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일 대선 후보들이 TV토론에 앞서 손을 맞잡았다. 이들은 대선과는 별도로 총선을 겨냥한 ‘2차전쟁’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을 거라는 추측이다. 국회사진기자단 | ||
“19일 대선은 정치권 빅뱅을 예고하는 신호탄에 불과할 것이다.”
유례 없는 다자구도로 치러진 이번 대선을 바라본 선거전문가 A 씨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예견해왔다. 14대 대선부터 선거전문가로 활동해 온 A 씨는 얼마전 기자와 만나 “보수와 진보가 양분되고 특정 정치세력을 대변하는 군소 주자가 완주하고 있는 이번 대선은 다당제 구도로 가는 신호탄”이라며 “이러한 현상은 내년 총선 과정에서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고 정치권 빅뱅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선 결과에 따라 다자구도 여부에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A 씨는 “대선 과정에서 각 후보 진영이나 정치권은 이미 대선 이후 총선을 겨냥한 2차 전쟁을 준비해 왔고 일부 후보들은 노골적으로 총선에 대비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지 않았느냐”며 “범여권이든 한나라당이든 승패를 떠나 정치권 빅뱅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A 씨의 주장처럼 대권 전쟁과는 별도로 총선을 겨냥한 정치권의 2차 전쟁은 이미 오래전부터 물밑에서 진행돼 왔던 게 사실이다. 이미 일부 유력한 대선후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후보들이 오래전부터 대선보다는 총선에 마음이 가 있었고 유력 후보 진영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역 의원과 정치인들의 궁극적인 목표 또한 내년 총선 당선에 방점을 찍어 왔음은 숨길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선거 전날(18일)까지 극적으로 단일화가 성사될 가능성은 늘 열려 있는 것이지만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배경에는 각 후보 진영의 복잡한 지분 계산 등 총선 전략이 투영돼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회창 후보가 신당 창당을 선언하며 총선에 대비한 행보에 박차를 가해 온 것이나 범여권 단일화 대상이었던 문국현·이인제 후보가 정동영 후보(DY)의 구애 손길을 끝내 뿌리친 것은 단일화 내지는 연대로 기대할 수 있는 불확실한 총선 지분보다 차라리 총선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하겠다는 고육책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DY와 이인제 후보 간의 두 차례에 걸친 단일화 협상과 11일 밤 3시간 넘게 최종 담판을 벌였던 DY와 문국현 후보의 협상이 불발로 끝난 배경에는 총선 지분 등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또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표가 선거 과정에서 이명박(MB) 한나라당 후보 대신 이회창 후보를 선택한 이면에도 총선 때 충청권의 공천 지분 문제로 인한 갈등이 작용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지난 대선 때 노무현 대통령과 단일화를 성사시켰던 정몽준 의원이 MB 지지 선언과 함께 한나라당에 입당한 것도 정치적 지분 확보와 차기 대권을 준비하기 위한 중장기 포석이 깔려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당내 경선에서 패한 후 절치부심하고 있는 신당 손학규·이해찬 의원과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 등 중진급들은 내년 총선을 교두보로 당권과 지역 맹주자리를 노리며 차기 대권플랜과 맞물린 중장기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 차기주자 진영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대선 논공행상과 총선 공천 지분 경쟁에서 밀려날 경우 탈당 후 신당 창당도 불사한다는 강경한 목소리도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대선이라는 대전쟁은 끝나더라도 차세대 지도자를 꿈꾸고 있는 차기주자들을 중심으로 총선이라는 2차 전쟁을 예고하고 있는 정황들이다.
따라서 총선 전쟁에 돌입한 정치권은 대선 결과와 관계없이 진보 진영은 대선을 완주한 DY를 축으로 문·이 후보와 차기 대선주자들을 중심으로, 보수 진영은 MB를 중심축으로 박 전 대표와 이회창 후보 간의 삼파전 양상으로 피 말리는 2차 전쟁을 치르게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결국 신당과 한나라당을 양대 축으로 민주노동당, 민주당, 창조한국당, 이회창 신당 등이 경쟁하는 총선 다자구도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아졌고 여기에 대선 결과와 후폭풍에 따라 신당과 한나라당의 세력분화가 가시화될 경우 그야말로 정치권 빅뱅으로 연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투표일을 며칠 앞두고 MB 측이 50% 이상의 득표율를 목표로 정한 것이나 2위 다툼을 벌이고 있는 DY와 이회창 후보 측이 실낱 같은 대역전극을 기대하면서도 내심 지지율 제고에 사활을 걸어 온 것도 정치권 빅뱅을 대비한 총선 대세몰이 전략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정치권이 이미 국회를 통과한 ‘삼성비자금 특검’과 신당이 주도하고 있는 ‘BBK 특검’에 전투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도 다분히 총선용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MB 측은 이미 오래 전부터 대선에 승리할 경우 개혁 공천을 통해 당내 ‘물갈이’를 시도한다는 방침을 정해 놨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 타깃은 영남권 구 정치인과 친 박근혜계 의원들이 대상이 될 것이란 관측이었다. MB의 이러한 정치개혁 의지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대선 승리’라는 조건을 넘어 높은 득표율이 담보돼야 한다. 40% 미만의 득표율로 간신히 승리할 경우 당 장악 플랜 및 개혁 의지에 제동이 걸릴 공산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당권을 놓고 박 전 대표와의 힘겨운 2차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실제로 박 전 대표가 원칙과 명분을 앞세워 MB 지원유세에 적극 나선 것도 대선 이후 당권 및 총선 입지를 다지기 위한 포석이 깔려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박 전 대표가 대선 과정에서 MB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MB의 최측근인 이재오 의원을 최고위원 자리에서 낙마시킨 대신 자신의 측근인 김학원·김무성 의원을 최고위원에 포진시킨 것도 대선 후 2차 전쟁에 대비한 고도의 전략일 것이란 분석이 강하다.
박 전 대표 측근들은 대선 이후 MB 측이 당 개혁이나 총선 공천 과정에서 박 전 대표와 계파 의원들을 외면할 경우 전면전도 불사해야 한다며 선거 전부터 의지를 다져왔고 일부 측근들 사이에서는 여차하면 신당 창당도 검토해야 한다는 강경론도 제기돼 왔다. MB와 박 전 대표가 극한 대치상황을 연출했던 경선 전쟁에 이어 총선 정국을 앞두고 또다시 전투태세로 돌입하고 있는 형국이다.
MB와 함께 보수 적자 논쟁을 펼치고 있는 이회창 후보의 신당 창당도 보수진영 세력 분화와 ‘신 지역패권’ 다툼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가 선거 막판 신당 창당 선언을 하자 MB 측이 바짝 긴장하며 ‘이회창 죽이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도 총선에서 보수 진영 분열을 차단하는 동시에 지역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지작업 성격이 짙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회창 후보 측은 선거 막판 최종 여론조사 결과 DY에게 뒤처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자 이를 애써 무시하면서도 대선 승리는 물 건너가더라도 어떻게든 2위를 사수해야 한다는 위기감에 총력을 기울였다. 대선 결과 3위가 확정될 경우 신당 창당 동력이 급감할 수 있고 총선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으로 분석했기 때문이다. 이 후보 측은 ‘포스트 JP’로 입지를 구축해 온 심대평 대표와 함께 자신의 고향인 충청권에서 정치적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는 1차 목표를 설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회창 후보 측은 대선에서 20% 안팎의 득표율을 얻기만 한다면 신당 창당에 탄력이 붙을 것이고 내년 총선에서 충청권은 물론 PK(부산 경남)지역에서도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란 청사진을 그려왔다. 실제로 경남 출신인 강삼재 전략기획팀장이 캠프를 진두지휘하고 있고 경남도지사를 세 번이나 역임한 김혁규 전 의원과 공민배 전 창원시장이 11일 합류해 PK 교두보 확보에 희망을 불어넣고 있고 총선 출마 의사를 밝힌 이 지역 단체장들이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할 경우 ‘이회창 신당’에 합류할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
범여권을 중심으로 한 진보·개혁 진영도 대선 이후 지분 경쟁과 맞물린 피 말리는 생존게임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정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DY가 여론조사 열세를 극복하고 막판 대역전에 성공할 경우 논공행상과 공천권 등을 놓고 계파별 내부 파워게임이 불가피할 것이고 대선에서 패할 경우에는 친노 반노 비노가 섞여 복잡한 ‘오월동주’를 마감하고 또다시 핵분열 양상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해 왔다. 정치권 주변에서는 “신당은 대선을 목표로 급조된 정당”이라고 비판하는 시각이 적지 않았던 만큼 대선에서 패할 경우 또다시 사분오열될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내년 1월로 예정된 신당 전당대회를 분기점으로 친노·비노·반노 진영 간의 이별전쟁은 극에 달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범여권 후보단일화 요구를 뿌리치고 대선 완주 의지를 굽히지 않은 문국현·이인제 후보는 일찌감치 총선 독자생존 전략에 승부수를 건 분위기다. 재야원로 등 시민사회진영으로부터 단일화 압박을 받아온 문 후보 측은 12일 내년 총선 출마 입장을 밝히는 등 정면돌파 의지를 분명히 했다. 문 후보도 11일 기자회견을 통해 “총선을 포기한 정당은 정당이 아니다. 대선에 집중하되 총선 또한 준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해 ‘마이웨이’ 전략이 총선 행보와 무관치 않음을 시사했다.
“단 한 표를 얻더라도 대선을 완주하겠다”고 선언했던 이인제 후보와 민주당은 대선 패배에 굴하지 않고 내년 총선에서 호남권 맹주로 다시 우뚝 서겠다는 결의다. 민주당은 오래 전부터 “신당은 대선이 끝나면 곧바로 와해될 정당”이라고 공언한 대로 대선 후 신당의 핵분열은 불가피할 것이고 이 경우 중도개혁세력과 호남을 대변할 세력은 50년 전통의 민주당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정치권은 대선 이후 논공행상 논란과 총선 공천 문제 등으로 극심한 후폭풍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특히 대선 승자나 패자 모두 총선 2차 전쟁에 직면한 만큼 세력 확장과 독자생존 전략을 놓고 또다시 대혈투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사상 유례없는 다자구도로 군웅할거 시대를 예고하고 있는 총선정국에 벌써부터 전운이 감돌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