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 투표일이었던 지난 19일 대학로를 방문한 정동영 후보가 막 차에서 내리고 있다. 범여권은 대선 패배의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코앞에 닥친 총선 준비로 마음이 분주하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대선 참패에 따른 후폭풍 중심에는 신당이 자리잡고 있다. 원내 1당이자 명실상부한 진보 개혁 세력 대변자로 범여권 단일후보를 자임했던 정동영(DY) 후보가 이명박(MB) 당선자에게 더블 스코어에 가까운 득표율 차이로 완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는 87년 직선제 도입 이후 최다 득표차(22.5%, 530만표) 패배로 신당 입장에선 굴욕적인 성적표가 아닐 수 없다.
신당 일각에서 DY나 지도부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굴욕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물론 이번 대선 참패는 DY나 지도부의 문제라기보다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 성격이 짙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렇다고 사상 최악의 참패 앞에 이러한 분석이 결코 면죄부가 될 수 없을 것이란 관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여기에 여야를 망라한 정치권 전반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는 삼성 비자금·MB 특검 정국이 본 궤도에 진입하고 있고 내년 총선을 겨냥한 계파간 세력다툼과 이합집산 움직임 등 범여권이 걷게 될 길목 곳곳에 지뢰가 산적해 있다.
당장은 대선 완패라는 충격파가 너무 커 이전투구를 전개할 엄두를 못내고 있지만 조만간 살아남기 위한 계파간 생존게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다. 실제로 초·재선 소장파 의원들 사이에서는 “이대론 총선도 완패한다”는 위기감이 확산되면서 ‘전면적 쇄신론’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이번 선거가 현 정권에 대한 심판이었다는 점에서 친노그룹에 대한 반감이 점차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시기와 방법, 실리와 명분 등을 놓고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이지 어떤 식으든 갈등 뇌관은 폭발할 것이고 결국 범여권 빅뱅으로 연결될 가능성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이와 관련 신당의 한 관계자는 “이번 대선 결과는 참여정부와 실질적 여당인 신당에 대한 철퇴”라며 “당의 진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됐고 대선을 위한 한시적 오월동주도 마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또 “내년 1월 하순 전당대회가 예정돼 있는 만큼 총선 공천권과 당권을 놓고 계파 간 서바이벌 게임은 불가피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합집산과 세력 재편이 이뤄지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현재 신당에는 DY계를 비롯해 경선주자였던 손학규 전 경기지사 그룹과 이해찬 전 총리를 정점으로 한 친노그룹, 김근태 의원 그룹, 민주당 탈당 그룹, 시민사회 그룹 등 5~6개의 정파가 상존해 있다. 이들 정파들은 한동안 ‘대선 승리’라는 대의명분으로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대선 결과 처절한 응징을 받은 만큼 책임론과 당의 진로 등을 놓고 또다시 첨예한 갈등이 분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일부 정파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당권 장악 전략을 수립하는 등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정황도 포착되고 있다.
▲ 이인제(왼쪽), 문국현 | ||
DY는 비록 이번 대선에서는 굴욕적인 참패를 당했지만 그렇다고 대망론까지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의 올해 나이는 54세로 5년 후를 기약한다 해도 60세가 채 안 된다. 출신지인 전북을 넘어 광주 전남에서도 80% 안팎의 득표율을 얻어 명실상부한 호남맹주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처녀 출전한 대선 본선에서 쓴 맛을 경험했지만 대권을 향한 그의 의지는 더욱 불타고 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DY는 대선 패배가 확실해진 19일 저녁 9시20분 쯤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오늘 비록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했지만 나라와 국민을 위해 항상 국민과 함께하겠다”는 소회를 밝혔다. 이는 과거 대선에서 패배한 후보들이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것과 비교되는 말로 총선정국은 물론 차기 대권에 대한 재도전 의지를 열어 논 발언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DY는 잠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모양새를 취하면서 내년 1월 전대 과정에서 측근 의원을 막후에서 지원해 자신이 이끄는 계보가 당권을 장악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여차하면 총선에 직접 출마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해찬 전 총리를 정점으로 한 친노그룹의 행보도 관심사다. 이번 대선에서 범여권이 참패한 주요인이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면서 친노그룹의 정치적 입지는 극도로 좁아지고 있다. 신당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는 책임론과 맞물려 친노그룹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쏠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력 재편 과정에서 ‘친노’ 색깔을 완전히 빼지 않고서는 내년 총선도 필패라는 자체 진단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친노그룹은 호락호락 당하지 않겠다는 각오다. 이들은 내년 전대에서 당권 장악을 1차 목표로 총력전을 펼친 후 여의치 않을 경우 탈당 등을 통한 독자생존을 모색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 전 참여정부 실세들을 주축으로 구성됐던 참여정부평가포럼이 해체되는 대신 이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연구모임 결성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독자생존 플랜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친노그룹 일각에서는 범여권 이합집산 과정에서 이념과 노선이 비슷한 창조한국당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알져졌다.
손 전 지사 그룹도 당권 도전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손 전 지사는 ‘한나라당 탈당’이라는 정치생명을 건 승부수를 던지면서 범여권 경선 흥행몰이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경선 문턱을 넘지 못했지만 대선기간 동안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손 전 지사 그룹 일각에서는 ‘반 노무현 정서’가 대선 참패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는 만큼 총선을 이끌 새 선장으로 손 전 지사를 추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참여정부에 참여했던 주역들이나 친노그룹 인사를 새로운 선장으로 내 세운다면 총선 승리는 물론 신당의 미래도 기대할 수 없다는 논리다.
▲ (왼쪽부터) 정동영, 이해찬, 손학규 | ||
김근태 의원 그룹과 민주당 탈당 그룹, 시민사회단체 등도 당의 진로 문제와 관련해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시민사회단체 리더격인 오충일 신당 대표는 한때 사의를 표명했다가 다시 당무에 복귀했고, 김근태계와 민주당 탈당그룹은 각각 재야파 결집과 친정인 민주당과의 통합을 통해 위기국면을 돌파할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과 창조한국당도 범여권 2차 빅뱅 소용돌이에 빠져들 공산이 크다. 특히 후보단일화를 반대하고 대선 완주를 고집한 이인제 후보의 득표율이 0.7%에 그치자 이 후보와 민주당 지도부는 그야말로 ‘패닉’ 상태에 빠져있다. 민주당은 대선 전 신당과의 단일화에 실패하자 김홍일 전 의원 등 핵심 인사들이 잇따라 탈당하는 등 극심한 내홍을 겪은 바 있어 당 재건과 향후 진로와 관련해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지 못할 경우 당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는 당초 목표로 정했던 득표율 10%에 훨씬 못 미치는 5.8%에 머물자 충격 속에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문 후보 측이 범여권의 거센 단일화 압박을 뿌리치고 대선 완주를 고집한 배경에는 내년 총선에서 독자적으로 정치적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는 나름의 전략이 투영돼 있었다. 범여권이 단일후보를 내세운다 해도 MB를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승부수를 던지느니 차라리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계산이 앞섰던 것이다.
하지만 문 후보의 ‘마이웨이’ 전략은 한 자릿수 득표율로 인해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게 됐다. 무엇보다 선거자금을 단 한푼도 환급받을 수 없게 돼 극심한 재정적 압박을 피할 수 없게 됐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시민사회세력의 막판 단일화 요구를 거부했던 것도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래저래 진퇴양난이지만 그렇다고 총선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문 후보는 신당을 중심으로 한 범여권 진영의 새판짜기와 이합집산이 본격화되는 빅뱅 정국을 틈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범여권은 사상 유례 없는 참담한 대선 성적표를 받고 모든 정파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 이대로 가다간 총선은 물론 진보개혁 진영이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다. 신당 내 제 정파를 비롯한 민주당과 창조한국당이 대선 참패에 따른 상처를 치유하는 동시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 플랜을 물밑 가동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위기감과 맞물려 있다.
내년 1월 전대를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신당 내 제 정파들과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민주당과 창조한국당이 총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범여권 2차 빅뱅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