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일요신문 DB
“저도 국민도 철저하게 속았다.”
11월 13일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는 비박계 의원들이 다수 참여한 비상시국회의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대통령은 국민의 이름으로 탄핵의 길로 가야 한다. 사태가 심각하고 수습하기 어려운 이유는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께서 헌법 위배의 몸통이 되는 의혹을 받기 때문이다. 모든 판단과 원칙의 기준은 헌법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100만 촛불집회’ 직후 김 전 대표가 여당 의원 최초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시사한 것이다.
김 전 대표는 최근 강경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거국중립내각-탈당-탄핵’의 단계적 카드로 박 대통령을 압박하고 있다. 김 전 대표의 측근은 “대통령이 탈당하고 친박 지도부가 물러나야 했는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하야가 물 건너갔다. 야당은 이미 정권 퇴진 운동에 들어갔다. 국민들이 의아할 수 있고 놀랄 수도 있지만 김 전 대표는 하야보다는 탄핵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10월 말경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진 뒤 김 전 대표는 박 대통령을 향해 거국중립내각과 새누리당의 탈당을 요구했다. 급기야 최근에 그는 탄핵 카드마저 꺼내들었다.
김 전 대표는 당내 ‘우군’ 확보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유승민 의원,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대권잠룡과 정병국 나경원 등 중진 의원들은 김 전 대표와 함께 ‘비상시국 대표자 회의’를 결성했다. ‘비상시국 대표자 회의’는 친박 지도부와는 별개의 독자적인 협의체다.
비박계 의원들도 비상시국 회의를 통해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강조하고 있다. 정 의원도 “대통령께서는 이제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하기 어렵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수습해야 한다”고 박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했다. 하태경 의원도 “만약 대통령이 사임할 기회를 거부한다면 국회가 주도해 질서 있는 퇴진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선택은 탄핵뿐이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지지율 하락으로 궁지 몰린 김 전 대표에게 묵직한 한방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허성무 정치평론가는 “지난번 총선과정에서 김 전 대표가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여파로 여론조사 지지율이 오르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면 김 전 대표 중심으로 미래권력을 창출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탄핵 카드로 명분을 쌓는다면 친박 지도부와 같은 방해세력이 사라진다. 비박을 이끌고 있는 자신의 주도권이 극대화하는 것이다. 김 전 대표가 기회를 잡았다”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김 전 대표의 지지율은 ‘답보’상태다. 여론조사전문업체 리얼미터의 11월 2주차 주간동향에 따르면, 김 전 대표(3.6%)는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와 공동 9위를 차지했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21.4%), 반기문 UN 사무총장(17.2%) 안철수 국민의당 전 상임대표(10.2%)가 차례로 1, 2, 3위를 기록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4.1%)은 6위, 각각 1.1%의 지지를 얻은 원희룡 제주지사와 홍준표 경남지사가 11위를 차지했다(이번 주간집계는 2016년 11월 7일(월)부터 11일(금)까지 5일간,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2,531명을 대상으로 조사. 응답률 12.3%.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1.9%p. 자세한 조사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그렇다면 김 전 대표가 박 대통령의 ‘하야’가 아닌 ‘탄핵’에 방점을 찍은 까닭은 뭘까.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김 전 대표가 ‘하야’와 ‘탄핵’의 차이를 노렸다. 하야를 주장하면 박 대통령에게 완전히 찍힌다. 하지만 탄핵 절차를 밟으면 시간을 벌 수 있고 장기적으로 박 대통령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여지도 생긴다. 김 전 대표 입장에서 하야보다 탄핵으로 몰고 가는 것이 유리하다.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시간을 번 뒤 박근혜 정권의 그림자를 서서히 희석시키고 자신을 중심으로 보수 세력이 재결집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의도 정치권이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의 개국공신인 김 전 대표의 탄핵카드를 주목하는 배경이다.
김 전 대표는 한때 박 대통령의 강력한 조력자였다. 19대 총선 당시 당권을 잡은 친박계의 친이계를 향한 ‘공천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세종시 수정안 갈등으로 박 대통령과 사이가 멀어졌던 김 전 대표도 공천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김 전 대표는 탈당 대신 백의종군을 선언했고 친이계의 집단 탈당 움직임도 잠재웠다고 알려졌다. 결국 김 전 대표는 박근혜 캠프의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박근혜 정권’ 탄생에 기여했다.
국회의 탄핵 소추가 실현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탄핵은 국회의 고유권한으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와 재적의원 2/3 이상(200명)의 찬성이 있어야 가결이 된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과 무소속의원을 합치면 171명이다. 김 전 대표가 비박계 의원들의 협조를 이끌어낸다면 국회는 탄핵소추안을 의결할 수 있다.
‘탈박’을 감행한 친박 의원들도 탄핵에 찬성할 여지가 있다. 범친박계인 유의동·김순례·김종석·김현아 등 의원들은 ‘박근혜 대통령과 선긋기’에 들어간 모양새다. 여당의 재선의원은 “대권주자들이 깃발을 들고 탄핵을 강하게 외치면 따라올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설명했다. 야당의 한 초선의원은 “비박 쪽이 적극적으로 나와 준다면 우리도 훨씬 수월하다. 대통령이 하야를 계속 거부할 경우 충분히 탄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 전 대표를 둘러싼 당내 상황이 녹록지 않다. 이 대표는 안팎에서 들려오는 사퇴 요구를 일축했고 청와대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대해 오히려 ‘강경’ 노선으로 선회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후 침묵을 지켰던 친박 의원들이 융단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최근 김 전 대표를 포함한 비박계 중진 의원들을 향해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정치에 완전히 오염된 분들이 당 개혁과 쇄신을 이야기하는데, 도로 3김 정치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친박 성향의 이장우 최고위원도 “김 전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총괄선대본부장을 지낸 데 이어 박근혜 정부가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의 당 대표로서 모든 영화를 누린 분”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만약 김 전 대표의 탄핵 카드가 효과를 보지 못할 경우 새누리당이 ‘분당’할 여지도 있다. 새누리당의 다른 당직자는 “당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당이 깨질 가능성이 있다. ‘이정현파’와 ‘김무성’파로 줄 세우기를 하고 있다. 김 전 대표의 펀치는 계산속에서 나왔다. 김 전 대표가 탄핵을 흘리면서 중간에 간을 보고 있다. 탄핵 카드로 비박의 세를 모으고 이를 지렛대 삼아 대권 주도권을 잡겠다는 포석이다. 비박 의원들이 탄핵을 명분삼아 뛰쳐나간다면 당이 쪼개질 것이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런 일각의 예상과는 달리 김 전 대표 측은 ‘분당 시나리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김 전 대표의 다른 측근은 “비박계 의원들은 당을 나가면 오히려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비주류이기 때문에 나가도 뾰족한 수가 없다. 김 전 대표도 마찬가지다. 주류든 비주류든 어차피 밖으로 나가면 한 팀이다. 안에서만 갈등할 뿐이지 뭉쳐야 산다는 교감은 여전하다. 시간이 좀 지나면 당내 갈등도 잦아들 것이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김 전 대표의 승부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허성무 정치평론가는 “김 전 대표 입장은 보수세력에게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 강력한 카드가 필요했다. 친박 진영을 보수의 가치를 망치는 세력으로 규정하는 모양새를 보이기 위해 탄핵을 공식화하고 했다. 하지만 친박의 힘은 여전하기 때문에 김 전 대표의 뜻이 실현될지는 미지수다”고 분석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