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전 두산그룹 회장)에게 그룹 회장직을 넘겨받은 박정원 회장은 ‘조용한 리더십’으로 연매출 17조~18조 원대 대기업을 이끌고 있다. 전임 박용만 회장과 달리 외부 스킨십을 자제하는 박정원 회장은 취임 일성에서 그룹 재무구조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첫 시험대는 올 하반기 기업공개(IPO) 최대어로 평가받는 두산밥캣 상장이다. 두산밥캣은 미니굴삭기 등 중소형 건설 장비를 생산해 온 제조업체다. 이 가운데 소형(Compact) 건설 장비 부문은 주요 제품(SSL·CTL)들이 북미·유럽 시장에서 점유율 1위(30~48%)를 기록할 정도로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최근 3년 간 두산밥캣 매출의 64~69%는 북미 및 오세아니아 지역에서 발생했다. 국내 매출 비중은 1~2%로 미미한 수준이다.
두산이 지난 22일 프로야구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었다. 사진은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이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오는 10월 12~13일 청약이 예정된 두산밥캣의 공모 희망가액은 4만 1000~5만 원이다. 전체 공모 규모는 2조 82억~2조 4491억 원, 상장 후 시가총액은 4조 1000억~5조 원로 추산된다. 두산 계열사인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엔진은 각각 보유 중인 주식 2322만 8585주, 413만 1290주를 매각해 1조 2000억 원 안팎의 자금을 확보할 것으로 기대된다. 두산밥캣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증권신고서에 따르면 두산인프라코어 등 그룹 계열사는 IPO 이후에도 두산밥캣 지분 51%를 확보해 경영권을 행사한다.
증권업계는 두산밥캣 상장의 흥행 여부에 따라 두산그룹 재무구조 개선 작업의 명암이 갈릴 것으로 보고 있다. 2016년 상반기 기준 지주사 ㈜두산의 부채 비율은 264.46%로 2015년 4분기(275.96%)보다 나아졌지만 ‘부채 리스크’가 해소됐다고 보긴 어렵다. 특히 올 상반기 기준 16조 6344억 원에 달하는 금융부채는 언제든 두산의 유동성을 위협할 수 있다. 두산의 금융부채 가운데 1년 내 상환해야 하는 금액은 10조 4618억 원에 달한다. 이상현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두산밥캣 IPO가 이뤄지는 이유는 (두산밥캣의 자금 소요보다)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엔진 등 최대주주의 재무구조 개선 목적이 더 크다”고 짚었다.
박용만 회장은 앞서 2007년 그룹 내 글로벌 인수합병(M&A)을 주도하면서 미국 자본이 소유한 밥캣을 49억 달러(당시 환율 기준 5조 7000억여 원)에 인수했다. 두산인프라코어 관계자는 “당시 중형 기계 및 중국 시장에 한정돼 있던 두산인프라코어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넓혀야 한다는 (경영진의) 공감대가 있었고, 밥캣 인수에 힘입어 소형 기계 및 글로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밥캣 인수는 단기적으로 미국발 금융 위기와 맞물려 두산의 유동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두산은 밥캣 인수를 위해 39억 달러를 차입했지만 2008~2010년 밥캣의 실적은 기대치를 밑돌았다. 앞의 관계자는 “미국 건설 경기 추락으로 2011년이 돼서야 (밥캣이) 턴어라운드에 성공했다”며 “현재는 미국 주택 경기에 대한 기대치가 높고, 건설 장비에 대한 글로벌 시장의 수요도 4년 사이 25%가 늘어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산밥캣은 지난해 기준 35억 7117만 달러(한화 약 4조 원)의 매출과 3억 4076만 달러(약 3800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올 상반기에도 각각 전년 실적을 웃도는 18억 1874만 달러의 매출, 1억 9862만 달러의 영업이익을 거두었다. 지난해 기준 연결재무제표상 두산인프라코어의 총 매출 규모가 약 6조 원인 것을 고려하면 전체 매출의 66.6%를 밥캣이 책임진 셈이다.
밥캣을 소유한 두산인프라코어는 두산중공업과 함께 그룹을 견인해 온 핵심 계열사다. 금융감독원 공시에 따르면 두산인프라코어의 올 상반기 매출은 3조 3100억여 원으로 두산중공업의 매출(2조 1400억여 원)보다 많다. 그간 두산의 재무 리스크가 커진 이유는 핵심 계열사인 두산인프라코어의 순차입금이 증가하고 부동산 침체 등으로 건설 장비 수요가 줄어들면서 회사의 부채 상환 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탓이다.
때문에 이번 IPO는 두산인프라코어의 순차입금을 줄이는 데 그 방점이 찍힌다. 2015년 말 기준 5조 1000억 원에 달했던 두산인프라코어의 순차입금은 2016년 상반기 기준 공기사업부 매각 등으로 1조 원이 줄었으며, 이번 IPO로 다시 1조 원 정도가 추가 상환될 전망이다. 두산 다른 관계자는 “이번 IPO로 구조조정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산밥캣 상장에는 몇 가지 변수가 있다. 이 회사의 주요 자회사인 DHEL은 2013년 이후 계속 당기순손실을 보이고 있으며, 대부분 영업이 해외에서 이뤄지는 까닭에 달러화 대비 환율 변동에 민감하다는 것이 공모가에 일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미국발 금리인상은 원화로 환산된 밥캣의 실적을 높여 배당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지만 유로화 등에 영향을 미쳐 북미 이외의 시장에서 점유율을 떨어뜨릴 수 있다.
부동산 시장의 불확실성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두산밥캣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고평가됐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 두산인프라코어 관계자는 “시장 일각의 우려는 알지만 이번 주부터 직접 기관투자자들을 만나 정확한 시장 반응을 체크할 것”이라며 “소형 기계 분야 글로벌 1위 업체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표면적으로 밥캣 IPO는 박용만 회장이 ‘결자해지’의 각오로 총괄하고 있지만 박정원 회장의 역할도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끊임없이 보고를 받고 회사 중요 현안들을 챙긴다는 것이다. 그룹 재무구조 개선 작업과 함께 박정원 회장은 그룹의 새로운 슬로건인 ‘두산은 지금, 미래를 준비합니다’를 발표하고 연료전지 사업 등 신성장 동력 발굴에 매진하고 있다. 에너지·발전 분야는 박정원 회장이 가장 고심하는 사업 영역이다.
두산 관계자는 그룹의 미래 먹을거리 중 하나로 ‘엔진’을 지목했다. 실제 두산엔진의 올 상반기 매출은 3743억 원으로 그룹 세 번째 계열사인 두산건설의 매출(5865억 원)을 추격하고 있다. 두산그룹의 전체 매출은 2014년 18조 1900억 원에서 지난해 16조 9000억 원, 올 상반기에는 7조 9600억 원으로 감소세에 있지만 같은 기간 부채비율이 감소하고, 영업이익이 증가했다는 것이 두산의 설명이다. 3세(박용만) 경영 당시 대형 M&A로 ‘그룹’의 몸집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면 4세 경영 시대에 들어와서는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실제 두산은 지난 5월 방산업체 두산DST를 한화에 매각했다.
2014년 희망퇴직 논란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두산은 그동안 묵묵히 ‘미래’를 준비했다. 이번 IPO는 그 미래를 가늠할 시험대로 평가받는다. 전임 박용만 회장이 남긴 ‘구조조정’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해선 최대한 많은 자금을 모집해야 한다. 프로야구 우승 확정 당시 포착된 박정원 회장의 미소가 밥캣 IPO까지 이어질지 관심을 모은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