰이 백 회장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확보한 것이다.
<일요신문>은 최근 2400여 쪽에 달하는 검찰의 수사기록 전량을 입수, 면밀히 검토하는 과정에서 검찰이 증거물로 확보한 몇 건의 대선 관련 문건들을 찾아냈다. 그런데 일부 문건에서 미국 혹은 미국의 주요 인사가 국내 대선에 관여한 듯한 정황이 발견된 것이다.
지난 4월 30일 서울남부지검은 백 회장의 미국 스파이 의혹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백 회장이 신현덕 전 경인방송 대표에게 국내 정세분석 자료를 작성토록 지시한 점과 이를 영어로 번역해 미국에 보낸다고 말한 점이 인정된다. 따라서 이를 국회에서 부인한 백 회장을 위증 혐의로 기소했다. 또 신 전 대표도 국회에서 ‘백 회장 측에서 협박을 받고 있다’고 거짓 증언한 혐의로 같이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그러나 백 회장이 실제로 국내 정보팀을 운영하거나 문건을 해외로 유출한 의혹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 불기소 처분했다” 밝혔다.
검찰의 이 같은 수사 결과 발표가 나오자 “검찰이 상당히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또 다른 의혹’만 낳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사건의 핵심인 정보유출 의혹에 대해서 “정황은 인정되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한 것과 맞고소 당사자인 백 회장과 신 전 대표를 똑같이 위증 혐의로 기소한 것은 사건의 파장을 더 확대시키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
<일요신문>은 항간에 나돌고 있는 검찰의 부실 수사 및 은폐 의혹을 확인하기 위해 검찰의 수사기록 확보에 나섰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의외의 문건들이 발견됐다.
이 가운데에는 지난해 10월 신 전 대표의 국회 폭로로 인해 이미 알려진 ‘D-47’ 문건과 ‘S-8’ 문건들 외에도 ‘S-1’ 등 7건과 ‘D-47’의 영문 번역 문건 등 여러 건의 문건들이 더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자가 주목한 것은 ‘국민대연합 통한 HC 대세론 굳히기 작전’과 ‘한나라당 빅3, 2007년 대선 경쟁력 분석’ 문건이었다.
앞의 문건은 백 회장 비서실 직원인 허 아무개 씨의 컴퓨터에서 발견됐고 뒤의 문건은 배 아무개 US아시아 한국지사장의 사무실에서 검찰이 각각 압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배 지사장은 백 회장과 함께 정보유출 의혹 수사를 받은 백 회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두 문건의 실체에 대해 검찰은 수사 결과 보고서에서 ‘영안모자 회장 비서실 등을 압수수색하여 컴퓨터 18대의 본체 또는 하드디스크를 분석한 결과 비서실 컴퓨터 2대, 영문 번역자라고 하는 홍○○의 컴퓨터 1대 등 3대가 2006. 10. 31 신현덕의 국감 증언 이후인 2006. 11.경 교체되거나 포맷되기는 하였으나 비서실 컴퓨터에서 다음과 같이 국내외 정세와 관련된 문서파일이 발견됨’, ‘배○○은 이에 대하여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다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왜 그러한 문건이 발견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진술하고 있어 어떠한 경위로 동 문건이 배○○의 사무실에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아니함’이라고 각각 밝히고 있다.
기자가 입수한 ‘국민대연합 통한 HC 대세론 굳히기 작전’ 문건은 비서실 직원 허 씨의 컴퓨터에 2001년 4월 23일 오후 5시 17분에 ‘이실장님.xls’라는 제목의 파일로 저장되어 있었다. 만든 이는 영문으로 ‘youngan’(영안)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내용은 ‘국민대연합 업무 분장 조직표’와 ‘HC의 업무 관리 시스템’ 등 두 항목으로 나뉘어져 있다. 조직표는 ‘총괄조정팀’과 ‘우익단체·우익언론’ ‘U-B, US’가 ‘HC’와 상호 교류를 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HC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가리킨다는 것이 검찰 주변의 관측이다.
▲ 백성학 회장 | ||
문건 내용을 보면 국민대통합 총괄조정팀 산하에 ‘HC 공조직’과 ‘HC 사조직’이 있고 그 아래에 지역별 공조직 또는 사조직이 지역 명칭으로 나열되어 있다. 또한 업무 관리 시스템 항목에는 ‘1) 우익단체 및 우익언론에서 인선안 등 중요 업무를 HC에게 보고 및 협의 결정. 2) U-B, US 진영에서 중요한 사안을 HC와 협의하고 중요사항을 결정. 3) HC는 1) 및 2)의 보고 내용 중 필요한 부분만 총괄조정팀에게 위임하여 업무를 진행해 나감’이라고 명기돼 있다.
그렇다면 문건에 등장하는 국민대연합과 백 회장 측은 실제 이 전 총재와 상관관계가 있었을까. 5년 전의 일이어서 직접적인 당사자 확인은 쉽지 않지만 관련 정황은 제법 드러난다. 백 회장은 얼마 전 언론에 공개된 대화 녹취록에서 2002년 대선 당시 이 전 총재의 최측근이었던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유달리 강조했다. 그는 이 녹취록에서 “유승민하고 쓰는 전화가 있어. 그건 아주 나하고 우리 하는 일을 같이 많이 했어. 괜찮아. 유승민은 머리 좋은 애야. 내가 직접 5년 반을 관리했다고. 그 후에 그러고 창한테 넘어갔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 이 전 총재는 지난 2002년 4월 4일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국가 미래를 위해 나가는 길에 공감하는 세력은 모두가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이다. 이를 ‘국민대연합’이라고 이름 붙인 바 있다”고 말했다.
결국 ‘…HC 대세 굳히기’ 문건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미국 혹은 롤리스 부차관이 지난 국내 대선에 일정 부분 개입해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지원했거나 지원하려 했다는 의혹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백 회장 측이 지난 2002년 대선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개입한 흔적에 이어 최근의 2007년 대선 정국에 대해서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왔음을 보여주는 문건도 발견됐다. ‘한나라당 빅3, 2007년 대선경쟁력 분석’이라는 제목의 이 문건은 2006년 9월 작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앞으로 대선까지 1년 4개월 정도 남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지금과 같은 (한나라당) 지지율을 유지하고 확실히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보다 치밀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며 ‘한나라당의 과거: 역대 대선 실패 원인’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거기에는 ‘한나라당이 대선과정에서 지나치게 수구 보수적인 행태를 보임으로써 중도층이 이 후보로부터 이탈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등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이 문건은 한나라당 주요 대선주자 빅3에 대해서 평을 하고 있는데 ‘현재의 지도층과 박근혜 대표로는 2007년 대통령 선거의 본선 경쟁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며 ‘이명박 전 시장은 경영인 출신으로 청계천 복원과 서울시 대중교통 체계 정비로 많은 시민들에게 변화 개혁 강한 추진력의 인물로 인식되어 중도층의 두터운 지지를 받고 있음’ ‘손학규 전 지사는 중도성향이지만 대중적 지지도가 약해 이 전 시장이 낙마하지 않고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으로 분석됨’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문건은 ‘결론적으로 2007년 대선에서는 중도 성향의 변화와 개혁 추진력을 겸비한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가장 본선 경쟁력이 있으며 현재 한나라당의 대권주자 중에서는 이 전 시장이 중도세력의 표를 결집시킬 인물로 가장 적합’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문제의 문건은 한나라당 김 아무개 의원의 보좌관인 이 아무개 씨에 의해서 작성, 백 회장에게 직접 전달된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밝혀졌다. 이 씨는 지난 1월 16일 검찰 조사에서 “이 문건은 2006년 9월 한나라당 보좌관 협의회 토론 자료를 위해 작성한 것”이라며 “이후 지난해 10월 중순경 백 회장 사무실에서 직접 건네줬다”고 진술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는 “백 회장이 방송을 하려면 국내 정세 등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되어 참고하시라고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 건네준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자료에 대해서 백 회장과 배 지사장 측은 “그냥 참고 자료로 건네받은 것뿐”이라거나 “문건에 대해 알지 못한다”며 연관성을 부인한 것으로 밝혀졌다. 배 지사장은 기자의 확인 요청에 “현재 공식적으로 인터뷰를 못하게 되어 있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백 회장은 미국 출장 중이라고 회사 관계자가 밝혔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