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9일 신촌 거리유세에 나선 정동영 대통합신당 후보.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BBK 사건은 대세론을 구축해 온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와 보수진영 내의 분열을 야기하는가 하면 범여권 대선지형에도 적잖은 변화를 몰고 오고 있다. 무소속 이회창 후보가 출마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배경은 “이명박 후보로는 안된다”는 대안론이었다. 이회창 후보의 출마와 BBK 사건에 대한 새로운 의혹들이 속속 공개되면서 50%대를 넘나들었던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급기야 40% 안팎으로 떨어진 반면 이회창 후보는 20%대의 지지율로 17%대의 정동영 후보와 치열한 2위 싸움을 벌이고 있다. BBK 사건이 ‘이명박 대세론’에 제동을 걸면서 대선구도를 단숨에 ‘1강 2중’으로 재편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BBK의 위력은 범여권 대선지형에도 파장을 던지고 있다. 철옹성 같았던 ‘이명박 대세론’이 휘청하자 패색이 짙었던 범여권 진영에서도 “뭉치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후보단일화 문제가 재부상하고 있고 권력분점식 연대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비록 신당과 민주당 간의 대선후보 등록 전 합당이 불발로 끝나긴 했지만 후보단일화 내지는 연정만이 보수진영의 집권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실제로 범여권은 정동영-문국현-이인제 후보 간의 단일화 협상을 막후에서 진행하고 있고 한편에선 연정론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정 후보와 문 후보 간의 단일화 협상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분위기다. 양측은 그동안 단일화 주도권을 놓고 지리한 샅바싸움을 전개해 왔지만 개혁진영 원로들을 중심으로 거센 단일화 압박을 받고 있다.
신당 오충일 대표는 지난달 29일 강원도당을 방문한 자리에서 “범여권 후보의 단일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강조한 뒤 “현재 공식적인 단일화 논의는 없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들 아는 만큼 비공식적인 소통은 있다. 되는 사람부터 마음과 입을 합치겠다”고 말해 비밀리에 단일화 협상을 진행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장영달 국민통합위원장도 전북도의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시간이 없는 만큼 동시 단일화를 해야 한다”며 “문국현 후보도 이번에 단일화를 회피하면 그동안 쌓은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 후보 측도 정 후보와 연합정부를 매개로 한 단일화 협상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문 후보 측의 한 관계자는 최근 기자와 만나 “개혁진영이 각자 독자적으로 대선을 완주할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 끝까지 고집만 부릴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단일화든 연정이든 조건만 충족된다면 큰 틀에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양 진영 일각에서는 연합정부 구성에 합의한 후 예비내각 발표, 집권 시 공동 인수위 구성 등 구체적인 시나리오가 나도는가 하면 이해찬·손학규 공동선대위원장과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등을 중심으로 한 ‘집권 드림팀’을 구성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합당 불발 이후 대선 완주를 선언한 이인제 후보도 단일화 요구가 대세로 굳어질 경우 어떤 식으로든 그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개인적인 몸값이나 정치적 지분을 확보한 뒤 결국 단일화나 연정 대열에 합류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 지난 28일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가 서울 명동의 상가를 방문했다.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실제로 신당은 BBK 사건이 사실로 밝혀지고 범여권이 단일화되면 정 후보가 승리한다는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정대철 선대위원장은 28일 당사에서 열린 선대위원단 회의에서 “당 자체 여론조사 결과 이명박 후보를 이길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BBK 주가조작에 이명박 후보가 관여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고 범여권 후보가 단일화될 경우 정 후보 32.2%, 이 후보 30.0%, 이회창 후보 26.5%로 집계됐다”고 말했다.
범여권 주변에서는 BBK 사건을 계기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른바 ‘2007 신 대권 밀약설’이 꽤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범여권 핵심부가 ‘어게인 2002’ 대선 플랜을 실현시키기 위해 권력 분점을 담보로 범여권 제 세력들을 모두 끌어안고 대권에 의기투합할 것이란 게 밀약설의 골자다.
범여권 제 진영도 권력분점식 연대론에 방점을 찍고 물밑에서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특히 범여권 핵심부 주변에선 대권·총리·당권·총선지분권 등의 권력을 골고루 나눠서 행사하는 연립정부 내지는 집단지도체제 구성 방안이 적극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단일화 키를 쥐고 있는 정동영·문국현·이인제 후보가 각각 대권·총리·당권을 맡는 방안이 검토되는가 하면 고건 전 총리·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강금실 전 장관, 이해찬·손학규·김근태 선대위원장 등 범개혁 진영 유력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는 연합정부 카드도 거론되고 있다. 97년 DJP연대나 2002년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 성사 배경에 연합의 정신이 있었듯이 이번에도 권력분산을 통한 정파 간 연정 카드로 대반전을 모색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분위기다.
DJ와 고 전 총리 등 범개혁 진영 대주주들도 범여권 대통합과 연합 카드를 적극 지원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밀약설을 부추기고 있다. 그동안 줄기차게 범여권 통합과 단일후보론을 주창해 온 DJ는 범여권 후보 지지에 적극 나서고 있다. DJ는 26일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가진 특강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기본적인 남북관계는 이어질 것”이라고 전제한 뒤 “국민들이 남북관계가 몇 년간 경색될 때의 문제점을 잘 판단해서 투표를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북한과 미국의 국교정상화가 예상될 만큼 두 나라가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는데 다음 정권이 강경 대북 정책을 펴면 동북아에서 우리만 고립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자신과 노무현 정부가 추진해 온 대북정책을 이어받을 범여권 후보들에 대한 지지를 간접적으로 호소한 것으로 풀이된다.
DJ가 일선에서 범여권 후보 지원에 나서고 있는 만큼 권노갑 전 고문이나 박지원 실장 등 동교동계 핵심 인사들도 물밑에서 단일화와 대통합 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실제로 권 전 고문은 신당과 민주당의 합당을 골자로 한 4자 선언 전날(11일) 밤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이인제 후보와 비밀회동을 갖는 등 범여권 대통합 작업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으로 <일요신문> 취재 결과 확인되기도 했다.
▲ 지난 27일 이인제 민주당 후보가 서울역에서 시민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각 정파의 지분 계산이 끝나면 단일화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고 전 총리 측도 범여권 후보 지지 선언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고 전 총리의 한 측근은 30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고 전 총리는 현 정부 초대 총리를 지냈고 성향 또한 민주개혁 쪽에 가까워 범여권 후보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며 “다만 범여권 내 특정 후보를 지지하기보다는 범여권이 후보단일화에 성공할 경우 민주개혁세력의 대선 승리를 위해 단일후보를 지지할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범여권 후보단일화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후보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차별화를 본격화하고 있는 것도 밀약설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명박 후보가 BBK 사건을 비롯해 자녀 위장전입과 위장취업 등 각종 의혹에도 불구하고 40%를 넘나드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고 뒤늦게 대권 경쟁에 뛰어든 이회창 후보 또한 20% 안팎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반면 정 후보와 범여권 후보들의 지지율은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는 ‘노무현 학습효과’ 때문이라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실망감과 거부감이 이번에 반드시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심리로 이어지면서 범여권 후보들의 지지율이 저공 행진을 지속하고 있다는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이다.
문국현·이인제 후보가 현 정부의 실정과 무능을 성토하며 차별화를 꾀했던 것이나 그동안 ‘노무현 딜레마’에 빠져 있던 정 후보가 노 대통령과 선 긋기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도 이러한 분석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후보등록(25일) 이후 노 대통령과의 노선 차별화에 방점을 찍고 있는 정 후보는 ‘노 대통령 당선축하금’을 포함하고 있는 민감한 삼성특검법안 국회 처리를 주도하는 등 작심한 듯 ‘노 대통령 밟기’를 본격화하고 있다.
주목되는 부분은 정 후보와 범여권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노 대통령 죽이기’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데도 노 대통령과 청와대가 이렇다 할 반격을 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은 신당 경선 당시 경선 주자들이 앞다퉈 자신과의 차별화전략을 구사하자 “범여권 후보가 차별화라니…”라며 발끈하는가 하면 삼성 특검법 논의 과정에서도 “국회가 횡포를 부리고 있다”며 거부권 카드를 언급하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특겁법안을 받아 들였고 범여권 후보단일화 문제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과 정 후보를 정점으로 한 범여권 핵심세력들이 ‘대선 승리’라는 대의명분 아래 사전 교감 내지는 묵시적 합의에 동조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추론을 내놓고 있다. 즉 범여권 후보들은 지지율을 끌어 올리는 데 최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노 대통령 학습 효과’를 차단하는 데 승부수를 던지고 노 대통령은 이를 묵인하는 이른바 ‘위장 이혼’에 교감했을 것이란 관측이다.
BBK발 대역전 시나리오와 맞물려 있는 범여권 진영의 ‘신 대권밀약’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또 그 파괴력은 어느 정도일지 중반전으로 치닫고 있는 대선정국에 또다른 변수로 급부상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