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학규 대표(왼쪽)와 정동영 전 대표. | ||
“전형적인 계파 안배 인사다.” “쇄신은 물 건너갔다.”
17일 단행된 신당 최고위원 인선을 지켜본 쇄신파와 소장파 의원들이 던진 일성이다. 손 대표가 당 쇄신보다는 지역·계파 안배에 역점을 둔 지도부 구성을 통해 당내 분란을 일시 봉합하려는 미봉책을 쓰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날 새로 임명된 최고위원 5명 중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은 영입 케이스로 치더라도 박홍수 전 농림부 장관(영남), 박명광(DY·김한길) 유인태(친노 중진그룹) 홍재형(충청) 의원 등은 지역과 계파 안배를 고려한 탕평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균환 김상희 최고위원은 각각 호남과 여성계를 배려하는 케이스로 유임됐다.
우상호 대변인도 이날 브리핑을 통해 “강 전 장관과 박 전 장관은 그동안 당 운영에서 자유로웠다는 점에서 외부 영입으로 간주했다”고 전제한 뒤 “홍재형 의원은 충청지역, 김상희 최고위원은 여성계에 대한 배려로 임명됐다”고 말해 탕평 인사를 부인하지 않았다.
손 대표 체제의 첫 실험무대였던 지도부 인선부터 적잖은 파열음이 일고 있어 손 대표가 기치로 내건 실용주의 노선과 공천 지분을 둘러싼 당내 계파 갈등은 갈수록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문병호 정성호 의원 등 쇄신파 의원들은 지도부 인선을 ‘지나친 계파 안배 인사’라고 일제히 비판하고 있다. 문 의원은 “강금실 전 장관은 참여정부에서 장관을 지냈던 사람으로 외부인사라고 하기엔 멋쩍다”고 비꼬았고 정 의원도 “예상대로 계파별 안배, 화합형 인사가 이뤄져 국민들로 하여금 신당의 변화 가능성을 느끼도록 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당내 호남세력 좌장격인 염동연 의원은 16일 당 게시판을 통해 “국민이 이념을 버렸다는 손 대표의 말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좌파 정권이었다는 한나라당과 언론의 거짓말에 동의하고 이를 확산시키는 발언”이라면서 “손 대표의 실용주의 노선이 ‘이명박 따라하기’로 귀착되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고 밝혔다.
소장파인 최재천 의원도 “실용주의 노선이라고 하는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실용주의인지 알 수가 없다”며 “전략 전술 목표 없이 무조건 한나라당 따라가기를 하고 있다.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것 같다”고 혹평했다.
당내 노선 갈등은 신당 지도부 첫 회의에서도 불거졌다. 17일 열린 첫 최고위원회의에서 손 대표는 “자칫 우리 자신을 쇄신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불필요한 분쟁이나 내부적 투쟁을 야기해서 국민에게 또다른 눈살 찌푸리게 하는 것을 연출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단합과 안정을 강조했다.
하지만 신임 최고위원들은 자신이 속한 정파나 지역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미묘한 신경전을 펼쳤다. 유인태 최고위원은 “다들 반성을 이야기하지만 다시 ‘네 탓’ 공방을 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을 좌절, 실망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내 쇄신파들이 대대적인 인적쇄신을 주장하면서 그 대상으로 친노그룹과 중진을 겨냥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풀이된다.
호남 출신인 정균환 최고위원은 “한나라당이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에 이어 국회까지 가져가 대한민국이 일당 통치가 되는 일이 없도록 신당이 견제세력이 되길 바라는 기대심리가 분명히 있다”며 계파 갈등을 진화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충청 출신의 홍재형 최고위원은 “국회의원으로서 총선이 중요한데 우리가 건전 야당이 되려면 유권자의 편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우리는 어떨 때 ‘중도 우’로 가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사더라도 과감하게 유권자 편에서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충청권 민심이 한나라당과 이회창 전 총재가 주도하고 있는 자유신당으로 쏠리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발언으로 당내 일부 충청권 의원들의 탈당 움직임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 위험한 동거 지난해 대통합신당 대통령 예비 경선에서 승리한 정동영 후보(오른쪽)에게 손학규 후보가 악수를 건네는 모습. 대선 당시 둘은 한 배를 탔지만 향후 차기를 노리는 권력게임에서 또 한번 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 ||
따라서 DY계 일각에서는 총선 불출마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는 박 위원을 지도부에 합류시킨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17일 기자와 만난 DY의 측근 A 의원은 “이번 지도부 인선은 DY와의 사전 교감 없이 손 대표와 일부 측근들이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박 위원 인선은 당내 최대 계파인 DY계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생색내기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A 의원은 또 “손 대표는 공천심사위원장 임명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총선 친정체제 구축에 나설 것”이라며 “DY도 더 이상 밀리면 당권도 차기 대권도 기약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는 만큼 조만간 정치활동을 재개할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A 의원의 주장처럼 DY의 최근 일련의 행보는 정치재개를 위한 신호탄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다. DY는 16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정부조직 개편안과 관련, 통일부 폐지 방침을 비판하는 개인성명을 냈다. 그는 성명을 통해 “통일부를 폐지하겠다는 인수위의 결정은 통일에 대한 철학과 현재의 한반도 정세에 대한 인식의 빈곤을 드러낸 것”이라며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적 가치와 국민적 합의에 대한 거부”라고 강조했다. 이어 “북한 당국을 상대할 창구가 없어지면 대북정책의 공백이 우려된다”며 “통일부 폐지에 따른 대북정책의 후퇴와 혼선, 한반도 위기 재현에 대한 부담은 결국 국민이 지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DY가 성명서를 낸 것은 대선 이후 처음이다. 명의도 전직 통일부장관이 아닌 ‘대통령선거 후보 정동영’을 사용했다. 정치재개를 위한 정지작업에 들어간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고 있는 정황이다.
측근들은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지만 정치권 관계자들은 시기와 명분의 문제일 뿐 DY가 정치활동을 재개할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지난 17대 총선에 이어 이번 총선마저 포기한다면 8년이라는 의정활동 공백을 감내해야 하는데 이는 정치인으로 치명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차기 대권을 꿈꾸고 있는 DY 입장에서는 든든한 지역 텃밭이나 계보를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DY가 총선 출마 쪽으로 가닥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은 바로 DY가 처한 이러한 정치적 현실과 맞물려 있다.
DY계 일각에서는 DY가 당선 가능성이 높은 호남 지역이 아닌 서울 종로나 중구, 거주지인 서대문을 지역에 출마해 총선 분위기를 주도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또 일부 측근들은 무리하게 수도권 위험지역에 출마해 패할 경우 정치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만큼 당선 가능성을 고려해 신중하게 출마 지역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DY의 구로을 출마설이 나돌고 있는 것도 이러한 주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구로을은 총선불출마와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한길 의원의 지역구로 반한나라당 성향이 짙은 곳이다.
이처럼 총선 출마 쪽으로 마음을 정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DY는 손 대표와 피할 수 없는 치열한 한판승부를 예고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차기 대권을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향후 당권을 놓고 대혈투를 벌이게 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손 대표와 DY가 비록 지도부 인선 과정에서는 서로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화합 모드를 연출했지만 본격적인 공천 국면으로 접어들면 상황은 급변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직간접적으로 공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있는 손 대표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측근들을 대거 출마시켜 총선 이후 친정체제 구축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DY 또한 당내 공천 과정을 지켜본 뒤 여차하면 승부수를 띄운다는 내부 전략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 대표 측이 계보 의원들의 공천을 보장해 줄 경우 투톱체제로 총선에 올인 승부를 펼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집단 행동도 불사한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민주당과의 재통합론 내지는 연합공천론이 꽤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다. 대선 이후 박상천 대표는 연합공천론을 제기한 바 있고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도 헤쳐 모여식 제3지대 통합신당론을 주창하고 있다. 연대나 통합론이 주로 전·현직 민주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제기돼 왔으나 최근에는 신당 내부에서도 이러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김효석 원내대표는 17일 “총선 전에 범여권이 하나가 돼야 한나라당을 견제할 수 있다”고 전제한 뒤 “할 수 있다면 민주당과 통합을 해 단일대오로 총선에 임해야 한다. 어차피 양당은 한 뿌리이기 때문에 결단만 하면 통합은 어렵지 않다”고 주장했다. 신계륜 사무총장도 최근 한 라디오에 출연해 “민주당과의 연대는 언제나 가능하고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나라당 출신인 손 대표 체제가 출범하면서 자칫 신당의 텃밭인 호남권과 수도권 호남 민심이 이탈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범여권 재통합론은 제 정파에게 ‘양날의 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대선 전에도 경험했듯이 통합론은 제 정파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어 현실화 과정에 넘어야 할 난제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자칫 재통합 카드를 잘못 사용했다간 범여권 2차 핵분열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신당과 민주당을 중심으로 재통합론이 가열되고 손 대표와 DY의 공천 전쟁이 맞물릴 경우 범여권 정계 개편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신당 일각에서는 손 대표와 DY의 공천 갈등이 심화될 경우 수도권과 호남권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세력재편이 이뤄질 수 있다는 섣부른 관측을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범여권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는 손 대표와 DY의 대권 서바이벌 게임이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또 그 파괴력은 어느 정도일지 범여권이 총선을 앞두고 초긴장 모드로 진입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