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일 인수위가 국무총리실의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가운데가 이경숙 인수위원장. 사진공동취재단 | ||
10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한 인수위 측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슬 퍼런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두르자 노무현 대통령은 이에 대해 “소금을 뿌리지 말라”며 강한 반감을 보이는가 하면 여차하면 협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반응도 보이고 있다.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주요 정책에 대해 인수위가 대대적인 메스를 들이대자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던 청와대와 노 대통령은 강한 불만을 토로하며 마지막까지 할 말은 하고 권한도 최대한 행사하겠다는 강경자세로 선회한 것이다. 특히 인사권을 둘러싼 양 측의 기 싸움과 참여정부 치부가 담긴 문서 폐기 문제 등 고급정보 쟁탈전은 새 대통령 취임식 직전까지 첩보전을 방불케 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정권인수 과정에서부터 뭔가 보여주겠다는 MB의 서슬 퍼런 칼날과 마지막까지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자존심이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정권 과도기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노 대통령과 MB는 정치적 이념과 노선은 달리하고 있지만 정치스타일이나 성격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자존심이 강하고 즉흥적이면서 특유의 추진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대선 후 첫 만남부터 팽팽한 기 싸움을 전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2월 28일 청와대에서 저녁 만찬 회동을 가진 두 사람은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부동산·교육 정책 등과 관련해서는 상당한 입장차를 보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MB 측 주호영 대변인도 회동 직후 “교육·부동산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자세한 내용은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주요 정책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은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현직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서 격론을 벌였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질 경우 자칫 MB의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MB는 이날 회동에서 “전임자를 잘 모시는 전통 만들 것”이라며 노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아끼지 않았다.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는 전략을 구사한 셈이다. 두 사람 회동 분위기에 대해 대부분의 언론들이 ‘화기애애’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이러한 전략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MB의 숨겨진 발톱은 곧 본 모습을 드러냈다. 인수위가 각 분과별 정부부처 업무보고를 받기 시작한 2일부터 작심한 듯 서슬 퍼런 구조조정 칼날을 빼들었기 때문이다.
새로 출범할 MB 정부의 주요 정책 기조와 맞물린 첫 수술 메스는 교육부를 향했다. 인수위는 업무보고 이전부터 교육부의 기능축소 내지는 폐지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군기잡기에 나섰던 만큼 2일 교육부의 업무보고 자리는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 속에 진행됐다. 특히 인수위는 14년간 유지돼온 대학수학능력시험 위주의 대입전형을 대입 자율화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한 제도개선의 큰 방향을 잡고 있다. 이는 참여정부가 견고하게 지켜온 ‘3불(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금지) 정책’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 입시제도의 지각변동과 함께 상당한 사회적 논란과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교육부를 상대로 군기잡기에 성공한 인수위의 칼날은 다음날(3일) 국무총리실과 국정홍보처를 겨냥했다. 인수위는 국무총리실의 규모와 기능을 대폭 축소하고 국정홍보처는 폐지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총리실 대폭 축소 방침은 이해찬 전 총리 당시 책임총리제를 명분으로 규모와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확대돼 국정운영에서 부작용을 낳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정권 초기 원활한 국정운영과 공직사회 기강을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강한 청와대’가 절실하다는 MB의 국정구상과도 맞물려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국정홍보처 폐지 움직임은 그동안 홍보처가 기자실 통폐합으로 대변되는 취재선진화 방안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등 국민의 알권리를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분으로 들고 있다. 김형오 인수위 부위원장은 3일 홍보처 업무보고 모두 발언을 통해 “이제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고 국민의 알권리가 제한받는 것은 결코 안된다. 이제 관제홍보시대는 끝났다”고 강조해 폐지 방침이 확정적임을 시사했다.
인수위의 이러한 방침에 대해 홍보처의 한 관계자는 “취재선진화 방안은 참여정부가 언론권력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미래를 보고 추진했던 사안이고 현직 대통령의 임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폐지’까지 운운하는 것은 협박이자 횡포나 다름없다”며 분개했다.
청와대와 노 대통령도 적극적인 대응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인수위의 거침없는 칼날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논평 없이 침묵으로 일관해 왔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격앙된 분위기다. 노 대통령은 3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서 인수위 측의 ‘반 참여정부 정책’에 대해 강한 불만을 여과 없이 드러낸 데 이어 4일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아직은 노무현 정부다. 지시하고 명령하고 새 정부의 정책을 지금부터 준비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인수위의 권한이 아니다”고 반발했다.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부처) 국장들이 인수위에 불려가서 호통을 당한다”며 “지난 5년 정책에 대해 평가서를 내라고 한다고 하는데 반성문 써오라는 것 아니냐. 정말 힘없고 백없고 새정부 눈치만 봐야 하는 국장들 데려다 놓고 호통치고 반성문 쓰고, 그게 인수위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인수위가) 소금을 더 뿌리지 않으면 저도 오늘로 (인수위에 대한 비판적인) 얘기를 그만할 것이고 앞으로 계속 뿌리면 저도 깨지고 상처를 입겠지만 계속 해보자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청와대의 이 같은 입장 선회 배경에는 ‘국정실패’라는 냉혹한 국민적 심판을 받고 있지만 참여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부동산·교육·대북 정책 중 일부 성과를 거둔 정책마저 인수위의 잣대에 의해 평가절하되고 있는 현실을 마냥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다는 위기감과 방어 본능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인수위 측은 노 대통령의 비판에 대해 일단 정면 대응보다는 ‘무대응’ 내지는 ‘사실 교정’ 수준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관가 일각에서 인수위를 ‘점령군’ ‘삼청교육대’ 등으로 빗대고 있는 상황에서 현직 대통령과 정면으로 맞붙는 것은 별로 득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대신 당 차원에서 노 대통령과 청와대를 상대한다는 방침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2002년 현 정부의 인수위도 업무보고를 하던 외교부 간부에게 ‘친미파 아니냐. 나가라’고 소리치는 등 ‘혁명군 사령부’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살벌하게 정권 인수 작업을 추진했었다”며 “국민의 정부를 승계한 참여정부 인수위도 그러했지만 현 인수위는 10년 만에 정권을 교체했으면서도 고압적이고 강압적인 분위기가 아니며 역대 어떤 인수위보다 순조롭게 업무진행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총리실을 비롯한 일부 부처에서는 인수위 활동이 ‘속도위반’이라는 비판과 함께 ‘인수위는 삼청교육대 같다’라는 불만도 터져 나오고 있다. 인수위가 본연의 업무인 정권인수 작업에 머물지 않고 ‘MB 공약의 실천방안’을 해당 부처 공무원들에게 강요하고 있고 새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에 일부 부처는 참여정부에서 추진해온 정책을 스스로 뒤엎는 일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총리실이 인수위에 제출하는 각 부처의 업무보고서를 총리실에도 제출해 줄 것을 요구한 사실이 4일 확인돼 또 다른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총리실은 “인수위에 보고하는 당일 오전에 총리실에도 보고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에 사전검열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총리실이 각 부처의 업무보고 내용을 감시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인수위와 총리실의 알력에 각 부처는 보고서 작성을 놓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서슬 퍼런 인수위 비위를 거스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현 정부에서 부처 지휘·감독 권한이 있는 총리실의 지시를 무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볼멘소리만 커지고 있는 형국이다.
이처럼 현 정부와 차기 정부의 파워게임이 감정싸움 양상으로 비화되면서 인사권을 둘러싼 양 측의 신경전도 가열되고 있다. 인수위는 2일 새 정부 출범 이전에 고위직 공무원이나 공기업 간부 등의 인사를 자제해 줄 것을 청와대에 거듭 요청하고 중앙인사위원회와 각 부처에 관련 공문을 발송했다. 이에 앞서 지난 12월 27일에는 청와대에 공문을 보내 고위직 인사 자제를 요청했지만 청와대는 이미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는 이유로 예금보험공사와 자산관리공사 사장, 중앙선관위원 등에 대한 인사를 잇따라 단행한 바 있다.
특히 이택순 경찰청장(2월 9일)과 성해용 국가청렴위원회 상임위원(1월 24일)을 비롯한 30여 명의 고위공직자가 새 정부 출범 이전에 임기가 만료돼 후임자 선정을 둘러싼 양측의 기 싸움은 더욱 치열해질것으로 보인다.
인수위 측의 거듭된 인사 자제 요청에 청와대는 “최대한 협조할 것”이라는 원론적인 반응을 보여 왔고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은 2일 “정무직 공무원을 제외한 인사는 해당 산하기관과 국책기관이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만큼 인수위가 직접 접촉해 협의하는 게 좋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가 임명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협조할 사안이 아니라는 속내를 담은 발언으로 풀이된다. 뿐만 아니라 노 대통령도 4일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 “정치적 인사를 해서는 안 되는 자리, 독립성이 요구되는 자리는 법대로 할 수밖에 없다”며 “만일에 한번 더 인사 자제하라는 얘기가 나오면 모욕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서 제 마음대로 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인수위와 참여정부의 갈등은 현 정부의 각종 비밀 기록이 담긴 각종 공문서 인수인계 과정에서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10년 만의 정권교체라는 점에 비춰 치부를 감추고자 하는 현 정부와 모든 공문서를 포함해 고급정보 및 현 정부의 모든 것을 확보하려고 하는 새 정부 간에 양보할 수 없는 첩보전이 전개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미 일부 부서가 극비 공문서들을 파기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의혹을 이미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97년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 당선자 인수위 측이 각 부처에 문서파기 중단을 공식적으로 요구한 과거 전례는 이러한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MB와의 첫 회동 자리에서 “문서 폐기 등은 일절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지만 노 대통령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권 인수 과정에서 공문서 파기 문제 등 고급정보 쟁탈전은 불가피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어떻게든 치부를 감추려고 하는 현 정부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급정보를 확보하려고 하는 새 정부 간의 정보전쟁이 새로운 뇌관으로 부상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