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 여권은 허를 찔렀다. 박근혜 대통령은 ‘불명예 퇴진은 없다’며 야권에 선전포고령을 내렸다. 비박(비박근혜)계인 남경필 경기도지사와 김용태 무소속 의원은 11월 22일 새누리당을 전격 탈당했다. 여권 발 원심력의 최대 변수였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이튿날 차기 대선 불출마 및 잔류를 선언, 당권 장악에 시동을 걸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여권이 큰 시나리오를 향한 시동을 건 반면, 야권은 내부 영역을 둘러싼 ‘땅따먹기’에 그치고 있다. 민심이 차려준 밥상마저 걷어찰 조짐까지 엿보인다. 실축이 연발되면 둘 중 하나다. 무승부 아니면 패배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야권의 최대 고민은 ‘구심점 부재’다. 100만 촛불 민심이 깔아준 판에 올라탔지만 제도권 정치에서 이를 추동할 리더십은 ‘2%’ 부족하다. 박 대통령 탄핵 이후 정국 구상의 각론은 잘게 흩어져 있다. 야 3당(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이 박 대통령 탄핵을 전면에 내걸고 파상공세를 예고했지만 각 당 간 견해 차는 물론, 정당 내부에서도 혼선을 빚는 모습이다. ‘최순실’ 석 자로 물꼬를 튼 탄핵 정국의 마지막 퍼즐 맞추기가 난망한 까닭이다.
야권의 구심점 부재는 엇박자 행보로 이어졌다. 문 전 대표는 11월 21일 경북대 학생들과 한 간담회에서 박 대통령을 향해 “(2012년 대선에서) 함께 경쟁했던 사이라 연민의 정을 느낀다”며 “지금이라도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는 길을 선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역자 처벌’까지 주장하는 야권 기류와는 결이 다른 ‘명예로운 퇴진’을 언급한 것이다.
여의도 일각에선 사실상 ‘사면론’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비판까지 제기됐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이튿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미) 대통령은 문재인”이라며 “김대중(DJ) 정부 말기의 이회창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김부겸 민주당 의원과 이재명 성남시장도 “민심 못 읽는 성급한 얘기”, “불명예스럽게 퇴진해야 한다”고 ‘문재인 때리기’에 나섰다.
이에 대해 문 전 대표 측은 “권력 이양을 위한 연착륙 발언”이라고 해명했다. 친문 핵심인 전해철 의원은 박 위원장을 향해 “인신공격을 자제하라”고 경고했다. 뭇매를 맞은 문 전 대표는 11월 23일 숙명여대에서 가진 ‘숙명여대생과 함께하는 시국대화’에서 “야 3당이 합동 의총을 열어 전원이 탄핵 발의안에 서명하고, 새누리당 의원들을 상대로도 공개적으로 발의 서명을 받아서 국민에게 누가 거부했는지 밝혀야 한다”고 강경론으로 선회했다.
김 전 대표의 대선 불출마 선언, 국민의당의 ‘선 총리-후 탄핵’ 기조를 접은 직후였다. 문 전 대표가 ‘김무성 탈당’으로 본격화된 탄핵 정국의 주도권 싸움에 뒤늦게 뛰어든 것이다. 앞서 그는 100만 촛불 시민이 모인 11월 12일 박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에 고심 끝에 참여, 야권의 퇴진 운동에서도 막차를 탄 바 있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의 엇박자도 계속됐다. 민주당은 11월 21일 박 대통령 탄핵을 당론으로 결정했다. 기존의 ‘질서 있는 퇴진’에서 한 단계 격상한 것이다. 문제는 추 대표 발언이었다. 앞서 미스터리한 단독 영수회담 제안으로 수세 국면에 몰렸던 추 대표는 이날 당론 추인 뒤 기자들과 만나 “탄핵을 검토하는 시기에 국회 추천 총리 문제도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탄핵 당론을 정하고도 국회 추천 총리에 따라 탄핵 검토시기를 정할 수 있다고 갈팡질팡한 셈이다. 민주당은 당시까지만 해도 탄핵추진기구가 아닌 ‘탄핵추진검토기구’ 추진 의사를 밝혔다.
당 안팎에선 “왜 검토 기구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논란이 일자 민주당은 이튿날 ‘율사 출신’의 이춘석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탄핵준비실무단’을 띄웠다. 그러면서 여권 내 비박계를 향해 먼저 깃발을 들라고 압박했다. 탄핵 폭탄의 마지막 공을 여권에 떠넘겼다는 비판이 일었다. 황영철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30일간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민주당이나 잘 챙기라”고 쏘아붙였다.
일관성을 상실한 민주당 행보에는 비박계 발 탄핵 정국이 국민의당 중심의 제4 지대론을 강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렸다. 또한 제도권 정치에서 탄핵 블랙홀에 불을 지필 경우 시민사회주도의 촛불 광장의 여론이 꺼질 수 있다는 고심도 담겼다. 탄핵정국의 향방에 따라 여권 내 분열이 친문(친문재인)계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당 잔류를 택한 김 전 대표의 YS(김영삼 전 대통령)식 승부수로 여권 도미노 탈당의 둑은 가까스로 막았지만, 개헌을 고리로 한 제4 지대론 형성은 유효한 변수다. 구심력 지지대가 언제 무너질지 장담할 수 없다. 여기에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과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김종인 민주당 의원 등이 가세하거나 대선 정국에서 국민의당과 전면적으로 결합할 경우 친박(친박근혜)·친문을 제외한 중간지대가 차기 대권구도의 핵심 변수로 격상할 수도 있다. 김용태 의원은 탈당 직후 박 위원장을 만나 연대의 문을 연 상황이다.
민주당 한 의원은 “탄핵 정국으로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야권 단결은 물론, 이제라도 전방위적으로 여권 비박계와 접촉해 탄핵 의결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범야권에 떨어진 탄핵 암호명은 ‘29’다. 탄핵 의결(200명)에 필요한 새누리당 이탈자의 최소 인원수다. 야 3당(165명)과 야당 성향 무소속 의원(6명)을 합치면 171명이다. 범야권에서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다는 전제에서 나온 셈법이다. 표 계산 오류로 탄핵 의결이 불발된다면, ‘정치적 면죄부’를 얻은 박 대통령과 야권의 공수는 급변한다. 탄핵 드라이브에 올라탄 문 전 대표의 책임론이 거세게 불거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안철수 전 대표도 안심할 처지는 아니다. 야권 대선주자 8인 회동 주도 등의 성과를 올렸지만, 스텝이 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민의당 당론은 ‘대통령 탄핵’이다. 안 전 대표도 “탄핵 절차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며 힘을 실었다.
하지만 탄핵 정국에서 그는 ‘퇴진 촉구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탄핵을 주장하면서도 하야에 방점이 찍힌 퇴진 촉구 서명운동에 나선 것이다. 국민의당은 별도의 탄핵소추 발의 서명운동을 하기로 했다. 당의 대주주는 퇴진 촉구 서명운동, 박 위원장은 탄핵소추 발의 서명운동을 각각 하는 셈이다. 안 전 대표는 탄핵 정국에서 10% 안팎의 지지율 박스권에 갇혔다.
손학규 전 대표는 탄핵 정국에서 고립무원을 자처하고 있다. 야권 대선주자 8인 회동도 개인 사정을 이유로 빠졌다. 개헌 불씨 살기기에 안간힘을 쓰지만, 역부족이다. 문 전 대표와 민주당은 이미 ‘개헌 NO’를 외친 상황이다. 손학규 발 제3 지대론의 핵심인 ‘중간지대 만들기’는 새누리당 비박계의 제4 지대에 한쪽 영역을 뺏겼다.
정치권 안팎에선 손 전 대표의 제3 지대와 새누리당의 제4 지대가 정치적 변곡점에서 손을 맞잡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개헌은 양측의 교집합이다. 개헌을 통한 새판 짜기의 마지막 퍼즐은 ‘성공적인 지분 나누기’다. 김종인 민주당 의원 등 원내 개헌파와 정의화 전 국회의장과 이재오 의원 등 원회 개헌파까지 중간지대 플랫폼에 가세할 경우 손 전 대표의 몫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명분 없이 이들의 손을 덜컥 잡을 수도 없다. 그에겐 아킬레스건인 ‘한나라당 주홍글씨’가 있다. 안 전 대표 등 야권 제3 지대와 결합하지 않는 이상, 대권 영역을 넓히기가 쉽지 않다. 고립무원 처지에서 개헌 동아줄에만 기댈 경우 손 전 대표가 탄핵 정국의 불쏘시개는커녕 야권 표만 분산하는 ‘계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야권 분석통은 “손 전 대표 혼자 대권정국을 돌파하기는 불가능하다”며 “결국 손 전 대표의 운명은 안 전 대표에게 달린 게 아니냐”고 말했다. ‘종속변수 탈피’가 손 전 대표의 최대 과제라는 얘기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