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여권 후보단일화 대상으로 거론되는 이인제 민주당 대선후보(왼쪽)와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 | ||
범여권 후보단일화 카드는 대선판세를 뒤흔들 수 있는 그야말로 ‘태풍의 눈’이다. 현재까지의 지지율만 놓고 볼 때 범여권 주자들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50%대를 유지하며 대세론을 확고히 구축하고 있는 이 후보에 비해 범여권 주자들의 지지율은 모두 합해도 30%를 밑돌고 있기 때문이다. 범여권 진영이 한 목소리로 후보단일화를 외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거 전문가들은 오래전부터 범여권이 단일화를 이끌어내지 못할 경우 이번 대선은 한나라당이 낙승할 것이란 진단을 내린 바 있다. 이는 역으로 단일화만이 범여권의 유일한 희망이자 대안이 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범여권 관계자들도 원내 1당인 신당 정 후보와 호남권에 기반을 둔 민주당 이 후보, 장외주자인 문 전 사장 간의 3자 단일화가 이뤄지거나 여기에 민노당 권 후보가 가세할 경우 그 시너지 효과는 단순한 지지율 합산 이상의 파괴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보수 대 진보의 구도를 만들어 97년과 2002년에 이어 드라마틱한 대역전극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과거 두 번의 대선정국과 2007년 대선정국을 단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도 있다. 또한 이번 대선에서 범여권이 또다시 단일화에 성공할지 불확실한데다 성사되더라도 과거처럼 시너지 효과나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지난 대선 때와 달리 범여권 주자들의 지지율을 모두 합해도 이 후보의 지지율을 따라잡기 힘든 실정이고 영남권과 보수·기득권 세력 등 한나라당 지지 세력들이 “두 번 속지 세 번은 속지 않는다”며 강한 결속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범여권 입장에서는 최후 보루이자 승부수인 단일화 카드를 접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각에선 각종 비리 연루 의혹 등 범여권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지지율 고공행진을 펼치고 있는 이 후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단일화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극단적인 처방전을 내놓고 있다.
지난 17일 진보개혁 성향의 소장학자 27명이 기자회견을 통해 신당과 민주당, 문 전 사장, 민노당을 향해 ‘진보개혁세력의 후보단일화’를 공식 촉구한 것도 범여권 저변에 깔려 있는 위기감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들 학자들은 “진보개혁세력의 각 정당과 후보가 정책과 지향에 있어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과거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던 진보개혁세력이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을 이끌 공동의 책임을 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라며 “진보개혁세력의 각 정당과 후보는 민주주의 발전의 대승적, 거시적 관점에서 후보단일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 지난 19일 정동영 신당 대선후보는 범여권 단일화를 주문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국회사진기자단 | ||
‘이·문·정·권 연대론’은 중도 실용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신당과 민주당, 중도개혁을 기치로 내건 문 후보, 좌파정당인 민노당 권 후보 진영이 권력구조 개편을 통한 이른바 ‘중도우파-좌파 연합정권’을 구성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비록 정치적 이념과 정체성은 다르지만 우파인 한나라당에 정권을 넘길 수 없다는 공감하에 ‘가치연정’을 실현시킨다는 시나리오다. 이는 절대지존 자리를 확고히 다지고 있는 이명박 후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범여권뿐만 아니라 민노당도 ‘반한나라당 전선’에 합류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문·정·권의 연대가 현실화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대선을 불과 두 달도 채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권력구조 개편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기가 쉽지 않고 내년 총선 공천권과 지분 분배 등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단일후보로 나선 후보 중심으로 범여권 세력 재편이 불보듯 빤하기 때문이다.
‘신 DJP 연대론’은 ‘반 이명박 전선’이라는 점에서 ‘이·문·정·권 연대론’과 일맥상통하고 있지만 민노당이 제외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 97년 대선 당시 ‘DJP 연합’이 호남권(DJ)과 충청권(JP)을 매개로 한 지역연합 정권이었다면 이번에는 호남(정동영)과 충청(이인제)은 물론 서울(문국현)까지 포함시킨 확대된 지역연합이다. 세 사람 모두 범여권 단일화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고 이념과 정체성 면에서도 중도성향을 기조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이문정권 연대론’에 비하면 실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호남의 정신적 지주인 DJ가 문 전 사장을 범여권 단일화 후보로 언급했던 것도 ‘신 DJP 연대’를 염두에 둔 사전 정지작업 성격이 짙다는 시각에 힘이 실리고 있다.
‘서해안벨트 연합’은 ‘신 DJP 연대’에서 문 전 사장이 빠진 것으로 호남 출신에 원내 1당을 기반삼는 정 후보와 충청 출신이지만 호남을 지역 연고로 하면서 경기 지사를 지낸 이 후보가 서해안권을 하나로 묶는다는 시나리오다. 이는 97년 지역연합인 DJP 연대나 2002년 민주당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이 신행정수도 공약으로 사실상 호남+충청 정책 연대를 이끌어 냈던 이른바 제2의 DJP 연대 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신 DJP 연대’는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물밑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고 당사자인 정·이 후보 또한 적극적이어서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나리오로 분류되고 있다.
실제로 DJ는 줄기차게 범여권 대통합과 후보단일화를 주창해 왔다. 얼마 전에는 문 전 사장도 단일화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당과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이후 정 후보(20일)와 이 후보(22일)가 당선 인사차 동교동을 예방한 자리에서도 DJ는 단일화 필요성을 주문한 바 있다. “범여권이 단일후보를 내지 못하는 한 이번 대선은 해보나 마나”라는 게 동교동의 분위기다.
정·이 두 후보도 서해안벨트 구상에 적극적이다. 정 후보 측은 정 후보가 원내 1당 대선주자인 만큼 단일화 관문에서 일단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고 자평하면서 당분간은 당내 화합을 통한 지지율 제고에 힘쓴다는 방침이다. 다만 이 후보를 상대로 한 ‘서해안벨트 연대’나 문 후보와의 ‘통일-경제 연대’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물밑 접촉을 진행한다는 전략이다. 17일 정 후보가 “원내 1당의 대통령후보로 나를 선출한 건 이번 대선구도를 정동영 대 이명박으로 일단 구축한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전략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와 관련, 정 후보 측 한 관계자는 “정동영 후보가 신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후 호남 여론조사에서 이명박 후보를 단숨에 앞섰다”고 전제한 뒤 “충청 출신인 이인제 후보가 충청권에서 이명박 후보를 따라잡을 경우 두 사람의 단일화 효과는 상당할 것”이라고 말해 이 후보를 상대로 한 서해안벨트 연대를 1차 단일화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인제 후보도 서해안벨트 연대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 후보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후 첫 방문지로 충청권을 선택한 것도 서해안 구상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호남이 텃밭인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만큼 출신지인 충청권에서 지지율을 끌어 올려 범여권 후보단일화 국면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동시에 서해안벨트를 기반으로 본선 경쟁력을 제고하겠다는 나름의 대권 계산도 깔려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 | ||
이처럼 범여권 후보들이 단일화라는 큰 틀에는 공감하고 있지만 저마다 자기 중심의 단일화를 주창하고 있고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어 결과물을 도출할 때까지 피 말리는 혈투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범여권 일각에서는 동교동계 개입설 등 단일화 음모론이 나돌고 있는가 하면 친노그룹의 최후 선택도 단일화 과정에서 돌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단일화 음모론 중심에는 동교동계가 자리잡고 있다. 2002년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 후보를 지원했던 권노갑 전 고문 중심의 동교동계가 이번에도 이 후보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동원·조직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중도하차한 조순형 의원 측은 동교동계 개입설을 강하게 주장한 바 있다. 지지율에서 조 의원에게 뒤떨어졌던 이 후보가 경선 시작부터 독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권 전 고문을 정점으로 한 동교동계의 조직적인 개입 때문이라는 게 조 의원 측의 주장이다.
범여권 관계자들도 동교동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2002년에 이어 ‘이인제 대통령 만들기’ 플랜에 의기투합한 동교동계가 범여권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막후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란 관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DJ정부 시절 2인자로 군림했던 권 전 고문이 정 후보가 주도했던 ‘정풍’에 쇄락의 길을 걷게 됐다는 구원도 이인제 지원설을 부추기고 있다.
친노그룹의 최후 선택도 단일화 막판에 중요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친노 대표주자였던 이해찬 전 총리마저 낙마한 상황에서 친노그룹은 자신들의 독자생존 플랜과 맞물린 승부수를 던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내 의석수나 지지율면에서 정 후보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친노그룹이 이 후보나 문 전 사장을 지원할 경우 단일화 정국은 예측불허의 안개 속으로 빠져들 공산이 크다.
정 후보가 신당 후보로 확정된 후 노 대통령이나 친노 진영을 향해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데 참여정부평가포럼의 안희정 상임집행위원장이 “열린우리당 해체 과정에서 실망했던 지지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정 후보에게 주문한 것이나 이 전 총리 측이 선대위원장 요청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등의 배경에는 단일화 과정에서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정지작업 내지는 최후 선택을 고려한 고도의 전략이 담겨져 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치열했던 내부 경선을 통과했지만 단일화라는 피할 수 없는 최후 관문에서 만난 범여권 후보들이 본선행 티켓을 놓고 또다시 대혈투를 준비하고 있는 형국이다. 12월 대선정국 최대 승부처인 단일화 전쟁에서 과연 누가 웃고 누가 울게 될지 범여권 후보들의 진검승부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