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일 오후 서울 삼청동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열린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건설교통부 업무보고에서, 건교부 간부들이 최경환 경제2분과 간사위원(맨 오른쪽)이 회의장에 들어서자 일제히 일어서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잘리지만 않는다면 ‘부’로 가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 (부처가)더 커지니 좋은 점도 있을 것 아니냐” 현재 모 부처에서 근무하고 있는 K 씨가 재정경제부와 흡수될 예정인 기획예산처의 한 관계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그의 생각은 나머지 대부분의 부처 공직자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아닌듯하다. K 씨의 말과는 달리 살아남기 위한 부처들의 몸부림은 최근 공직사회의 불안감이 반영돼 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첫 업무보고를 마친 직후부터 부처의 존폐 여부가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공무원 사회는 술렁였다. 지난 2일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인수위는 “교육부가 이 당선인의 공약을 실천할 의지가 부족하다”며 불호령을 내렸다. 이후 교육부는 폐지 예상 부처 리스트에 수차례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이런 교육부의 업무보고를 본 탓일까. 여타 정부 부처들이 이 당선인의 공약에 맞추어 정책을 뒤집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 인수위의 첫 작업이었던 교육부 업무보고가 졸지에 ‘공약 실천 의지의 부재=폐지 대상’이라는 등식으로 각 부처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 아니냐는 소리가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그 대표적인 예는 건설교통부의 업무보고. 지난 2007년 6월 “경부운하는 수익성이 없다”고 말하던 건교부는 “단순 물동량을 고려했던 과거와 달리 관광수입 및 지역산업 파급효과까지 종합하면 타당성이 있다”라고 입장을 바꿨다. 심지어 “이 당선인의 임기 중 완공을 위해 6월 국회에서 특별법을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내놨다.
“종합부동산세를 완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던 재경부는 대선 직후 “종부세 수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을 바꿨다. 재경부는 지난 7일 산업은행 민영화에 동의해 사실상 이 당선인의 공약인 금산분리 완화의 길도 열어줬다. 금융감독위원회는 그동안 고수해 오던 금산분리 불가 방침을 “글로벌 스탠다드”라며 허용했다.
인수위 일각에서는 “교육부 업무보고 이후 기존에 준비했던 보고서를 완전히 바꾼 부서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자체적으로 평가했다.
부처들은 “정책이 이전과 180° 달라진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하나같이 묵묵부답이다. 다만 건교부의 관계자가 한 언론에서 “무슨 철학이 있어서 이 당선인의 정책에 반대했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부분에서 짐작해볼 수는 있다. 업무보고 자리에서 “우리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들이다”라는 국정홍보처 관계자의 말처럼 정부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정치 중립이 요구되는 공무원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물론 소신을 고집하는 부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인수위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시기를 미국과 협의해 재검토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국방부가 “미국과 합의한 대로 추진하며, 재협의할 계획은 없다”고 분명히했다. 재정경제부는 인수위가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를 6%로 설정한 데 반해 4% 후반으로 낮춰 잡은 것도 마찬가지다. 앞서 인수위가 저신용자 연체기록 삭제 방침을 밝히자 금융감독위원회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통·폐합 대상이 구체적으로 알려지자 부처들은 업무보고에서 보여줬던 ‘말바꾸기’ 보다 더욱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다.
정보통신부와 해양수산부는 신문 광고를 동원했다. 해수부는 지난 9일 한 신문에 “세계 5대 해양강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해양수산부는 반드시 존속되어야 한다”는 광고를 냈다. 폐지 부처로 거론되는 정통부 역시 “대한민국은 정녕 IT를 버리는가”라고 호소문 식의 광고를 게재했다.
해양수산부 강무현 장관은 본인이 직접 해수부 살리기에 나선 사례다. 그는 지난 7일 부산 롯데호텔의 ‘부산지역 해양수산 관계자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해수부 해체 반대 서명운동을 벌일 것을 선언했다. 이런 강 장관의 움직임에 부산의 시민단체들은 “해수부가 해체될 경우 부산시민들이 4월 총선에서 이를 심판할 것”이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통합을 예고하고 있는 여성가족부는 “부처 개편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힐 만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인터넷상을 중심으로 여성부 폐지 1000만인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하지만 이런 여성부의 ‘무반응’과 달리 한국여성단체연합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9일 한국여성단체연합 소속 회원들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자리 잡은 삼청동 한국금융연수원 앞에서 “여성가족부와 보건복지부를 통합시킨다는 것은 그동안 발전시켜 온 성평등을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형오 부위원장은 “최근 통·폐합이 지레짐작되는 부처에서 산하단체를 동원 조직적 활동이나 구체적 로비를 벌이는 정황들이 포착되고 있다”며 “정부조직 개편은 시대적 요구이고 국민적 요청이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행태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부처 통폐합을 막기 위해 공직자들이 벌이고 있는 이 같은 노력의 중심에는 자신들의 “일자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섰을 때 경제부처를 개편하면서 공무원 1000명의 보직이 사라졌다. 김대중 정권에서는 공무원 10% 감축안을 내놓고 부처의 통폐합을 감행하면서 ‘정리해고’ 작업에 들어갔다.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에 공직자들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수위는 부처의 통·폐합으로 인한 공무원들의 동요를 의식해 “공직사회 안정을 위해 공무원 수를 감축하기는 어렵다”며 “인수위원들이 공무원 수를 감축하지 않는 것에 모두 동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인수위가 부처 개편과 함께 ‘예산 10% 감축안’을 내놓고 있는 만큼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여부가 의심받고 있다.
해수부의 한 관계자는 “인원이 그대로 유지되면 가서도 보직 없이 근무하는 기간이 생길 수도 있을 것 아니냐”는 우려와 함께 “적응을 하고 새로운 업무를 하게 되면 그간의 공직 생활에서 쌓아왔던 것은 다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라고 불안감을 나타냈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선 이 당선인의 실용위주 과거불문 인사로 “인사 원칙이 무너진다”며 당혹감을 표시하고 있다. 현 정부의 실정에 책임을 져야할 인물들이 살아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조원동 재정경제부 차관보와 서종대 건설교통부 주거복지본부장의 인수위 발탁과정에서 점화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두 사람은 모두 현 정부의 경제정책과 주택정책 핵심 입안자로서 1급으로 고속 승진했다.
이런 때문일까 정권교체기에 퇴직 대상으로 거론되던 고위 공무원들도 버티기에 나서는가 하면 인수위나 한나라당 유력 인사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 혈안인 공무원들도 상당수 눈에 띄고 있다는 이야기다. 한 공무원은 “현 정부에서 잘 나가던 사람도 지금은 참여정부와 코드가 안 맞았다며 경력세탁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