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
그러나 삼성이 어떤 의도로 말을 구입했으며, 소유권이 누구에게 귀속됐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다. 삼성 측은 “대한승마협회 회장사 자격으로 승마 선수들 후원을 위해 말을 구입했는데 결과적으로 정 씨가 훈련마를 전용한 것이 문제가 됐다”며 “이들 말은 계약 단계부터 삼성전자의 자산이었고, 지금은 모두 처분한 상태다. 당시 정 씨는 말들을 빌려 탔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정 씨는 자신의 SNS에 해당 말이 ‘자신의 것’이라는 취지의 글을 올린 바 있다. 또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와 관련한 국내 언론의 의혹 제기가 본격화되자 지난 10월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을 덴마크에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만약 덴마크로 보낸 말이 삼성의 것이라면 정 씨는 절도를 한 것이 된다. 거꾸로 정 씨가 삼성으로부터 말을 간접 증여 받았다면 그에 따른 세금 문제가 발생한다.
사정기관 관계자는 “삼성 정도 되는 기업이 말을 구입하면서 세금 신고를 누락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면서도 “장부상 말 구입에 쓰인 계열사 자금이 어떤 통장에서 나왔는지, 말을 어떤 방법으로 정유라에게 제공했는지 등은 향후 특검에서 조사돼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지난 12월 6일 열린 ‘박근혜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서도 수억 원대 말 구입과 관련한 의혹이 제기됐다. 이날 장제원 새누리당 의원은 “한화갤러리아가 2014년 네델란드에서 8억 원짜리 말을 수입해 정유라에게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한화그룹은 즉각 입장자료를 내고 “2014년 한화가 구입한 말은 ‘파이널리’로 한화갤러리아승마단 소속 김동선 한화건설 팀장이 아시안게임에서 탄 말“이라며 ”정유라에게 줬다는 내용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했다. 김동선 팀장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이며, 인천 아시안게임 마장마술 종목에서 정 씨와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건 바 있다. 한화 관계자는 ”내부 확인해보니 김 팀장과 정 씨는 전혀 친분이 없으며, 최순실 측에 특혜를 제공한 사실도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들 기업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승마를 연결고리로 한 사회 특권층 간 유착 의혹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승마 자체가 워낙 ‘귀족 스포츠’란 인식이 강한 데다 보통 시민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폐쇄적인 구조를 가진 까닭에서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말을 소유한 마주들은 재계 회장부터 정·관계 고위 인사, 고액 자산가까지 그 면면이 사회 고위층에 집중돼 있다. 또 정 씨 사례에서 보듯 마주와 실제 사용자가 다른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에게 특혜 지원을 한 의혹을 받고 있는 장충기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이 1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위해 출석하던 중 취재진에게 둘러싸여 질문을 듣고 있다. 최준필 기자
복수의 승마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비타나V급 명마 구입을 위해선 말의 혈통과 가치 등에 정통한 ‘전문가’의 조력이 필수적이다. 국내에서 이 분야 권위자로 꼽히는 인사는 승마 국가대표 출신 서정균 전 갤러리아승마단 감독이다. 정 씨와 최 씨의 조카인 장시호 씨를 유소년 시절부터 지도해 온 그는 “이전에도 정 씨 부모(정윤회·최순실)가 말을 구입하기 위해 유럽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며 “당시 승마협회 소속 간부가 동행했다”고 말했다.
정 씨와 김동선 팀장이 탔던 ‘승마용 말’은 ‘경주용 말’과 달리 관련 시장이 크지 않을뿐더러 계약 성사까지 상당히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승마업계 다른 관계자는 “유럽에 승마용 말을 사고파는 시장이 있는데 일반인은 접근 자체가 어렵다”며 “계약 또한 비밀리에 이뤄지는데, 예를 들어 3억 원짜리 말을 사고 2억 원을 줬다고 신고해도 당국의 추적이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100여 마리의 말을 감정해 온 감정평가사 김 아무개 씨도 “(개인 혹은 법인이) 말을 비싼 값에 구입해서 국내로 들여오면 통관 절차에서 관세가 많이 붙기 때문에 세관신고가액을 낮추는 경우가 종종 있던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2014년 승마협회의 이른바 ‘살생부’ 파동 당시 전화를 해 온 관계자는 “승마계 실세인 박원오 전 승마협회 전무가 해외에서 말을 싼 값에 들여와 자녀를 국가대표로 키우려는 학부모들에게 비싸게 팔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말했다.
박 전 전무는 최순실 일가의 ‘집사’격인 인물로 최근까지 정 씨의 독일 도피 생활을 도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사 전횡 등 승마협회를 사실상 좌우해 온 그는 말 유통 과정 등에도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국회는 박 전 전무에 대해 ‘최순실 청문회’ 증인 신청을 했지만 그의 행적은 묘연한 상태다.
한국마사회 등에 따르면 개인이 구입한 말은 각 마주들이 자비를 들여 관리한다. 매달 수백만 원이 지출되지만 부유층이 많은 까닭에 상대적으로 비용 부담은 적은 편이라고 한다. 부르는 게 값인 대회 출전용 말은 최 씨처럼 대부분 자녀를 국가대표 선수로 키우려는 부모들이 구입한다. 이 과정에서 자녀에게 말이 증여됐다면 세금을 부과할 수 있지만 정확한 말 가격을 산정할 수 있는 전문가는 극소수다. 앞서의 승마업계 관계자는 “말의 종류만 200여 종이 넘는다”고 설명했다.
대기업과 정권 실세 간 ‘연결고리’로 지목된 승마계는 이처럼 ‘그들만의 리그’로 운영돼 왔다. 불투명한 거래가 수차례 있었음에도 이를 제재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은 없었다. 도리어 승마협회는 정권 실세와 유착해 각종 비리를 일삼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승마업계 관계자는 “국내에 3만 필이 넘는 말이 있는데 정부기관이 속속들이 관리할 수는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