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노갑 전 고문과 정동영 신당 후보, 이인제 민주당 후보(왼쪽부터)의 심야회동이 목격되면서 신당과 민주당의 합당 뒤로 동교동계의 힘이 작용했다는 추측과 함께 이면합의 의혹 또한 커지고 있다. | ||
“코너에 몰린 정 후보와 이 후보가 정치적 빅딜에 사전 조율을 끝낸 것 같다.”
4자선언을 전해들은 친노그룹 A 의원이 던진 일성이다. 13일 기자와 만난 A 의원은 “지지부진했던 통합 논의를 속전속결로 끝낸 것이나 140석 정당과 8석 정당이 동등한 지분으로 합당을 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며 “두 후보와 일부 지도부 사이에 말 못할 이면합의가 있었을 것이고 분명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빅딜 내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A 의원은 “원론적인 추론일 수도 있지만 정권을 잡았을 경우에는 대권과 당권으로 지분을 정리할 수 있고 패할 경우에는 정·이 후보가 각각 호남과 충청 공천권을 양분하는 쪽으로 조율을 끝냈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당 안팎에서도 4자선언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과 억측이 나돌고 있다. 친노그룹은 물론 중진그룹과 초재선 의원들 사이에서도 합의 내용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14일 열린 선대위원장·최고위원·고문단 연석회의에서 이해찬 공동선대위원장은 “이대로는 당 수습이 어렵다”고 불만을 토로했고 김두관 전 장관도 “영남 쪽에선 전국정당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친노직계인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은 사석에서 “이대로 가면 탈당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탈당 불사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김근태·손학규 공동선대위원장까지도 합의 내용에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어 이번 합의문 파문은 정 후보 그룹 대 비호남·친노그룹 간의 파워게임 양상으로 비화될 조짐마저 일고 있다. 논란이 확산될 기미가 보이자 당 지도부는 “4자 회동 결과는 존중하고 협상을 진행한다”는 미봉책으로 가닥을 잡아 내부 갈등은 잠시 봉합 국면을 맞고 있다. 신당과 민주당이 15일 합당 협상단을 꾸리고 본격적인 협상에 돌입한 것도 파문 확산을 차단하고자 하는 양 당 지도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양 당의 이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어 향후 협상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고 신당 내부에는 협상 결과에 따라 정치적 결단을 강행하겠다는 강경파도 적지 않다. 자칫하면 범여권이 대통합 과정에서 또다른 분열을 야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범여권 일각에서는 속전속결로 끝난 ‘11·12선언’ 배경에는 후보 간 이면합의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했을 것이란 의혹이 끊이질 않고 있어 사실로 확인될 경우 대폭발의 뇌관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실제로 신당과 정 후보 측은 이번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10여 일 전인 지난 2일부터 ‘통합 TF팀’을 가동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정 후보 경선캠프 당시 ‘좌장’ 역할을 맡았던 이용희 국회부의장과 조성준 후보 비서실장이 전면에 나섰고 신당에 합류하기 전에 ‘중도통합민주당’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한길·강봉균 의원도 막후 역할을 담당했다. 민주당 쪽에선 박상천 대표가 직접 협상 최일선에 나섰고 황태연 국가전략연구소장 등이 실무를 지원했다.
문제는 이들 협상자 외에 드러나지 않은 이른바 ‘보이지 않은 손’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특히 그동안 줄기차게 범여권 대통합과 단일후보론을 주창해 온 DJ의 대권 복심과 맞물린 동교동계의 역할론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실제로 권 전 고문과 한화갑·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 등 동교동계 핵심 인사들은 범여권 통합을 위해 양측 인사들과 물밑 접촉하며 막후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4자회동 전날 밤에 권 전 고문이 정·이 후보와 서울시내 H 호텔에서 비밀리에 만남을 가졌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 것도 동교동계 역할론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정동영-이인제-권노갑 3자 회동 미스터리는 11일 밤 H 호텔 현장에서 세 사람을 목격한 B 씨의 제보가 발단이 됐다. 언론계에 있는 B 씨는 기자에게 “11일 밤 H 호텔 로비에 있었는데 10시쯤 권노갑 전 고문이, 30분 뒤에 이인제 후보가, 다시 11시쯤엔 정동영 후보가 차례로 호텔에 도착했다”며 “이상하게 생각돼 마지막으로 도착한 정 후보 뒤를 쫓아갔더니 세 사람이 함께 있더라”고 전했다.
기자가 구체적인 회동 장소와 시간을 묻자 B 씨는 “지하 2층에 위치한 스포츠센터 근처 한적한 테이블이었고 내가 12시쯤 호텔에서 나왔는데 그때까지는 세 사람 모두 나가는 걸 못 봤다”고 답했다. 세 사람이 확실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세 사람 얼굴도 몰라보겠느냐”며 “당시 함께 있었던 일행들도 모두 세 사람을 똑똑히 알아봤다”고 말했다.
사실 확인 차원에서 기자는 15일 H 호텔을 방문했다. 세 사람의 모임 장소로 알려진 스포츠센터의 한 직원은 “영업시간이 저녁 9시 30분인 관계로 10시 이후에는 직원들이 거의 퇴근한다”며 “밤 늦게 테이블에 있는 손님을 기억할 수 없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근처 테이블은 늦은 시간에도 호텔 손님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다”며 “한적한 곳인 만큼 비밀스런 얘기를 나누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모임을 가질 리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취재결과 현장의 위치나 상황 등이 B 씨의 제보와 다르지 않았으며 정치인들이 남의 시선을 의식해 일부러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을 선택했을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보였다.
3자 회동 의혹과 관련해 기자는 정·이 후보 측과 권 전 고문 측에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세 사람 해명이 각각 달라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위 박스기사 참조).
권 전 고문 측은 11일 밤 10시 30분쯤 권 전 고문과 이 후보가 만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정 후보와 3자 회동은 없었다고 부인했다. 반면 이 후보 측은 권 전 고문은 물론 정 후보와의 회동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밝혔고 정 후보 측은 “후보에게 직접 확인했다. 그런 사실 없다”고 답했다.
일단 정·이 후보가 부인함으로써 3자 회동은 일단 ‘설’로 남지만 제보자인 B 씨 증언의 신뢰성과 세 사람 측의 입장을 종합해 볼 때 11일 밤 3자 회동설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3자가 회동한 것이 아니라 권 전 고문 측의 말처럼 권 전 고문과 이 후보만 만났다고 하더라도 이는 권 전 고문을 정점으로 한 동교동계가 통합 작업 과정에서 핵심 조정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DJ는 전통적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호남과 충청을 매개로 한 제2의 DJP 연대가 성사될 경우 연말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대권 복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호남 출신인 정 후보와 충청 출신인 이 후보가 1차 단일화를 이뤄 서해안벨트를 형성하고 개혁세력인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와 2차 단일화를 성사시킨다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란 구상이다.
하지만 DJ의 이러한 대권 복심은 권 전 고문과 이 후보 나아가 정 후보까지 포함된 11일 밤 회동 의혹과 맞물려 범여권 대선지형을 뒤흔드는 폭발력 있는 뇌관으로 작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4인선언을 둘러싸고 갖가지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 상황에서 3인이 비밀 회동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는 DJ와 동교동계가 막후 역할을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가뜩이나 친노세력이 반발하고 있는 상황에서 범여권 후보 단일화가 또다시 분열과 혼란 속에 빠져들 가능성도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