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아이구, 전재산 다 탄다. 어카노...” 점포가 활활 타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보는 대구 서문시장 상인들은 애가 탔다. 30년동안 옷가게를 했다는 60대 할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지쳐 길바닥에 주저앉는다. 당장이라도 불길에 뛰어들어 물건을 빼겠다던 상인을 말리던 지인들의 얼굴에도 눈물이 범벅이다. 영남권을 대표하는 전통시장, 대구 서문시장이 대형 화마(火魔)에 휩싸여 잿더미가 됐다.
◇ 대구서문시장 4지구 점포 679곳 모두 타…다행히 인명피해 없어
지난달 30일 오전 2시8분께 대구시 중구 서문시장 4지구 상가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4지구 건물 1만 5386㎡ 중 1층을 태우고 순식간에 2, 3층으로 번졌다.
“어제 등산복 수천만원 어치 사서 재어 놨는데 어떠카노...” 수년간 옷가게를 운영한 50대 상인은 아직도 연기가 나는 현장을 바라보며 망실자실해 했다.
특히 겨울철을 앞둔 시장 상인들은 공수해 온 의류와 침구, 커튼 등을 재어둬 피해가 더 컸다.
이 불로 서문시장 4지구 상가 내 점포 총 679개가 모두 전소됐다. 모두 칸막이가 없는 개방형 구조의 점포라 순식간에 불이 옮겨 붙은 것이다.
화재 당시 건물 옥상에 있던 경비원 2명은 소방관에 의해 긴급 대피했으며 인명피해는 없었다. 화재 진압 도중 소방관 한 명이 3층 높이에서 추락해 허리를 다쳤고, 손에 화상을 입은 소방관도 발생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날 대구시와 소방당국 등은 소방관과 의소대 등 870명의 인력과 탱크로리, 펌프차, 구급차 등 99대의 장비, 헬기 2대를 현장에 투입해 진화작업을 벌였다.
특히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인 4지구에는 의류, 침구류, 원단 등을 취급하는 점포가 밀집돼 유독가스와 연기로 진화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소방당국은 서문시장 4지구 건물 네 방향에 소방력을 집중 투입하고 주변 상가로 불이 옮겨붙지 않도록 주력, 6시간만인 오전 8시께 큰 불길을 잡았다.
불에 탄 가건물 일부가 무너져 건물전체가 무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소방본부는 방화 차단선을 설치해 시민 출입을 통제했다.
◇ “보험 가입하지 않았는데”…낙심에 빠진 상인들
“수년 전 불나서 다 태워먹고 여기로 옮겼는데 이번에는 우짜누...” 서문시장에서 두 번이나 화마를 겪고 전재산을 날렸다는 한 상인은 울먹였다.
“보험에 가입 않했는데 어떡합니까. 제발 살려주십시오 시장님.” 대구 권영진 시장이 화재 현장에 나타나자 상인들이 앞다퉈 권시장을 붙들고 눈물로 하소연 했다. 당장의 생계가 끊어진 것도 문제지만 앞으로의 보상문제도 시급하다.
서문시장 4지구 번영회는 최대 76억원을 보상받을 수 있는 화재보험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보상은 건물 피해에 한정된다.
시장 관계자에 따르면 상인 대부분이 개별적으로는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동안 크고 작은 화재로 보험료가 인상되자 상인들이 이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또 점포는 점주가 운영하는 곳과 전세 또는 전전세로 영업하는 곳도 있어 피해 보상에 따른 상인 간 갈등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화재로 인해 점포 내부의 자산 피해는 상인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 골든타임 지켰지만 초기 진화 실패
30일 오전 2시8분께. 불이 났다는 신고를 받은 대신소방파출소는 신고 3분만에 현장에 도착했으나 초기 진압에 실패했다. 새벽부터 타오른 불길은 이날 오후 3시30분께 13여시간만에 겨우 잡혔다.
진화의 가장 어려움은 시장 내부에는 불길을 차단할 방화벽 역할의 구조물이 없었다는 것이다. 모두 칸막이가 없는 개방형 점포라 순식간에 불이 옮겨붙었다. 특히 의류, 침구류, 원단 등을 취급하는 점포가 밀집돼 원단이 타면서 연기와 유독가스로 소방관이 건물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방차 진입도 마땅치 않았다. 시장 특성상 건물 사이 통로가 매우 좁기 때문이다. 노후된 스프링클러에 대한 지적도 나오고 있다. 소방당국은 화재 당시 건물 내 스프링클러가 작동했으나 정전이 발생하면서 정상 작동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 대구시, 특별재난지역 선포
대구시는 수습지원봉부를 구성하고 중구청은 통합현장지원본부를 운영했다.
권영진 대구시장과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 윤순영 중구청장은 함께 화재 현장을 둘러봤다. 이날 오전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은 서문시장을 찾아 “특별재난지역 선포 여부를 포함한 지원 방안을 검토하겠다”며 “지자체 등과 협의해 응급 복구 등 후속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현장에는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를 비롯해 윤재옥, 유승민, 조원진, 김상훈, 곽상도, 정종섭, 정태옥, 곽대훈 의원이 방문했다. 더불어민주당 김부겸의원과 문재인 전 대표도 이날 저녁 현장에 방문해 민심을 청취했다.
대구시는 중구청과 협업해 전체 보험가입 현황과 재난관리기금 지원범위 등을 검토하고 상가번영회에 지원사항 등을 협의하는 등 복구 지원에 나설 방침이다.
◇ “예방할수 있었다” 안전불감증 지적
예견된 인재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서문시장은 화재 위험성이 높은 재래시장이라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이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았다.
화재에 앞서 지난 15일 임인환 대구시의원(예결위원장)이 대구 새 관광명소인 서문시장 야시장이 화재에 취약하다고 지적해 눈길을 뜬다.
당시 임 의원은 “서문시장 야시장은 시장에서 유일하게 소방차가 통행할 수 있는 차로의 1차선을 막고 운영하고 있다”며 “밤 시간 수 많은 인파가 몰리면 화재 발생 시 수습이 어려워 자칫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서문시장 야시장이 대구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상하고 있는 만큼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관 기관과 함께 화재예방 활동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며 “특히 야시장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특단의 안전 점검과 대책 마련이 있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한편 대구에서 전통시장 중 가장 규모가 큰 서문시장은 전체 면적 9만3000㎡, 총 6개 지구, 4000여개의 점포가 들어서 있다. 이번 화재는 2005년 서문시장 2지구에서 화재가 발생한 이후 11년만이다. 당시 화재로 1190여개의 점포가 타고 상인회 추산 1000억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으며 이번 피해 규모 역시 그와 비슷할 것으로 보고 있다.
대구 = 남경원기자 skaruds@ilyod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