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일 참여정부평가포럼 강연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한나라당과 이명박 박근혜 후보를 작심하고 비난했다. 결과를 예측하고 던진 노 대통령의 승부수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한나라당이 또 다시 미끼를 문 꼴이다.” 선관위 결정 후에도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상대로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는 한나라당 분위기를 지켜본 정보기관 관계자 A 씨가 던진 말이다. 청와대 소식에 정통한 A 씨는 7일 저녁 기자와 만나 “노 대통령은 탄핵 한방으로 소수정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을 원내 1당으로 만든 반전의 달인”이라며 “그런 노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 논란에 휩싸일 것을 뻔히 예상하면서 독설 카드를 꺼내 든 것은 뭔가 노림수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단언했다. ‘노림수가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A 씨는 “정치 10단의 포석을 어떻게 헤아리겠느냐”고 하면서도 “노 대통령이 선관위 결정으로 국정운영이나 정치행보에 타격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이지만 이번 건이 장기화될 경우 오히려 정국 주도권은 노 대통령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열린우리당 2차 집단 탈당 움직임이 감지되면서 범여권 빅뱅이 현실화 단계로 접어든 상황에서 노 대통령이 독설 카드를 들고 나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범여권 대통합론과 연말 대선정국을 겨냥해 단계별 시나리오가 물밑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노 대통령의 독설 발언 이면에는 뭔가 정치적 노림수가 내포돼 있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2003년 12월과 2004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선관위로부터 ‘선거법 위반’이란 옐로카드를 받은 바 있는 노 대통령이 또다시 선거법 시비를 예상하면서 한나라당과 대선주자들을 겨냥해 작심한 듯 독설을 퍼부은 배경이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지난 2일 참여정부평가포럼 강연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끔찍하다”고 발언해 한나라당의 독기를 유도해 냈다. 또 대권주자 지지율 1, 2위를 질주하고 있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를 겨냥해서는 각각 “제정신이라면 대운하에 투자하겠느냐” “한국의 지도자가 ‘독재자의 딸’이라고 해외 신문에 나면 곤란하다” 등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대노한 한나라당이 노 대통령 발언을 문제 삼아 선관위에 고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정치적 권리’라며 반발하고 있지만 “노 대통령의 발언 이 위험 수위를 넘었다”는 지배적 여론을 감안하면 선관위의 결정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결과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제는 왜 이러한 결과를 예단하면서 노 대통령이 위험한 승부수를 던졌고 자칫 행동에 제약이 걸리면서 ‘레임덕’에 빠질 수도 있는 배수진을 치고 던진 노림수는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의 승부수에는 다목적 포석이 깔려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선 노 대통령이 구상하고 있는 대선구도와 무관치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노 대통령은 지난 2002년 대선과 마찬가지로 이번 대선도 개혁 대 보수 간의 양자 대결로 몰고 가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위해선 범여권이 대통합을 이뤄 한나라당 대 반한나라당 전선이 구축되어야 한다. 열린우리당 사수 의지를 견지했던 노 대통령이 사실상 대통합론에 동조하는 분위기로 선회한 것도 이러한 정치 현실을 인정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 열린우리당 대통합파인 K 의원은 7일 기자와 만나 “노 대통령은 이미 대통합론에 암묵적으로 교감을 나누고 있다”며 “문희상 유인태 의원 등 친노 중진들이 노 대통령과의 교감 없이 탈당 후 제3지대 대통합론을 주창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K 의원은 또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과의 전쟁에 선봉을 서고 있는 것은 대통합의 물꼬를 트는 동시에 자신을 희생하고라도 범여권 결집을 통해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내포돼 있을 것”이라며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 등 일부 친노주자들이 대통합 대열에 합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노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 지난 4일 언론자유수호 및 국정홍보처 폐지 촉구를 위한 의원총회에 참석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오른쪽)와 이재오 최고위원(왼쪽)이 얘기를 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청와대는 이번 선관위 결정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앞으로도 할 말은 할 것”이라며 정국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선관위의 결정을 이미 예상한 만큼 그에 따른 대비책 또한 준비돼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청와대는 선관위 결정을 “납득하기 어렵다”며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법적 제재가 아닌 ‘선거 중립’을 요청하는 조치만 내려 오히려 노 대통령에게 면탈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앞으로의 행보가 더 거칠어질 수도 있다는 관측도 있다. 특히 선관위가 또다른 시비거리였던 노 대통령의 연설을 사전선거운동으로 판단하지 않았고 참정포도 선거법상 금지된 사조직이 아니라고 결정한 것에 대해 내심 반기는 분위기다.
선관위 결정이 난 뒤 8일과 10일 노 대통령이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선관위의 결정과 선거법을 위헌이라고 몰아세우며 한나라당 주자들에 대한 공세도 늦추기 않았다. 노 대통령은 8일 오전 원광대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가진 특강에서 “어떻게 대통령이 정치중립을 하겠느냐”고 반문하며 “대통령이 가치를 갖고 전략을 갖고 정당과 함께 치열한 승부를 통해 정권을 잡고, 비록 내가 (후보로) 나오지 않더라도 그 다음 정권을 지키도록 하는 것, 참여정부 이후의 정부가 여전히 민주정부가 되도록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1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20주년기념식’에서도 노 대통령은 거침없는 독설을 이어갔다.
그는 이날 “대통령 단임제와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선거법, 당정분리와 같은 제도는 고쳐야 한다”며 선거법 개정 의지를 시사하는가 하면 “민주적 가치와 정책이 아니라 지난달 개발독재의 후광을 빌어 정권을 잡으려하고 있다”며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을 겨냥한 공격을 재가동 하기도 했다.
정치권 주변에서는 노 대통령이 본격적인 경선체제로 돌입한 한나라당 구도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해 ‘대권 빅2’인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의 분열을 유도할 것이란 관측이 꽤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정보기관을 총동원해 취합한 두 사람의 아킬레스건을 상대 진영에 흘려 한나라당 경선을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혈투장으로 변질시킬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정부기관의 타당성 조사나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한 개입 등이 그 서곡일지도 모른다고 일부에서는 긴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 한나라당의 한 고위관계자는 “노 대통령의 강연 발언은 ‘한나라당 대선주자 죽이기’ 플랜을 알리는 선전포고에 불과하고 현 정권 차원의 은밀하고도 치밀한 네거티브 전략은 갈수록 그 강도가 세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가 소식통들도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오래전부터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의 정보를 전방위적으로 취합해온 만큼 ‘이명박 X파일’ 등 구체적인 증거물을 제시하며 ‘대선주자 죽이기’에 나설 경우 대선정국은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이러한 승부수가 성공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선관위로부터 세 번째 옐로카드를 받은 노 대통령에 대해 ‘법 위의 대통령’이라는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있고 한나라당도 더 이상 노 대통령의 노림수에 당하지 않겠다며 대응 전략에 만전을 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나라당은 청와대가 선관위 결정에 반발하며 법적 대응 카드로 맞설 움직임을 보이자 확전을 자제하는 모드로 전환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대선정국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논란이 장기화될 경우 노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만 키워주는 격이고 이는 궁극적으로 노 대통령이 파 놓은 함정에 또다시 빠져들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2004년 노 대통령의 선거중립 의무 위반을 탄핵정국으로 몰고 갔다가 거센 역풍을 맞았던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겠다는 분위기다.
사실 정치권 일부에서는 노 대통령이 홀로 ‘전진 앞으로’를 외치고 있는 형국이며 범여권에도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시각도 없지 않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범여권 빅뱅 정국을 감안하면 범여권이 반한나라당 구도로 재결집하거나 단일후보를 만들어 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며 이런 가운데 노 대통령이 나서는 것은 오히려 갈등만 부추길 뿐이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자신감의 표현일까 아니면 주어진 권력을 끝까지 행사하며 친노세력을 지켜 나가겠다는 것일까. 대선을 6개월 앞두고 던진 노 대통령의 위험한 승부수가 어떤 결과를 낼지 향후 행보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