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1일 이명박 당선인이 농어민대표들과의 간담회에서 이경숙 인수위원장(왼쪽) 김형오 부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권력 창출에서 유지 모드로 변하는 이명박 정권의 시스템이 측근들 사이 파워게임을 야기시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인수위원회 구성과 차기 정부 조각 과정을 보면 친이 그룹의 약진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 대신 그동안 조언자 역할에 그쳤던 전문가 그룹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이 당선인의 권력 구도가 권력 창출에서 권력 유지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력 이동 시그널의 정점은 한나라당 공천 갈등 해소 과정에서 뚜렷이 보인다는 게 정치권의 진단이다. 이 당선인이 박 전 대표 측의 공천 보장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하며 당내의 공천 갈등을 해소시켰다. 그런데 이런 조치는 당권 장악을 기대하던 친이 그룹의 위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명박 당선인의 권력지도는 앞으로 어떻게 그려지게 될지 진단해보았다.
요즘 인수위원회를 출입하는 기자들은 세상이 바뀌었음을 실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주로 기자들에게 아쉬운 소리만 하던 한나라당 의원들이 여당이 되자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별안간 달라지고 전화 연결 자체도 잘 안 되는 등의 모습을 보여 정권 교체를 새삼스럽게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 신문의 돋보이는 면에 인터뷰 청탁을 하던 일부 의원들도 이제는 전화 통화조차 하기 힘들다. 한 핵심 실세의 측근은 “세상이 바뀐 지가 언제인데 아직 옛날 생각만 하느냐”며 기자에게 핀잔을 주기도 한다.
사실 권력의 정점은 세상이 바뀌고 (대선 승리 직후부터) 약 6개월 동안이라는 게 여의도 정치권의 대체적 시각이다. 이때는 언론과 권력이 밀월을 유지하며 좋은 관계로 지낸다. 최근 넘쳐나는 ‘MB(이명박 당선인 영문 이니셜) 스타일’류의 기사는 이런 밀월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언론 트렌드로 볼 수 있다.
새 권력 창출 뒤 6개월 동안은 이명박 당선인 주변의 뉴 파워맨들이 최고의 상종가를 구가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권력에 민감한 공무원들은 온갖 인맥 학맥 혈맥 등의 뒷배경을 동원해 로비를 펼친다. 최근 한 인수위 관계자는 중앙부처의 한 중견 공무원으로 일하는 동문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인수위 관계자는 일면식도 없이 전화로 선배임을 앞세워 말을 대충 놓는 등 경우 없는 행동을 하는 것에 격분, 그 공무원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고 한다. 이런 공무원 로비전은 현재 인수위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전언이다. 인수위는 일부 정도를 벗어난 로비 사례가 드러날 경우 인사에 불이익을 주는 등 강력하게 대처할 것으로 전해진다.
치열한 로비전과 함께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현상으로는 이명박 당선인 주변 측근들 간에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권력 쟁투이다. 이 당선인의 핵심 실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A 씨조차도 한 측근으로부터 “이제 우리도 우리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선 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조언을 듣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자기관리가 깨끗하고 계파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A 씨도 권력 교체기에 들어서면서 ‘자기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는 전언이다.
최근 새 정부 초대 총리로 한승수 유엔 기후변화 특사가 내정되는 과정에서도 이 당선인 주변 측근들 간에 치열한 경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선인과 가까운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총리 인선에는 이 당선인 측근들 간 ‘파워 게임’의 성격도 있다. 누가 누구를 세게 밀고 있고, 누구는 누구를 천거했다고 알고 있다. 후보군 압축 과정에서도 측근들끼리 견제하면서 경쟁이 굉장히 심했다”라고 전했다.
그리고 이러한 측근들 간의 갈등은 점차 이명박 당선인을 둘러싼 권력 이동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는 권력 창출 중심의 시스템에서 권력 유지의 시스템으로의 파워시프트(Power Shift·힘의 이동)가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이 당선인의 권력 구도는 크게 교수출신 전문가 그룹과 서울시장 재직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서울시청팀’, 그리고 이재오 의원으로 대표되는 당내 친이 그룹의 3각 편대로 운용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명박 당선인의 대선 승리 1등 공신이었던 친이 그룹의 파워가 감소하고 대신 그 자리에 교수출신의 전문가 그룹이 이 당선인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러한 파워 시프트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나라당 공천 갈등 수습 과정에서 나왔다는 해석이 나온다.
사실 이 당선인은 국정운영을 위해서 당을 권력 운용의 3각 편대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하지만 친이 그룹은 차기 대권 구도를 염두에 두고 당 장악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 이재오 의원의 최측근 의원은 이에 대해 “행정부는 이 당선인이 알아서 디자인 하겠지만 당은 사정이 다르다. 차기 대권 구도를 위해서라도 친이 그룹이 완전히 당을 장악해야 한다. 이번 공천에서 그 결과가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친박 그룹 배제를 통해 당을 완전 장악해 차기 대권을 노려보겠다는 친이 그룹 나름대로의 계산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최근 한나라당의 공천 갈등이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친이 그룹에서는 내심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 당선인이 이재오 의원을 위시한 친이 그룹의 ‘의견’을 무시하고 당내 안정을 위해 박 전 대표의 요구사항을 대폭 수용했다는 의혹이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공천심사위원회 구성이 친이 그룹에 유리하도록 짜여 있지만 일각에서 친박 그룹의 원내·외 80명 공천 보장설이나 이면합의설 등이 계속 흘러나오면서 친이 그룹 내에서는 “너무 많이 양보한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선에서 승리한 뒤 그런 이 당선인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는 데 이견은 없는 것 같다. 이재오 의원이 2시간 동안 설득하며 국보위 참여 전력이 있는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인선을 반대했지만 결국 이 당선인의 뜻을 관철시킨 것이 그 계기가 됐다는 해석도 있다. 이때부터 이 당선인은 부쩍 ‘인사에서도 실용’이라는 말을 언급하며 당의 의견과는 상이한 의견도 표출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인사가 바로 청와대 입성이 유력시되는 최측근 B 씨다. 그는 ‘실용’의 철학적 아이디어를 제공한 이 당선인의 1급 ‘가정교사’였다. 그는 또한 이 당선인에게 과감하게 ‘노’라고 얘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언형’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 당선인이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당내 안정이 필수라는 정치적 조언을 실천에 옮기는 데 B 씨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공천 갈등 해소 과정을 이 당선인의 ‘실용주의’ 철학과 연결해 봐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선인의 한 측근은 이에 대해 “총선에서 누구 편 후보가 당선되느냐보다 안정적 국정 운영을 위해 어떻게 하면 한나라당이 최대한 많은 의석을 차지하느냐가 당선인의 관심 사항이다. 박 전 대표 측에서 제시한 후보들이 경쟁력이 높다면 자연스레 공천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이는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이 취했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으로 1970년대 말부터 덩샤오핑이 취한 중국의 경제정책)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는 인수위 인선 과정에서도 이 당선인의 철학이 드러난다. 맹형규 의원은 중립 성향이었지만 박근혜 전 대표와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간사로 기용된 것을 두고 친이 그룹 내에서도 말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당선인이 “앞으로 내 사람으로 쓸 테니 데려 오라”는 지시를 했다는 후문이다. 지난 경선 과정에서 박 전 대표 캠프의 종합상황실장이었던 최경환 의원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간사위원으로 발탁한 것을 두고도 앞서의 한 측근은 “능력이 있다면 누가 공천을 받아 당선되더라도 자기편으로 데려와 쓰고 결국 ‘자기 사람’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당선인에게는 있다”라고 말한다.
이번 공천 갈등 해소는 이 당선인의 실용주의에 기초한 것임은 물론이지만 이 당선인 스스로가 지분 보장을 요구하는 친박 그룹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당 전체를 장악하려는 친이 그룹에게도 똑같은 경고장을 날린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 당선인의 당내 측근들이 ‘이명박이 떠난 여의도’의 향후 패권을 놓고 공천심사위 구성 과정에서 필요 이상의 기 싸움을 벌인 것을 이 당선인이 인식하고 일종의 타협책을 낸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선인이 평소부터 지분 보장 등의 여의도식 정치를 청산하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여의도를 떠나 청와대 입성을 앞둔 이 당선인과 여의도에 있는 현역 정치인들과의 인식 차이가 있다는 얘기와도 맥이 통한다. 일각에서는 이 당선인이 이미 밝혔던 대로 박 전 대표를 ‘국정 동반자’뿐 아니라 ‘차기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을 회동에서 밝혔기 때문에 박 전 대표도 화답 차원에서 공천 갈등을 수습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인수위 사정을 잘 아는 한나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에 대해 “청와대 입성을 앞둔 교수출신 한 핵심 측근이 계속해서 공천 갈등 수습을 건의했던 것으로 안다. 이는 그동안 정책과 관련해서 목소리를 내던 전문가그룹이 정치적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정책 결정이 여의도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만큼 전문가 그룹이 당내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앞으로 당내 그룹이 전문가그룹에 의해 집중적인 견제를 받는 것을 뜻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번에 이 당선인이 공천 갈등 해소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친이 그룹으로 대표되는 당의 권력이 행정부로 대표되는 전문가 그룹에 의해 확실한 견제를 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밝히면서 “이 당선인은 기본적으로 말로만 떠드는 정치인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경선 승리를 위해 그들을 중용했지만 행정부 수장이 되면 정치인보다는 전문가 그룹의 의견을 더 경청할 것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권력은 당에서 전문가 그룹으로 서서히 이동중이며 그 첫 번째 시그널이 바로 공천 갈등 해소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앞으로 이명박 권력의 3대 축인 전문가 그룹, 옛 서울시청팀, 당내 친이 그룹은 서로 치열한 권력 쟁투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처럼 수직 구조의 가신그룹이 서열에 따른 나눠먹기식 권력 운용이 아니라 3개의 그룹이 서로 경쟁하는 구도이기 때문에 권력 갈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들 그룹은 필요에 따라 각기 다른 시기에 이명박 정권에 참여했고 그 뿌리도 다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권력 쟁투의 파열음을 낼 가능성도 큰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그 잡음이 도를 넘는다면 그것은 CEO 출신 이명박 당선인이 만들어 낸 ‘끊임없는 경쟁을 통한 살아남기’에서 비롯된 ‘불행한 덫’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이명박 정권의 권력 지도가 주목된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